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아예 세 명의 책벌레가 작심하고, 스마트폰은 꺼둔 채 한 달에 한 번씩 만나기로 했다. 다양한 주제의 책들을 선정하여 같이 읽고 토론하는, 오로지 책 수다만을 위한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그 세 명이란, 도서평론가 이권우(한양대 특임교수), 서평가 이현우(필명 '로쟈'·한림대 연구교수), 전직 영화 잡지 기자이자 <범죄 소설>(강 펴냄)을 쓴 김용언이다. 이 책 수다는 앞으로 1년 동안 매달 <프레시안>과 인터넷 매체
9월의 책은 도널드 서순의 역작 <유럽 문화사>(오숙은·이은진·정영목·한경희 옮김, 뿌리와이파리 펴냄)다. <유럽 문화사>의 어마어마한 분량에 질려 한숨만 쉬다가 용기를 내어 첫 장을 펼친 당신이라면, 아마 비슷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무서워하다가 어…재밌네? 싶고, 어느새 정신없이 1권을 넘어 2권을 꺼내드는 속도가 빨라진다.
19세기부터 시작된 문화사 200년을 날카롭고 선명하게, 자주 신랄한 유머를 섞어가며 해설하는 도널드 서순의 필력은 독자를 사정없이 쥐고 흔들어놓는다. 전 국민의 필독 교양서로 지정되어 각 가정의 책꽂이에 한 질씩 꽂혀있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강력 추천작. 다음은 <유럽 문화사>를 놓고 두 시간 동안 진행한 책 수다의 주요 내용이다. <편집자>
▲ <유럽 문화사>(1권 '서막', 도널드 서순 지음, 정영목·오숙은·한경희·이은진 옮김, 뿌리와이파리 펴냄). ⓒ뿌리와이파리 |
이현우 : 문화 사전 같다는 인상이 가장 큽니다. 사전을 누가 처음부터 마지막 쪽까지 다 읽겠어요. (웃음) 필요한 영역별로 그때그때 참조할 수 있는 사전으로 보는 게 좋을 듯합니다.
이권우 : <유럽 문화사>의 장점이자 단점이, 연도별로 나누고 그 안에서 또 주제별로 나누어 기술됐다는 거죠. 주제별로 크게 분류되어있다면 그 흐름을 따라 죽 읽으면서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두 가지 기능이 복합되어 있거든요. 게다가 다섯 권짜리 책이니 양도 만만치 않고요.
김용언 : 사전에 가깝지만, 일차적인 느낌은 서술 자체가 무척 평이하고 재미있게 쓰였다는 것입니다. 사실 200년의 문화사를 다룬다는 게 독자에게 많은 지식을 요구함에도 불구하고, 잘 모르는 사람이 무턱대고 책을 펼쳤더라도 그렇게까지 진입 장벽을 높진 않을 것 같아요. 문화의 각 분야 중 개인적 흥밋거리부터 천천히 읽어나가는 데 큰 무리는 없을 것 같고요.
그래서 도널드 서순이 집필할 때 주된 독자층을 어떤 사람으로 상정하고 썼을지 좀 궁금했습니다. 책의 많은 부분이 출판에 관련된 부분을 다루면서 19세기부터 20세기까지 독자층의 변화를 일별하는데, 정작 본인은 자신의 책이 어떤 독자들에게 읽혀지기를 기대했을까요? 우리 같은 사람일까요? (웃음)
이현우 : 서순이 서문에도 썼지만 좁은 의미에서의 문화에 집중했죠. 출판, 음악, 영화 등이요. 그나마 미술을 뺐기 때문에 분량이 줄어들었는데, 그 많은 분야에 세부적인 디테일과 정보를 꼼꼼하게 제공하잖아요. 그게 재미있는 면인 동시에 읽기 힘든 면이기도 하죠. 무엇보다 문화사 서술에 대한 저자의 관점이 흥미로웠어요. 중간 계급을 위한 문화의 생산과 소비가 19세기부터 시작됐는데 사실 정말 짧은 시간밖에 안 걸렸구나, 이게 우리의 전사(前事)구나 하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죠. 무척 유익한 독서 경험이었어요.
이권우 : 저자가 책 제목을 <유럽 문화사>로 지은 것도 유의미합니다. 예전 같으면 그냥 '세계 문화사'라고 썼을 수도 있어요. 근대의 창출점이 유럽이었기 때문에, 사실 '근대 세계 문화사'라고 해도 크게 저항을 받진 않았을 텐데요. 굳이 자신의 지역적 특색을 정확하게 드러냈다는 건 어쨌든 20세기 후반 서구 지식 사회의 자기반성이 담겨있다고도 볼 수 있겠죠. 유럽이라는 지역의 지난 200년을 탈식민주의적인 시선으로 보겠다는 의지가 있는 것 같아요.
이현우 : 동아시아 쪽에서 독서 시장이 본격적으로 형성되는 건 20세기가 넘어서부터죠. 유럽 쪽은 한 세기나 먼저 시작되었다는 시차가 존재합니다. 한국의 독서 시장에 관련해서는 천정환 교수가 쓴 <근대의 책 읽기>(푸른역사 펴냄)가 비슷한 콘셉트의 책입니다.
이권우 : <유럽 문화사>의 기본 테마가 서문에 잘 나옵니다. 정신사적 측면보다 사회사적 측면을 강하게 드러내지요. 15쪽에 보면 이런 말이 나와요.
"지난 200년에 걸쳐 문화 소비가 엄청나게 증가한 셈이다. 바로 그 역사가 이 책의 주제를 이룬다."
