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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공위 끝났어요? 그럼 집에 갑시다!"

[해방일기] 1947년 9월 24일

1947년 9월 24일

조선 문제가 의제로 상정되었으면 유엔 총회에서 마땅히 조선인의 발언을 청해야 할 것이다. 회원으로 가입되어 있지 않으니 옵서버 자격이 될 텐데, 과연 조선인 중 누구를 초청할 것인가? 그것을 누가 결정할 것인가?

미국 상임대표 오스틴이 리 사무총장에게 보낸 편지가 9월 28일 공개되었다. 이 편지 중에 조선인 대표에 관한 언급이 있다.

"미국 정부는 미국 내 각계의 조선인 개인들이 시시로 조선 문제에 관한 성명서를 발표하고 이를 UN에 전달한 사실에 착목하게 되었다. 이러한 성명은 어느 경우에는 이들이 미국 정부의 승인을 받은 조선의 공식 기관에서 모 정식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또는 이를 대표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그러므로 남조선 미군정 하에서 조선인을 정식으로 대표하여 발언할 권한을 가진 조선인 대표자는 첫째는 민정장관이며 둘째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밖에 없다는 것을 UN 총회 각국 대표들에 통고하여 주기를 요청하는 바이다. 미국에 관한 한 UN에 제기된 여하한 문제에 관하여서는 조선인 개인적 의사 표시에는 이의가 없으나 이들은 여하한 의미에서라도 미국 정책의 승인을 받은 공식 기관의 대표가 아님을 오해하지 않도록 명백히 하여 둘 필요를 느끼는 바이다." (<조선일보 1947년 9월 29일 [레이크썩세스28일 중앙사발 공립])

조선인의 해외 여행은 몹시 어려운 상황이었다. 미국에 거주하는 조선인 외에는 미국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재미 조선인 중에는 이승만의 추종자도 있고 반대자도 있었다. 그런데 이승만은 추종자들에게 돈을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추종자들은 이승만을 위해 뛰면 보상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있었다. 실제로 임병직은 분단 건국 후 주미 대사가 되었고 임영신은 상공부 장관이 되었다. 반면 반대자들은 마음으로는 반대해도 반대 운동을 하러 뛰어다닐 힘과 돈이 없었다. 조선사정소개협회 간판을 내건 김용중 정도가 이승만 비판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승만과 그의 미국인 지지자들은 미국 극우 언론을 통한 선전 활동에 공을 들였다. 덕분에 이승만이 1947년 4월 귀국한 후에도 임병직과 임영신은 극우 언론의 우대를 계속 받으면서 선전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김용중 외에는 다른 조선인의 발언 기회가 없는 곳에서 그들은 마치 자기네가 조선인의 대표라도 되는 양 떠들어대고 있었다. 실제로는 민주의원을 포함한 몇 개 극우 단체로부터만 대표 자격을 받고 있으면서.

이들에게 대표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오스틴 미국 대표가 사무총장에게 굳이 편지로 알린 것은 이들이 내는 잡음이 지나쳤기 때문일 것이다. 10월 24일 임영신의 성명 같은 것이 지나친 잡음으로 포착되었을 것 같다.

[뉴욕 24일발 AP 합동] 당지에 체재 중인 임영신은 과반 UN 총회에서 소련 외상 대리 비신스키가 행한 연설에 관하여 여좌히 평하였다.

