1947년 10월 5일
박근혜는 9월 24일 '사과' 기자 회견에서 처칠의 말 한 대목을 인용했다.
"과거와 현재가 싸우면 미래를 잃는다." ("If we open a quarrel between the past and the present, we shall find that we have lost the future.")
나는 9월 25일자 <프레시안> 기고문에서 이 말이 맥락을 벗어나 이용되어서는 곤란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1940년 5월 처칠이 수상에 취임할 때는 독일군의 프랑스 석권이 임박한 때였다. 미국과 소련의 참전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전황은 암담했다. 독일과 화의를 맺어야 한다는 여론도 만만치 않을 만큼 영국인의 사기가 떨어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인을 결연한 임전태세로 이끈 것이 무엇보다 큰 처칠의 공로였다.
국론 통일을 위해 처칠이 한 말의 하나가 위의 인용문이다. 과거에 대한 성찰이 문명사회의 요건이라는 것은 상식이다. (적어도 당시 유럽 지식층의 상식이었다.) 이 상식을 무시하자는 처칠의 주장은 위기 상황의 엄중함을 강조한 것이다. 이 위기를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문명사회의 요건조차 접어놓아야 한다는 충격적 주장이었다. 이런 맥락을 무시하고 위대한 사람의 말씀이니까 보편적 진리처럼 받아들이는 것은 그야말로 달 대신 손가락만 쳐다보는 것과 같은 어리석음이다.
전쟁 상황에서는 평상시 같으면 선택받기 힘든 종류의 지도자가 선택되기도 한다. 처칠과 루스벨트가 그런 예다. 루스벨트의 이념은 대공황과 전쟁 같은 비상사태가 아니라면 그렇게 많은 미국인의 지지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국제 관계에 있어서 루스벨트는 강대국 간의 협력 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일원적 세계 질서를 추구했다. 미국 대외 정책에서 이 '국제주의(internationalism)'가 '국가주의(nationalism)'보다 우위를 누린 것은 연합국 간의 협력이 필요하던 전쟁 상황 때문이었고, 또 루스벨트의 강력한 영도력 덕분이었다. 그가 죽고 전쟁이 끝나자 미국은 차츰 국가주의로 돌아섰다.
국가주의자들은 세계 평화보다 미국의 국익을 앞세웠다. 강대국 간의 협력 관계보다 경쟁 관계를 그들은 원했다.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적대 세력을 설정해서 양극 체제를 만드는 것이 일원적 세계 질서보다 미국에게 유리한 구도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냉전의 형성 과정에는 수많은 상호 작용이 포개져 있어서 대립의 책임이 어느 쪽에 있는지는 닭과 달걀의 선후 관계처럼 따지기 힘든 일이다. 그러나 전체적 추세는 미국의 도전에 소련이 대응하는 틀로 파악할 수 있다. 1947년 봄 미국에서 트루먼 독트린과 마셜 플랜이 나온 데 대한 반응으로 9월에 코민포름이 결성되는 과정에서도 소련의 수동적 입장이 확인된다.
종전 당시 미국은 심각한 파괴를 모면한 유일한 산업국이었다. 군사력에 있어서 미국의 우위는 원자폭탄 하나에 달려 있었던 반면 경제력-생산력의 우위는 압도적인 것이었다. 몇 해 동안 미국의 공업 생산량은 다른 모든 나라를 합친 것보다 컸다. 이 경제력을 무기로 국제 관계의 주도권을 확보한다는 의미가 마셜 플랜에 들어 있었다. (1941~45년에 부통령을 지내고 1948년 대통령 선거에 진보당 후보로 나설 헨리 월레스는 마셜 플랜이 세계 질서의 양극화를 초래하고 전쟁의 위험을 늘릴 것이라는 이유로 이에 반대했다.)
1945년 8월 4일자 일기에서 독일 산업 경제의 파괴를 목표로 한 '모겐소 플랜' 얘기를 했다. 전범 국가의 강대국 부활을 가로막는다는 것이 종전 당시 연합국들의 합의였다. 그런데 1946년 말까지 유럽의 부흥이 지지부진하고 서유럽 국가에서도 좌익의 세력이 자라나는 데 미국 정치가들이 경계심을 품게 되었다. 유럽 부흥을 획기적으로 촉진하겠다는 마셜 플랜에는 산업국 독일의 부활도 들어 있었다. 마셜 플랜이 유럽에서 독일의 역할을 회복시킨 것과 같은 논리에서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의 역할도 미국의 지지를 받게 된다.
유럽 국가들이 부흥 방안을 의논해서 결정하면 미국이 자금을 제공하겠다는 제안을 담은 마셜 플랜은 명분상 소련 등 동유럽 국가들도 제외할 수 없었다. 스탈린도 애초에는 마셜 플랜을 받아들일 유혹을 느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자금 지원의 부대조건이 미국의 영향력 확보를 전제로 하는 것이란 사실이 분명해지자 스탈린은 동유럽 국가들이 마셜 플랜에 참여하지 못하게 가로막았다.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가 7월에 파리에서 열린 마셜 플랜 회의에 참석을 약속했다가 소련의 압력으로 취소했다.
피폐한 전후 상황에서 동유럽 국가들도 마셜 플랜의 유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소련은 이들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하기 위해 '진영'을 만드는 작업에 착수하게 되었다. 1947년 9월 소련은 9개국 공산당 회담을 폴란드에서 열었고, 이 회담을 통해 코민포름이 결성되었다. (참가국 : 소련,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폴란드, 루마니아, 이탈리아, 프랑스)
1919년에 결성된 코민테른의 1943년 해체는 연합국 간의 신뢰 관계를 위한 것이었다. 코민테른은 소련의 국제적 영향력을 보장하는 기구였는데, 미국과 영국 등 자본주의 국가들이 그 존재에 위구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스탈린이 자진해서 해체한 것이었다. 코민포름을 만듦으로써 소련은 4년 만에 국제적 영향력의 제도적 근거를 갖게 되었다. 미국이 유엔을 통해 국제적 영향력을 누리는 데 비하면 초라한 수준이었지만, 이 기구를 통해 공산권의 '진영화'가 시작되었다. 공산권 진영은 경제 기구인 코메콘(1949년)과 군사 동맹인 바르샤바조약기구(1955년)을 통해 굳어지게 된다.
1947년 9월의 9개국 공산당 연석회의 주제는 소련 공산당의 보고서에서 나타났다. 이 보고서는 "국제 정치가 미국 제국주의자들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음"을 지적하고 미국 제국주의자들이 "약화된 유럽 자본주의 국가들의 노예화"에 착수했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전 세계, 특히 미국, 영국과 프랑스의 반동적 제국주의자들이 독일과 일본을 소련에 타격을 가할 힘으로 키워내는 데 희망을 걸고 있다."고 주장했다. (<Wikipedia> "Marshall Plan") 소련 측 냉전 논리가 모습을 갖춰 나타난 것이다.
1947년 6월 5일 마셜 장관의 하버드 대학 연설로 마셜 플랜이 공개되고서부터 동서 양 진영의 경계선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9월까지는 한편에서 마셜 플랜의 시행 준비가 진척되고 있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이에 대항하는 공산주의 진영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조선에서 6월 11일까지 잘 돌아가고 있던 미소공동위원회가 그 후 정체 상태를 거쳐 파국에 이르고 조선 문제가 유엔 총회에 상정되기에 이르는 과정 역시 유럽에서 일어난 변화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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