이걸 놓치고 <유럽 문화사>를 읽으면 안 됩니다. 근대 문화가 결국 대량 소비 생산 체계를 구축한 근대 사회 체제와 일치하는 점이 있다는 걸 염두에 두면서 읽어야 하지요.
이현우 : 문화는 생산되고 소비되는 상품이라는 점을 계속 강조해요. 그런데 생산과 소비가 이루어지려면 시장이 있어야 하죠. 출판의 경우 책을 쓰는 저자가 있고 책을 만드는 출판업자가 있고 독자라는 삼박자가 갖춰져야 합니다. 그런 시장이 처음 형성되는 게 19세기부터인데, 그나마 규모까지 갖춰지는 건 19세기 중반부터지요. 그런 지점에 초점을 맞췄다는 점에서, 제목은 다소 평범하게 들릴 수 있는 <유럽 문화사>지만 개성을 갖고 있는 문화사라고 생각합니다.
김용언 : 한국 독자 같은 경우 사실 '유럽의 문화사'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이들의 역사를 왜 내가 읽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어요. 이 책은 문화 생산의 최종 목표를 균질화와 확산이라고 정리하잖아요. 전 세계가 거의 균질한 문화를 흡수하게 된 과정을 보여주는 책이고요.
그런 점에서 이 책의 내용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걸 강조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건 하나도 없어요. 빅토르 위고의 소설부터 모차르트의 오페라까지, 우리는 그들의 역사와 생산물을 이미 내 것처럼 잘 알고 있어요. 서순이 의도했을 독자층에 동아시아 지역의 독자까지 포함되었을지는 모르겠지만, 21세기의 아시아인이 읽었을 때 전부 이해가 가는 내용이라는 점에서 결국 문화사의 진화와 확산의 최종 단계에 우리가 이미 포함되어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권우 : <유럽 문화사>를 읽다보면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가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일단 '사회사'를 강조하고 있잖아요. 하우저는 죄르지 루카치의 제자답게 계급성이나 사회의 역동성을 문화에 반영시켜 서술했죠. 도널드 서순의 경우 산업적 토대가 더 강조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근대 유럽 문화의 태동과 확산에 있어 부르주아의 역할이 컸다는 것도 강조하고요. 좀 더 정밀한 독서를 통한 비교가 필요하겠지만, 다른 측면이 분명 있어요.
이현우 : 독서 시장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부르주아뿐 아니라 그 주변의 좀 더 넓은 계층들이 필요해집니다. 프티 부르주아부터 글을 읽을 줄 아는 노동자 계층까지, 문자 해득력을 갖춘 새로운 독서 대중이 필요하죠. 게다가 고등 교육도 필요해요. 고등 교육을 통해 배출된 어떤 독자층, 정확하게 부르주아와 딱 일치하지는 않지만 문화의 생산과 소비가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계층이 형성되고 그들에 의해서 문화가 주도됩니다.
그들을 위한 문화인 동시에 그들이 향유하고 소비하는 문화가 어떻게 발전하고 정점에 올라갔는지의 과정은 정말 흥미로워요. 예를 들어 러시아만 해도 19세기 중반 문맹률이 95퍼센트 이상인데, 독자층이 얼마 안 됐거든요. 그런데 문학 산업은 19세기 후반에 정점을 찍게 되죠. 거기에 견주면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문화 시장, 출판 시장이 굉장히 큰데, 뭔가 배울게 있지 않은가 싶어요.
▲ 이현우 한림대학교 연구교수. ⓒ자음과모음 |
문해력과 문맹은 다른 문제다
이권우 : 우리 셋 다 아무래도 책과 제일 친하다 보니 출판 관련 얘기들이 가장 눈에 들어올 거 같은데요. 가장 먼저 1권 62쪽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와요.
"책 읽는 데에 글 읽는 능력만 있으면 되는 건 아니다. 책을 사거나 빌리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 일에서 벗어난 시간이 있어야 한다. 책을 읽게 하는 사회적 유인이 있어야 한다. 책을 이해하려면 교육을 받아야 한다. 19세기에 이런 조건을 모두 갖춘 이는 드물었다. 20세기에 들어 마침내 8시간 노동이 대부분의 노동자들에게 현실이 되자, 이번에는 책과 경쟁하는 값싼 여가 활동들이 나타났다. 영화, 라디오, 그리고 무엇보다도 텔레비전이 그 예인데, 이런 것들을 즐기는 데에는 아무런 기술도 필요 없었다. 독서에 이르는 길에는 늘 장애물이 가득했다."
전 이 부분이 너무 호소력 있게 다가왔어요. 문맹에서 벗어나 책 읽는 집단이 개발되었는데 곧바로 다른 장르가 우세해지면서 독서를 방해하는 요소가 늘어났다는 것. 언제나 많은 환경이 독서를 방해하는데 그걸 이겨낸 게 또 우리의 독서 역사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이현우 : 도서 권장 운동 부분도 재미있어요. 하층 계급이 글을 배우고 읽기 시작하는데, 아무래도 흥미 위주의 책들에 많이 몰리게 돼요. 거기에 대해 지배 계급이 불안감을 느끼고, 독서 자체를 금지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일종의 양성화 방안으로 '좋은 책', '문제되지 않는 책'을 권장하며 읽히려고 하는 움직임이 이미 19세기에 드러나죠.
