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곰 따져보면 이런 열광은 미국에 대한 우리 안의 열등의식이 발현된 것이란 생각이 슬그머니 든다. 문화와 정치 등 우리 사회 전 분야에 깃든, 이런 서구 중심주의를 점검해 보고 해결책을 모색해 본 것이 이 책 <난 몇 퍼센트 한국인일까>(책세상 펴냄)이다.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강정인이 1998년부터 강의해온 '문화와 정치 : 서구 중심주의를 넘어서'의 강의 노트에 이를 들었던 학생들의 글을 더해 엮었다.
책은 얼핏 가벼워 보인다. 시사적인 제목은 내용 전개를 짐작케 한다. 기획 기사나 특집 방송처럼 영어 교육 열풍이나 스타벅스 같은 서양 문물이 우리 곁에 얼마나 파고들었는지 스케치하듯 보여주고 뻔한 결론을 내릴 것이란 예상이 든다. 표지 디자인도, 흥미로운 천연색 일러스트가 곳곳에 포진한 본문 디자인도 이 같은 선입견을 부채질한다.
▲ <난 몇 퍼센트 한국인일까>(강정인 지음, 책세상 펴냄). ⓒ책세상 |
바하를 음악의 아버지, 헨델을 음악의 어머니라 칭하는 데 대해 어떤 학생이 묻는다. 서양 고전 음악의 아버지, 어머니 아니냐고. 옷에 묻은 음식 자국을 보고 김치 국물이냐고 물었더니 불쾌한 얼굴로 토마토케첩 자국이란 답이 돌아오더라는 웃지 못 할 이야기도 실렸다.
그래도 이런 사례는 웃어넘기자. 대신 책이 가진 문제의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은이는 먼저 '~중심주의'가 '인간에 의한 인간의 억압'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 것이란 점에 착안했다. 중국 중심주의(중화주의), 남성 중심주의(가부장제), 백인 중심주의(인종주의)가 그것이다.
'서구 문명의 가치, 제도 그리고 세계관을 보편적이고 우월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주장하는' 서구 중심주의는 유럽과 미국은 '중심'이고, 비서구는 '변방'이며, 서구가 게임의 규칙을 만들고 서구가 문명의 발전 모델이란 생각을 담고 있다. 지리적으로 지구의 중심이 있을 수 없으며, 각각의 문명은 저마다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데도 그렇다.
지은이는 이를 의식 조작의 산물로 본다. 예를 들자면 19세기 유럽인들에 의한 고대사 서술은 유럽을 고대 그리스·로마 문명의 정통적 상속자로 보지만 그리스 문명의 이집트 기원을 부정하고 유럽계에 속하는 아리안 족 기원설을 내세워 유럽 중심주의의 토대를 만들었다는 설명이다.
이 같은 서구 중심주의의 연원을 따진 지은이의 설명에 몇 가지 눈에 띄는 대목이 있는데 르네상스와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종래의 '기독교 대 이슬람'이란 축에서 '문명 대 야만'이란 축이 형성됐다는 것도 그 중 하나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문명과 사회의 발전에는 '오직 하나의 길'이 있으며 모든 사회는 동일한 척도에 따라 초기 단계, 발전 단계 등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고 보았다고 지적한다. 19세기 국제법학자 제임스 로리머는 '과학'에 바탕을 두고 인간을 문명인, 야만인, 미개인으로 구분한 것이 그런 예이다. 이는 비서구에 대한 서구의 지배는 힘의 정치로 인한 우발적 지배가 아니라 뉴턴의 만유인력 같은 과학적 법칙에 따른 필연적 결과라는 시각으로 이어졌다.
이런 '문명화' 흐름은 신흥 강국 미국의 부상으로 20세기 들어 '근대화'의 탈을 쓰게 된다. 산업적 근대성을 성취함으로써 물질적 풍요와 자유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는 근대화 이론은 공산주의자들의 세계 혁명을 저지하고 제3세계 국가들을 서구 문명의 영향권에 묶어두는 데 이바지했다. 하지만 미국이 추진하던 '근대화'의 성과가 부진하자 1970년대부터 대두된 것이 '지구화'다. 서구 중심주의의 또 다른 얼굴인 '지구화'는 전 지구적 차원에서 국가 개입의 최소화와 시장 논리의 극대화를 추구하는데 이는 하강기에 접어든 미국화에 다름 아니란 시각을 소개한다.
그런데 서구 중심주의의 사상적 뿌리는 오래 되었다고 한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란 명제로 유명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범주에 아시아인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당연하게도 야만인들은 그리스인들에 의해 지배받아야 한다"고 단언했다. 이는 <자유론>을 쓴 영국의 존 스튜어트 밀이나 <자본>의 저자 카를 마르크스가 "영국의 인도 식민지 통치가 정당하며 꼭 필요한 것"이라 주장한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이는 유교적 민주주란 불가능하다며 동아시아 유교 문화권에서 등장한 민주주의를 '일당 우위적 민주주의'란 일종의 '일탈형'으로 본 미국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에까지 이른다.
이런 유의 책이 통상 그렇듯 대안 혹은 처방이 빠질 수 없다. 한데 강의의 목적이 그래서인지 아니면 뾰족한 수가 없는 탓인지 명확한 실천적 방안이 보이지 않는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대신 방법론은 눈여겨 볼 만하다. 안데르센의 동화 <미운 오리 새끼>를 예로 들면서 새끼 백조가 '오리 중심주의'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제시한다.
오리의 모든 것을 습득하고 차이를 좁혀가는 '동화적 전략', 백조가 오리보다 더 예쁘다는 사고의 전환을 꾀하는 '역전적 전략', 오리와 백조의 장점을 취합하는 '혼융적 전략', 백조가 예쁘고 오리가 밉다는 기준이 사실상 또는 이론상 타당한 근거가 없다는 태도를 취하는 '해체적 전략'이 그것이다.
지은이는 그러면서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한다. 이솝 우화의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다. 이를 통해 거북이가 말도 안 되는 달리기 경주에 응한 데 대해 전복을 꾀한다. 거북이가 만약에 결정권이나 힘이 있었다면 자신이 유리한 수영으로 견주자고 제안하지 않았겠느냐는 질문이다. 이는 비서구 사회가 서구 중심적인 게임의 규칙에 따라 '근대화' 경주를 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기도 하다.
'전통의 현대화'로 귀결되는 책은, 막연히 서구 좁게는 미국에 기울어져 있는 우리 사회 문화 현상을 짚고 개탄하는 데 그치지 않아 매력적이다. 많은 생각거리를 던지면서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는 덕분이다. 8년 전에 나온 강의록임에도 그 가치가 여전한 까닭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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