"(1) 국제 사상 유명한 히틀러의 연설을 제외하고는 진지한 외교 연설에 있어서 비신스키의 연설보다도 모순된 연설은 볼 수 없었다.
(2) 비신스키 씨는 비적국으로부터 외국군이 철퇴하기를 강력히 주장하였는데 아마 이것은 중국 급 기타 지구의 주둔 미군을 지적한 것 같으나 그 반면 북조선 주둔 소련군에 대하여는 언급한 것 같지는 않다.
(3) 비신스키 씨는 또 말하기를 비적국 주둔군의 철퇴야말로 각국 간의 상호 신임을 앙양하고 또 세계 평화 수립을 촉진하리라고 하였는데 그러면 무엇 때문에 북조선의 소련군을 시켜서 모범을 표시치 않는가?
(4) 일본의 압제로부터 소위 해방된 지 2년이 경과한 조선의 현 사태는 조선 역사상 일찍이 보지 못한 정도로 악화되고 있는데 이러한 사태는 마샬 미 국무장관이 조선 문제 UN 제소 노력을 정당화한 것이다.
(5) 여하간 세계 공론의 힘과 아울러 당지 UN 총회 각 대표의 이성적 결정만이 아세아 평정화에 기여할 수 있는 자유 민주 조선을 건설할 수 있게 할 것이다." (<조선일보> 1947년 9월 25일)

스탈린의 억압 통치가 히틀러의 전체주의에 버금가는 것으로 오늘날에는 일반적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1947년 당시에는 스탈린 체제의 문제점이 이만큼 밝혀져 있지 않았다. 문제가 있더라도 전시 상황 때문에 부득이한 것으로 대개 이해되고 있었다. 그런데 함께 히틀러를 물리친 연합국 원수를 히틀러에 비교한 것은 당시로서 엄청난 모욕이고 도발적 태도였다. 이 한 줄 때문에라도 임영신의 발언에 아무런 공식적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미국 대표가 서둘러 밝힐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더 실제적인 문제가 임영신 발언의 (2), (3)항에 있었다. 당시 소련은 패전국 외의 지역에서는 종전 당시 진주했던 연합군이 조속한 시일 내에 철수할 것을 제창하고 있었다. 소련은 전쟁 중의 병력을 산업과 재건 분야로 돌릴 필요가 절박했고, 국외 주둔을 위한 비용 조달도 힘들었다. 그에 비해 미국은 감군 계획도 급박하지 않았고, 재력도 넉넉했다. 미군이 주둔군을 통해 영향력을 늘리는 것을 막기 위해 소련은 자기네 군대를 포함한 연합군의 조기 철군을 제창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에서의 철군에 관해서는 소련이 그때까지 아무런 얘기가 없었기 때문에 임영신은 이 점을 들어 소련을 조롱한 것이다. 그런데 미국 측에서는 소련이 조선에서의 철군 문제도 불원간 제기할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

당지에 체류 중인 모 남조선 미군정 고위 측근자는 조선 문제에 관하여 여좌히 말하였다.

"(1) 소련은 불원하여 북조선 주둔 소련군의 철퇴를 명령하고 동시에 남조선 미군의 동일한 조치를 취하기를 요구할 가능성이 있다.
(2) 여사한 조치가 있은 후에는 조선에 잔류하여 좌익계 조선인과 더불어 협력하는 소련 민간인에 의한 맹렬한 공산주의 운동이 전개될 것이다.
(3) 그들의 목적은 작년에 만주의 봉천(奉天) 및 장춘(長春)으로부터 돌연 제2우크라이나군을 철퇴한 바와 같은 양식에 의하여 전 조선을 소련 세력 하에 몰아넣으려는 것이다." (<조선일보> 1947년 9월 26일)


(3)항에서 말한 만주의 소련군 철수 방식이란, 공식적으로는 국민당 정부군에게 인계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공산군에게 일본군 장비를 넘겨주고 진퇴에 타이밍을 맞춰주는 등 도움을 주며 철수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덕분에 공산군은 만주 지역에 강력한 거점을 마련할 수 있었다.

(1), (2)항을 보면 미국 측이 조속한 동시 철군을 자기네에게 불리한 조치로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에 잔류하여 좌익계 조선인과 더불어 협력하는 소련 민간인"의 책동을 걱정한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의 본질은 그것이 아니다.

조선뿐 아니라 식민지에서 독립하는 거의 모든 나라 민중이 자본주의보다 사회주의를 선호하고 있었다. 경제 조건이 열악해서 자유 경쟁을 허용할 여유가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식민지 시대의 저항 운동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상당한 지도력과 성망을 갖고 있었다. 조선도 그런 나라의 하나였다.