이권우 : 도전으로서의 문학사가 있잖아요. 지금 정전으로 인정받는 작가들이 당시에는 그냥 돈 잘 버는 그저 그런 작가 취급을 받았다는 디테일들도 재미있어요. 지금은 재출간도 안 되는 작가지만 그때는 높은 문학성으로 칭송받은 작가도 있고요. 예를 들어 오노레 드 발자크 같은 작가는 지금이야 위대하고 대표적인 작가로 칭송받지만 그때는 다소 저급한 작가 취급을 받았다고 하잖아요. 정전에 대한, 변치 않는 가치에 대한 믿음이 많은 변화를 겪어왔다는 걸 볼 수가 있어요.
이현우 : 한국은 문맹률이 최저 수준이잖아요. 최고 수준의 문해력을 갖고 있는데 동시대 독서율은 현저하게 낮은 이유가 당연히 궁금해집니다. 도널드 서순도 강조하지만 문자 해독력을 갖는 것과 독서는 별개에요. 거기서 한 단계 더 나가야 합니다. 독서 시장을 만들기 위해선 초등 교육만으로는 안 되고 고등 교육이 필요했다는 거죠.
한국에선 독서 진흥 운동 같은 걸 참 많이 하지만, 초등 교육 정도만을 염두에 둔 채 왜 책을 읽지 않느냐고 채근하는 건 아닌지 의문이 들어요. 최근 도서관에서 독서에 대한 강의를 하다보니까 그런 고민을 하게 됐습니다. 대학에서도 책을 안 읽는 게 아니라 못 읽는 건 아닌가 싶어요. 문해력이 있으니 모두 책을 읽을 거라고 가정하지만, 그건 별개의 문제라는 거죠.
이권우 : 우리는 문맹률과 문해력을 동일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문맹과 문해는 다른 차원입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철저하게 고등 교육의 수준을 거쳐야 문해력이 생기는 건데, 우리는 문해력을 키워주는 고등 교육을 못하는 거지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고등 교육 기관이 있으나 문해력을 향상시켜주는 고등 교육은 없습니다.
최소한 중·고등학교 때부터 문해력을 키워주는 책을 읽고 토론하고 글 쓰는 수업이 가능해야 하는데, 그게 안 되기 때문에 대학에 와서도 청년들이 책을 잘 못 읽는 것 아닌가 싶어요. 최근에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미국의 유명 대학교들에서 쓰기 수업과 토론 수업은 줄어들고 있대요.
초·중·고등학교에서부터 지속적으로 토론하고 쓰는 교육을 해왔기 때문에 대학에선 그 정도를 바탕으로도 충분하다, 대신 고전 읽기 교육은 여전히 강세를 보이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와 비교했을 때 상당히 큰 차이죠. 진정한 의미에서 책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확산의 동력은 초등교육이 아니라 고등교육이라는 건 중요한 지적입니다.
자본주의와 민족주의, 문화의 쌍두마차
이현우 : 한국이 정치나 경제 제도에서는 압축적인 근대화를 성취했지만, 문화적인 면에서는 성장이 부족했던 것 같아요. 외양으로는 됩니다. 입고 먹는 게 서구와 다를 바가 없어요. 하지만 정신적인 문제, 문화적 교양은 좀 다릅니다. 서구에선 100년, 200년 역사를 거치면서 이 단계에 도달했는데, 우리한텐 그 축적 과정이 생략되어 있어요. 그러나 외양은 비슷하기 때문에 그 차이에 대해 둔감한 거 아닌가 싶어요.
이권우 : 1권 251쪽에 이런 부분이 있어요.
"소설과 자본주의 사회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다. 그러나 그 연관성이 꼭 이데올로기적인 건 아니다. 연관성은 그보다는 소설의 대량 생산이 산업화에서 핵심적인 부분이라는 데에 있다. 소설의 내용은 그 자체로는 특별히 '자본주의적'이지 않으며, 독자들은 책에서 자기가 원하는 이데올로기를 발견하는 일이 많다."
자동적으로 루카치가 떠오르죠. 소설이야말로 부르주아의 문화라고 했던 루카치의 소설 이론 말이에요. 하지만 동시에 서순은 루카치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관점을 보여주는데, 바로 루카치와는 다른 산업적 토대를 주목한다는 거죠. 자본주의적 정신이 중요한 게 아니라 소설의 유통 방식과 생산 방식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요. 어쩌면 책에 대한 형이상학적 접근을 하부 구조와의 연관성으로 바꾼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김용언 : 제가 가졌던 궁금증과 연관되는 부분 같습니다. <유럽 문화사>를 읽으면서 같은 시기에 한국은 어땠을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 이 책에서 얘기하는 소설 시장의 동력 중 하나가 대량 생산 문제뿐 아니라 민족주의와도 관련이 있잖아요. 특정 시기에는 독일에서 영어권 소설을 경원시하며 수입을 막았다든지, 혹은 이탈리아에서 <쿠오레> 같은 소설이 대대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국민주의적 아동 문학'의 불을 지폈다고 할지.
한국 같은 경우는 19세기 후반이라면 산업화 자체도 안 되어있지만, 민족주의 감수성 자체는 굉장히 높았잖아요. 그랬을 때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 자기네 말로 된 장편 소설을 통해 민족적 감수성을 키우는 동시에 다른 나라들에까지 그것을 전파했던 위력이, 한국에서는 발휘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현우 : 자본주의 시장은 이윤이라는 동기가 작동해야 움직이는데, 인쇄 혁명에서도 마찬가지 메커니즘인 것 같습니다. 저자도 썼다시피 한국은 금속 활자를 세계 최초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쇄 혁명이 일어나지 못했어요. 인쇄술은 발명했지만, 인쇄 혁명을 뒷받침할 수 있는 사회적 토대를 안 갖고 있었죠.
정부가 출판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화폐 경제가 작동하지 않았어요. 결과적으로 독자가, 독서 시장이, 출판 시장이 만들어질 수 없었어요. 또 한 가지, 근대화 이전에 사람들이 책을 읽지 못했던 배경에는 책을 읽을 필요가 없었다는 상황도 포함됩니다. 근대적인 고등 교육이 필요한 건 산업 구조의 변화와 발맞추잖아요.
새로운 지식, 지배 계급이 요구하는 그런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고등 교육이 필요하죠. 그 전엔 소수의, 귀족들의 전유물이었을 뿐 일반 평민들에게는 그런 지식이 필요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산업 구조상의 차이가 문화 구조적인 차이와 연계되어 같이 가는 셈이지요.
이권우 : 강명관 선생의 글에서 그런 내용을 읽은 적이 있어요. 금속 활자의 발명이야말로 인쇄술에 대한 국가적 통제의 상징이라는 겁니다. 책을 다량으로 찍어서 유통시키기 위해서라면 목판 인쇄도 상관없어요. 그런데 목판은 한번 새겨지면 그걸로 계속 찍어야 하잖아요. 바꿀 수가 없는 겁니다.
활판 인쇄는 글자를 해체시키잖아요. 많은 종수를 적게 찍기 위해서 금속 활판이 필요했다는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양반들, 사대부들에게만 필요한 책을 딱 찍고 얼른 활판을 해체해서 다른 책을 만드는 거죠.
이현우 : 같은 활판인데 용도가 다르군요. 많이 찍기 위해서가 아니라 조금 찍기 위해서.
이권우 : 또 하나 흥미로웠던 부분은, 1권 371쪽에 나온 부분입니다.
"신문과 잡지 덕분에 멀리 떨어진 공동체들이 '우리' 나라, '우리' 통치자, '우리' 정부에 관한 지식을 공유했다. 독자는 신문을 통해 '자기와 다를 바 없는' 사람들에게서 공통의 정체성을 발견했다."
이게 바로 상상의 공동체라는 거지요.
이현우 : 베네딕트 앤더슨 말씀이지요?
이권우 : 네. 인도네시아 지역에서 민족주의가 발생하게 된 동기를 연구했을 때 신문과 책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내용이 나오잖아요.
이현우 : 앤더슨은 신문과 잡지가 같은 시간, 다른 장소를 이야기한다는 점을 지적하죠. 근대 소설에서도 '한편'이라는 단어가 무척 중요해져요. 제주도의 누군가는 무얼 하고 있었다. 한편 평안도의 누구는, 이러면 생면부지의 둘이 연결되며 공동체 의식을 갖게 된다는 겁니다. 근대 인쇄 매체들이 그런 역할을 수행했죠. 거꾸로 그런 매체들이 없었을 땐 그런 식의 동일 민족에 대한 의식이 가능했을까 상당히 미심쩍은 거죠. 동네 공동체는 가능하지만 큰 단위의 민족 공동체는 환상일 수 있습니다.
이권우 : 근대는 자본주의와 민족주의가 함께 가니까요. 거기서 신문, 잡지가 굉장히 중요해지고, 더불어 표준어도 중요해지죠.
김용언 : 입말에서 글말로 이행하게 되면서요.
▲ 김용언 기자. ⓒ프레시안(최형락) |
중요한 건 돈이다
이현우 : 2권의 18장 제목은 아예 "중요한 건 돈이다"입니다. 한국 같은 경우는 국가가 거기에 어떻게 개입하는지가 중요한 요인일 텐데 여기서는 말 그대로 돈, 돈, 돈이 되느냐 안 되느냐의 문제입니다. 가령 출판 재벌이 가능했던 어떤 시대에 대해서도 얘기합니다. (웃음) 프랑스의 아셰트 출판사는 1841년 <그리스어-프랑스어 사전>을 펴냈는데 이게 교재로 지정되면서 부의 축적이 가능해집니다.
이전 시대에서는 토지를 통해서만 가능했지만, 19세기 들어오면서 문화 사업을 통해서도 돈을 벌 수 있다는 걸 보여줬죠. 그 외에도 제 직업과 비슷한 부분을 다루고 있어 눈에 확 들어온 에피소드는 서평입니다. 서평을 이용해 상대 출판사나 작가를 제압하고, 막강한 작가의 비위를 맞추며 내 편으로 끌어들이는 등의 산업이 등장한 거죠. 출판사가 서평용 증정본을 언론사에 보내는 관행도 이때 시작됐고요.
김용언 :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들이 택할 수 있는 직업으로 기자를 얘기하는 부분도 재밌어요. 2권 121쪽에 나온 이런 대목을 읽으며 특히 마음이 아팠어요. (웃음)
"거의 똑같은 소설들을 찍어내듯 마구 써대는 글쟁이는 그래도 작가로 여겨졌다. 덧없지만 지적인 기사를 쓰는 기자는 글품팔이였다. 실패한 글을 쓴 작가는 시대를 앞서간 천재라고 우길 수 있지만 실패한 기자는 그냥 실패자였다."
이권우 : 1권 381쪽에 보면 정기 간행물에 서평이 실리기 시작한 건 이미 18세기 중반부터라고 합니다. 작품 홍보를 위해 문예지를 이용해 서평을 싣고 그게 독자적인 권위를 갖게 되고 또 광고에도 쓰이게 되고. 지금의 우리 문예 시장과 너무 비슷해요.