남조선의 미군이 일본의 억압 통치를 물려받으려 한 반면 북조선의 소련군이 조선인의 자율성을 적극 허용-지원한 차이도 이런 조건에서 나온 것이었다. 조선인이 스스로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놓아둘 경우 미국식 자본주의보다는 소련이 원하는 방향에 접근할 것이라는 자신감을 소련군은 갖고 있었던 것이다.

점령 후 2년이 지난 시점에서 소련군은 자기네가 철수하더라도 지금까지 북조선을 이끌어 온 방향이 조선인의 손으로 지켜질 것을 믿을 수 있었다. 반면 미국 측은 미군이 조선을 떠나고 직접 통제가 사라질 경우 조선이 자기네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여갈 것을 기대할 수 없었다. 미국 입장을 앞장서서 거들어준 집단이 통째로 민중에게 반민족 처단을 받게 되기가 십상이었으니까.

소련의 조기 철군 제안은 9월 26일 미소공위에서 스티코프 수석 대표의 성명을 통해 나왔다. 앞부분에서 "반탁이란 구실로써 진출하는 적은 집단의 반동 분자들의 활동에 호의적 태도를 취하는 미국 대표는 미-소 정부 자체로 채택된 조선에 관한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 실천을 지원치 않은 이유는 소련 대표에게 명백지 않다"고 반탁 운동에 대한 미국 측의 모순된 입장을 비난한 이 성명서는 조기 철군 제안으로 맺어져 있다.

"(…)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의 정확한 실제에 근거하여 통일적 조선 민주주의 정부 수립을 촉진하기 위하여 소련 대표는 모든 성의를 발휘하였다. 그러나 미국 대표가 입각한 입장이 지금까지 이 정부 수립을 방해하고 있다. 소련 대표는 조선 지역에 미군 및 소련군이 주재하고 있는 한 조선 인민에게는 후견이 없어도 무방하다는 것은 조선 인민을 기만하는 것이라고 인정한다. 조선은 인민이 지지하는 민주주의 정부를 가지게 되는 그때에 또는 조선 지역에서 미군 및 소련 군대가 철퇴하는 그 때에만 자주적 독립 국가로 될 것이다.

소련은 약소 민족에게 한하여 존경의 태도를 취하여 왔으며 또는 취하고 있으며 그리고 그들의 독립과 자립을 위하여 투쟁하였으며 또한 투쟁할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에서 미군 및 소련군이 철퇴하는 조건하에 다만 연합국의 원조와 참가가 없이 조선 인민 자체가 정부를 수립하도록 그들에게 가능을 부여할 수 있다고 소련대표는 인정한다.

1947년 초에 만일 미 측 대표가 전 외군 철퇴에 동의한다면 소련군은 미군과 동시에 조선에서 철퇴할 수 있다는 것을 소 측 대표는 성명한다. 소련 대표에게는 다른 제의가 없다. 그는 조선의 민주주의 독립 국가로서 부흥 및 제 방책에 대한 자기 견해를 공위업무 행정에서 충분히 진술하였다. 소련 대표는 회답과 美측대표의 제의를 기대한다." (<동아일보> 1947년 9월 28일)


소련은 모스크바 협정에 따른 미국과의 협력 관계를 유지하려고 끝까지 노력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미국이 미소공위를 외면하고 조선 문제를 유엔 총회로 가져간다면, 어차피 협력 관계를 포기할 바에야 미국 쪽에 더 많은 이득을 주는 '점령' 상태를 유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에게 제안한다. "우리가 일본군 무장 해제를 하려고 조선에 들어온 길에 임시 정부를 함께 세워주겠다고 지금까지 머물러 있었던 거 아뇨? 그런데 미소공위가 필요 없게 되었다고 당신들이 주장하니, 그렇다면 우리 모두 집에 갑시다." 군대 주둔 없이는 조선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칠 길이 없던 미국의 약점을 찌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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