이현우 : 오래된 미래가 다 거기서 시작된 거죠. (웃음)
이권우 : "출간된 모든 책에 대한 서평을, 오로지 서평만을 싣는 잡지" <먼슬리 리뷰>가 1749년 5월에 창간되었어요. 18세기에 시작된 서평 문화를 우린 지금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웃음) 참, 김용언 기자는 영문학과 출신이니까 아실 것 같은데, <아이반호>의 월터 스콧이 그렇게 중요한 작가입니까?
김용언 : 문학사에서 그렇게 중요한 인물은 아니고, 19세기 초반에 가장 인기가 많았던 대중작가에요. 저도 <유럽 문화사>에서 월터 스콧에 대해 이렇게 길게 쓴 걸 보고 좀 놀랐어요.
이권우 : 이 책에서 한 장을 할애해서 쓸 정도면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거잖아요?
이현우 : 문학사와 문학의 사회사가 좀 다르지요. 월터 스콧은 문학성이 뛰어난 작가는 아니지만, 대중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었던 작가였고요. <유럽 문화사>에선 유럽을 건너 러시아에까지 미친 영향도 언급됩니다. 19세기 전반이 낭만주의가 융성한 시기인데, 그때 수없이 나온 역사 소설 중에 월터 스콧의 작품들이 가장 큰 흥행을 기록했죠.
이권우 : <유럽 문화사>가 유럽의 문화사를 관통하는 중요한 시선이 1권 325쪽에 잘 나오는 것 같습니다.
"영국과 프랑스가 패권을 쥔 것은 재능이 골고루 배분되지 않아 다른 나라보다 두 나라가 기적처럼 소설가의 비율이 높아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더 발달하고 짜임새 있게 조직된 두 나라 시장이 수요를 만들어내고 더 많은 작가를 끌어들인 덕분이었다. 1814년 무렵 유럽의 출판 중심지로 자리 잡은 런던에만 서적상이 '600명' 있었다."
철저하게 문화의 하부 구조가 튼실하게 자리 잡고 있어야 문화가 꽃 핀다고 보는 거죠.
이현우 : 수요가 있어야 쏟아져 나오는 작품들 중에 걸작도 나오고 거장도 나오니까요. 예술가라는 자의식을 갖고 있었을 것이라 여겨졌던 정전 작가들이 당대에는 글을 팔아서 먹고 사는 생계형 작가였다는 게 잘 드러납니다. 위고나 알렉상드르 뒤마 같은 베스트셀러 작가들도 마찬가지였고요.
러시아 쪽을 예로 들자면, 알렉산드르 푸시킨이 1820년대부터 활동을 시작하는데 러시아 최초의 전업 작가가 돼요. 딱 1830년대 전후로 해서 독서 시장이 형성되기 때문에, 그 터닝 포인트를 거치며 원고로 먹고사는 게 가능해진 거죠. 보통 근대 문학을 얘기할 때 주로 작품의 근대적 문제의식을 많이들 얘기하는데, 그보다 먼저 파악해야 하는 건 시장 문제라고 이 책은 주장합니다. 그 안에서 작가와 독자가 주고받는 상호 영향이 중요하다는 것도 지적하고요.
이권우 : 귀족 후원자에게 의존하던 중세 시대에서 소비자를 대상으로 창작 활동하는 근대로 넘어오는 과정을 읽다보면, 고독한 창조자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뭔가를 쓰는 풍경을 상상하는데 <유럽 문화사>가 그런 신화를 여지없이 깨뜨려버리죠. (웃음)
▲ 이권우 한양대학교 특임교수. ⓒ프레시안(최형락) |
문화 발달의 메커니즘
김용언 : 저는 아무래도 저자가 영화 쪽을 어떻게 썼을지 궁금했는데요. 책 전체를 통틀어 책 분야가 워낙 도드라지다보니까 영화 쪽은 좀 약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잘 썼더라고요. (웃음) 3권 360쪽에 그 부분이 나오는데요.
"'영화는 조금이라도 현대의 분위기를 접한 이들 대다수가 자신과 어떤 연관성이 있다고 느끼는 현상이다.' 이런 의미에서 영화는 대중 선거, 대중주의 독재, 대량 소비의 세기인 20세기에 어울리는 새로운 '민주적' 매체였다."
이 부분이 근대성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장르, 다른 예술 분야에 비해 굉장히 짧은 시간에 압축적으로 자본주의의 성장 과정을 보여주는 장르였던 영화에 대한 명쾌한 정의인 것 같습니다. 19세기 말에 시작된 영화 초기사에 대해서도 잘 정리되어 있고, 역시나 그 이전 책과 사진, 공연, 음악 등에서 검증받은 공통의 내러티브를 활용하는 트릭도 재미있고요.
도널드 서순의 돈에 대한 일관된 시선도 여전합니다. 일반적으로 뤼미에르 형제가 1895년 <시오타 역에 도착하는 기차>를 상영한 것을 영화의 시작으로 기록하는데, 그때의 혼비백산하고 경탄에 가득한 분위기는 다소 과장이라고 합니다. 이런 설명도 나오죠.
"영화는 통상적인 의미의 문화적인 인공물이 아니었고, 예술 작품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것은 뭔가 이상하고 기발한 것, 서커스 마술사의 속임수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영화와 상영 장소와 관객의 관계 등에서 사회사적 측면을 기술하는 부분, 그에 따라 감독들이 거기에 어떻게 반응하며 미학을 발전시켰는가를 기술하는 부분들이 흥미로워요.
이권우 : 근대의 모든 문화의 태동이,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고자 하는 물질적 욕망이 성장하고 성숙하는 과정에서 고급화되는 거잖아요. 각 문화의 생성과 발전에서 일관되게 공통된 현상이 보이는 거 같아요. 다만 그 메커니즘이 바뀌는 순간, 물질적 욕망에서 그 장르의 세련성과 정신성으로 영역을 확장해나가는 전환점은 분석이 안 됐다는 아쉬움이 있어요.
이현우 : 서순은 아예 문학적인 주제의식을 자신의 입장으로 취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유럽 문화사> 자체의 결함이라기보다 다른 각도에서 문학사를 보여주는 기회라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보통 문학사에서는 정전 작가들만 주로 다루니까, 빠져나가는 작가들이 있잖아요. 상업적으로나 대중성으로 큰 의미를 가졌던 작가와 작품들이요. 그런 작가들에 대한 과소평가를 교정해주는 역할을 <유럽 문화사>가 해주는 것 같아요.
정전 작가들에 대해서도 가차 없죠. 예를 들어 이 책에 나오는 에피소드 중에, 귀스타브 플로베르가 <보바리 부인>의 원고료로 받은 게 800프랑이었어요. 그런데 이 책이 상업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자 바로 다음 작품 때 2만5000프랑을 요구했답니다. 출판사 측에서는 너무 과도하다고 설득하면서 1만 프랑으로 낙착을 봤다고 합니다. (웃음) 수입이 열 몇 배로 뛴 거죠. 그게 창작의 동기가 되어준 셈이고요.
이권우 :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도 도박 빚을 갚으려고 소설을 썼다고들 하지 않나요? (웃음)
이현우 : 도박 말고도 사업 실패, 가족 부양 등 때문에 빚을 많이 졌지요. 도스토예프스키 박물관에 가보면 속기사였던 부인 책상 위에 장부가 있어요. 오늘은 몇 매 썼고 원고료 얼마를 받았다, 그렇게 매일 바로바로 계산한 겁니다. (웃음) 도스토예프스키는 귀족 출신이 아니라서 레프 톨스토이나 이반 투르게네프보다 원고료를 더 적게 받았다고 합니다. 억울한 일이지만 같은 작가라도 원고료 차이가 있었던 거죠.
이권우 : 근대사에서의 창작의 동력은 결국 돈이라는 결론이 나오는 건가요. (웃음)
김용언 : 직업으로서의 작가 개념에 대해 생각나는 또 다른 얘기가 있는데요. <유럽 문화사>에 나오는 건 아니고, 1940년대 미국의 하드보일드 소설가들이 어떻게 하루하루를 먹고 살았는지에 대한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들의 주된 독자층은 백인 남성 육체 노동자들이었는데, 작가 역시 스스로가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쉬지 않고 단어 당 몇 센트를 계산해가며 일을 하는 노동자라는 걸 굉장히 어필해요.
잡지에 소설을 연재할 때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 란에 독자들을 '나의 친구들, 나의 형제들'이라고 호명하면서, '일하지 않으면 굶어죽는다, 우리는 마찬가지 입장이다'라고 강조합니다. 그렇게 작가와 독자 그리고 소설 속 주인공 사이에 동등한 관계가 성립되면서 아주 친밀한 관념의 공동체가 형성됐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삶과 그들의 삶이 비슷했던 것 같아요. 전업 작가가 예술가라기보다는 그야말로 '노동하는 존재'라는 과정이 이런 에피소드에서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고급과 저급의 구분, 가능할까?
이권우 : <유럽 문화사> 해설에도 잘 정리돼 있는데, 이 책은 고급 문화와 저급 문화의 전통적인 구분을 강조하는 대신 '문화 시장의 팽창'이라는 관점을 채택하고 있지요. "사업과 직업으로서의 문화, 일군의 사회적 관계로서의 문화, 시장을 통해 생산되고 소비되는 문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요. 그러니까 근대 문화의 주요 동력으로 물질적 욕망을 강조하는 책인데, 그렇다면 고급하다는 것과 저급하다는 것을 아예 나눌 필요가 없다는 건지 거기 대해서도 좀 얘기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이현우 : 자주 악용되는 구분 방식이고, 사실 좀 불순한 의도가 섞여 있을 때가 많죠. 부르디외 식으로 말하자면 구별 짓기의 횡포와 폭력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용언 : 전 고급과 저급을 분명히 나눌 순 있다고는 봅니다. 이를테면 저보고 지금 당장 벤저민 브리튼의 오페라를 보라고 하면 못 해요. (웃음) 클래식에 훈련이 잘 되어 있어서 무조음악이라든가 브리튼의 오페라 같은, 이전의 모든 음악을 알고 들어야 이해할 수 있는 어떤 단계가 있는데 그 단계들을 뛰어넘고 바로 하라고 하면 무리입니다.
대신 고급과 저급 사이에 분명 여러 층위들이 존재할 겁니다. 1권 26쪽에서 도널드 서순은 이렇게 씁니다.
"'고급' 문화에 참여하는 모든 이를 모은 공동체와 '대중' 문화에 참여하는 모든 이를 모은 공동체 (…) 들은 획일적인 블록이 아니다. 그 경계는 투과성이 있다."
즉, 문화의 발달사 자체를 반복과 혁신, 복제와 번안이라는 구도 하에서 정리했을 때, 고급과 저급 사이에는 원전 격인 어떤 내러티브를 투과하는 과정 사이에서 발생하는 차이점들이 있는 거라 생각해요. 문학이든 오페라든 이전 시대에 확립된 유명한 내러티브를 번안하고 변용하면서 발전해 왔잖아요.
예를 들어 월터 스콧이 예전의 신화들을 어떻게 대중적인 역사 소설 안에 녹여 넣었느냐의 문제인데, 그 사이의 다양한 층위들은 있을지언정 바탕은 동일합니다. 새로운 대중이 그 내러티브를 어떻게 수용하고 반응하고 퍼뜨리는가에 작가 또한 영향을 받고요.
이권우 : 고급과 대중을 나누는 정치학이나 구별 짓기도 위험하지만, 오랜 훈련을 통해서 비로소 익힐 수 있는 것까지 부정한다면 옳지 않다는 거군요.
이현우 : 문화적 교양, 수준 높은 취향아리는 게 타고나는 건 아니잖아요. 경제적 부와 여유, 교육을 통해 가질 수 있는 취향은 고려해야겠지요. 그런데 결과만 놓고 급이 떨어진다, 조야하다라고 말하는 건 폭력적일 수 있습니다.
이권우 : 임마누엘 칸트가 근대적인 철학자의 대표 격인데, 칸트의 미학은 보편적인 미의 존재를 인정하잖아요. 누가 보더라도 좋은 것, 훌륭한 것, 아름다운 것이 있다고 주장하죠. 포스트모더니즘에 오면 그런 미학을 부숴버립니다. 개별적인 특성, 계급성이 끼어들면서 보편적 미학이 부정됩니다. 그리고 <유럽 문화사>에선 시장의 욕망, 자본주의적 욕망이 문화의 발달사를 촉진시켰다는 주장이 나오고요. 이 세 가지 관점을 관통해오면서 문화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종합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거기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현우 : 저는 지젝의 의견에 동의하는 쪽인데, 지젝의 보편성은 차이를 배제하는 보편성이 아닙니다. 이를테면 A와 B가 나뉘어있을 때 보편성은 그들 사이 중간 어딘가에 있는 게 아니라 그 중 한 가지 입장에 대해 편파적이라는 주장입니다.
이권우 : 나머지 한 쪽을 설득하고 동의를 구한다는 건가요?
이현우 : 계급적 한계 때문에 그 간극이 극복되지 않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 차이를 무화시키는 보편성, 즉 '조화롭고 평균적인 보편성'과는 아주 다른 관점에서 얘기해요.
김용언 : 저 역시 <유럽 문화사>를 읽으면서 지금의 문화 시장을 생각했을 때 보편성이라는 단어가 오히려 더 중요해진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를테면 영화는 엄청난 돈이 투자되는 상품입니다. 위험 부담이 크지만, 만드는 이의 기대치와 소비하는 이의 기대치가 맞물렸을 때의 수익이 워낙 거대하기 때문에 그 부담을 기꺼이 짊어지는 분야죠. 그랬을 때 이제 와서는 오히려 18, 19세기처럼 '나'라는 주어로만 버티기에는 힘든 시대 같습니다. 도박이 아닌 다음에야 정말 현명하게, 시대의 주도적인 분위기를 파악하여 조화시키는 방안을 생각해야 하는 거 아닐까, 오히려 보편성을 더 잘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이권우 : 개인적 감수성에서만 기초한 문화는 실패한다는 뜻인가요?
김용언 : 이제 와서는 정말 뛰어난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너무나 균질하고 정보 공유가 보편화되고 있으니까요. 예전 같은 의미에서의 천재가 불가능한 시점에서 거꾸로 보편성에 대해 더 많이 고민해야 할 것 같습니다.
ⓒ프레시안(손문상) |
<유럽 문화사> 이후의 문화는?
이권우 : 루카치는 <소설의 이론>을 마무리 지으면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이 바로 소설의 미래라고 합니다.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영화를 맨 마지막에 위치시키면서 문화의 미래를 보지요. 우리는 <유럽 문화사> 이후 미래를 어디에 두어야 할까요?
김용언 : <유럽 문화사> 5권의 마지막 장 '월드 와이드 웹'은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을 두 가지로 요약하는데요. 영화, 라디오, 텔레비전, 인터넷 같은 무수한 복제 매체들이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유일무이한 것에 대한 대중의 욕구는 오히려 그로 인해 더 커지고 있다고 합니다. 두 번째로 월드 와이드 웹을 통해 문화의 확산에 대한 장애물 다수가 사라짐에 따라 더 균질한 공유가 가능해지고 더 다양한 문화가 가능해졌다는 겁니다.
그 이전에도 새로운 매체가 등장할 때마다 예전 매체들의 저항은 심했어요. <유럽 문화사>에 언급된 얘기 중에는 녹음 기술이 처음 등장했을 때 오페라 가수들이 처음엔 무척 싫어하다가, 이게 자신에게 더 많은 수입을 안겨주고 그 녹음을 들은 대중들이 진짜 가수를 보기 위해 더 많이 공연장을 찾는다는 걸 깨닫는 에피소드가 나옵니다.
새로운 매체를 통해 예전의 문화가 더 확산되고 세련되어진다는 과정은 되풀이되는 것 같고요. 그렇기 때문에 19세기에 시작된 문화의 패턴이 지금도 여전히 진행형이며, 미래 역시 우리가 상상하는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는 아니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현우 : 이 자리에서 계속 얘기되었지만, 19세기는 우리의 동시대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때 만들어진 문화 생산과 소비의 메커니즘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죠. 레퍼토리만 조금씩 바뀌면서요. 다만 한편으로, 우리가 그 유럽식 보편성을 너무 자연스럽게, 아무런 장애 없이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즐길 수 있게 된 것에 대해선 조금 거리낌이 있어요.
문화의 새로운 미래가 뭘까 라고 질문하셨는데, 유럽으로 대표되는 세계적인 흐름이 월드 와이드 웹이라는 마지막 장으로 정리된다면, 그것과 다르게 전개된 문화사, 지워지거나 억압된 문화사가 있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이권우 : 사회 구성체 이론에 따르게 되면 한 시대에는 과거의 것도 남아 있지만 미래적 가치도 싹트고 있다고 합니다. 안철수 후보가 인용한 작가 윌리엄 깁슨의 말처럼, 미래는 이미 와있지만 아직 널리 퍼지지 않았을 뿐이죠. 우리 역시 <유럽 문화사>를 읽고 난 다음, 근대 이후 체제를 예견할 수 있는 새로운 문화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도널드 서순의 정리를 넘어서는 새로운 고민을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현우 선생 말처럼 또 다른 타자로서의 문화에서 구할 수도 있겠고 우리 사회 속에서 생성되고 있는 정치적 의지를 담보한 문화 운동에서도 찾을 수 있겠지요. 두 분 모두 오랜 시간 좌담에 참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달에 뵙겠습니다.
책 속으로… 어떤 작가들에게는 '산업 문학'이 부자가 되고 유명해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발자크는 '산업 문학'을 즐겼다. "베롱은 <콩스티튀시오넬>을 사들여 연간 구독료를 48프랑으로 낮추었고, 10만 프랑을 주고 산 <방랑하는 유대인>으로 <시에클>의 독자 4만5000명을 훔쳐오려 한다. (…) 돈싸움이다. 나는 자유로우며, 이 상황을 잘 활용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2권 42쪽) 몇몇 여성 작가들은 공개적인 비평에 노출되는 위험을 지나치게 의식했다-어떤 중간 계급이나 귀족 숙녀도 이런 경험에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소피 코탱은 <말비나>(1800년)의 등장인물인 영국 작가 '미스트리스' 클레어의 입을 빌려 이렇게 한탄했다. (제2판에서는 이 부분을 삭제했다) "사실 여자가 소설을 익명으로 쓰는 한은 별로 문제될 게 없어요. 사람들이 못마땅해 하는 것은 직업 자체가 아니라 그 쓰임이에요. 여자가 짧은 이야기를 지어 그것으로 친구들을 즐겁게 해주면 아무도 상관하지 않지만, 그 이야기를 출간하게 되면 그녀는 스스로 그 이야기를 높이 평가한다고 인정하는 셈이지요. 그러니까 친구들이라면 너그럽게 봐주었을 그 작품을 평론가들은 가혹하게 평가할 수 있어요. 자기가 쓴 책을 더 많은 이들에게 제공함으로써 작가는 자기 자신도 제공하는 셈이에요. 만약 그녀가 여자의 나약함에 관해 쓰면 사람들은 그 나약함을 그녀 자신의 나약함으로 여기고, 그녀가 여자의 덕에 관해 쓰면 오만하다는 비난을 들어요. 그리고 그녀가 이야기하는 열망은 항상 그녀 마음속의 열망이라 여겨지고, 그녀가 묘사하는 상황은 자신이 직접 겪은 상황이라고들 짐작하지요. 여자는 작가로 일하면서 엄청난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고, 따라서 그것을 감당할 용기가 필요하답니다." (2권 284쪽) '문화의 주변부' 나라 출신으로 민족의식을 지닌 지식인 엘리트들은 묘한 양면가치에 시달렸다. (…) 많은 작가들에게, 외국에서 인정받는 다는 것은 국내에서 명사 대접을 받기 위한 필수조건이었다. 그러나 외국에서 유명해지려면 외국인들에게 그들이 바라는 것을 주어야 했고, 반향이 더 큰 주제들을 다루어야 했다. 다시 말해, 국민성을 지나치게 드러내지 않아야 했다. 그런 까닭에, 과거에서 빌려온 비슷한 주제와 비슷한 등장인물을 쓰고, 다른 시대 다른 나라의 다른 작가에게서 자양분과 아이디어를 얻으면서, 하나의 세계 문학(주로 유럽 문학)이 계속 발전해갔다. 이런 딜레마는 20세기 말에는 아프리카 작가들, 그리고 정도는 덜하지만 아시아 작가들도 겪게 되고, 그들 가운데 일부는 만약 자신이 지역어가 아닌 영어(또는 프랑스어)로 글을 썼다면 더 넓은 독자층과 더 큰 명성을 얻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3권 91쪽) 품위 있는 부르주아 문화에 적대감을 품었던 아방가르드들은, 악당이 끝내 벌을 받지 않으며 다른 범죄 소설과는 달리 부르주아적 질서가 재확립되지 않는 팡토마스 소설 같은 '쓰레기' 대중 소설에 끌렸다. 아방가르드는 대중의 취향을 얕보는 대신 칭찬하지 말아야 할 것을 칭찬하여 부르주아지를 도발하려 했다(계급으로서의 부르주아지는 지적인 도발에 쉽게 저항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리 달라진 게 없었다. 아방가르드는 스스로 믿는 것만큼 혁명적이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취향의 결정자라는 지식인의전통적 역할을 새로 다시 내세웠을 뿐이었다. 그들이 팡토마스가 좋다고 결정하면 팡토마스는 좋은 것이었다. (3권 156쪽) 청교도적인 주장은 문화 소비에는 목적이 있어야 하고, 그 목적은 자기 계발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주장하는 이 가운데 다수는 셰익스피어, 단테, 괴테를 다량으로 빨아들이는 것은 현실 도피로 보지 않았다. 물론 우리가 그런 작가들의 작품을 읽는 이유가 애거서 크리스티를 읽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더 우리를 '계발'할 수 있기 때문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3권 422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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