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9월 19일
10월 24일 '유엔데이'를 국경일로 지내던 시절이 있었다. 1945년 51개국의 헌장 채택으로 유엔이 성립된 날짜를 국경일로 모신 나라는 대한민국밖에 없다고 들었다. 확인해 보지는 않았다.
유엔군이 우리를 공산 침략으로부터 지켜줬다고 해서 유엔을 하늘처럼 받드는 것으로 그때는 알았다. 그런데 이제 해방 공간을 들여다보니 대한민국의 건국에도 유엔이 결정적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당시 유엔이 어떤 성격의 기구였고, 대한민국 건국에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 한 차례 살펴본다.
근대 세계에서 국제 관계는 개별적 조약을 통해 운영되었다. 그런데 산업화에 따라 국가 간 접촉이 많아짐에 따라 조약 기구의 대형화, 상설화가 필요하게 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후의 이른바 '비엔나 체제'도 그런 필요에 부응한 움직임의 하나로 볼 수 있다. 현상 유지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반동 체제'란 비판도 받지만, 전쟁의 위험을 줄이고 국제 협력을 증진한다는 목적은 분명히 시대의 흐름에 맞는 것이었다.
19세기가 지나가는 동안 전쟁의 양상은 갈수록 참혹해졌다. 1864년의 제1차 제네바 협약 이후 전쟁을 억제하려는 국제적 노력이 다각적으로 이어졌지만 제국주의 경쟁의 격화 앞에서 충분한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그 결과가 산업화 국가들 사이의 전면전인 제1차 세계 대전이었고, 그 참상은 종래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전사자 850만 명, 부상자 2100만 명에 민간인 사망자가 1000만 명을 넘었다고 한다.
그 충격으로 인해 전 세계적 상설 국제기구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이 설립되었다. 미국 대통령 윌슨이 국제연맹 창설을 주도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윌슨은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1918년 1월부터 국제연맹 설립을 공식적으로 제창하기 시작했고, 이듬해 6월 44개국의 승인으로 국제연맹이 탄생하기까지 그의 공헌은 누구보다 큰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 상원의 인준 거부로 미국이 국제연맹에 가입하지 못한 사실은 아는 사람이 적다.
미국의 가입 거부가 국제연맹의 역할에 큰 제약을 가한 사실은 1932~33년 일본의 중국 침략에 대한 국제연맹의 제재를 불가능하게 만든 데서 단적으로 드러났다. 1931년 9월의 만주 사변과 1932년 1월의 상해 사변 등 일본의 침략 행위를 밝힌 리튼 보고서를 근거로 국제연맹이 일본을 제재하려 할 때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경제 제재였다. 그러나 미국이 국제연맹의 통제 밖에 있었기 때문에 이 수단이 실효를 가질 수 없었다. 리튼 보고서가 국제연맹 총회에서 42대 1로 채택되자(반대표는 일본 자신) 일본은 연맹을 탈퇴했다.
국제연맹의 무력함은 1935년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아비시니아) 침공 때 더욱 극명하게 드러났다. 대부분 회원들이 적절한 조치를 회피한 것은 이탈리아군의 공격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이후 1936년의 스페인 내전, 1937년 일본의 전면적 중국 침략 때도 국제연맹은 아무런 효과적 조치도 취하지 못하다가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존재가 사라지고 말았다.
1935~36년의 이탈리아 제재 노력에서 국제연맹 회원도 아닌 미국이 뜻밖에 주도적 역할을 맡은 것이 눈에 띈다. 루스벨트 대통령(1933~1945년 재임)이 윌슨의 뒤를 잇는 국제주의자였기 때문이다. 루스벨트는 유엔 창설을 주도하는 데도 윌슨의 뒤를 이었고, 이번에는 의회의 반대도 없었다. 유엔 창설을 의논하기 위한 회담이 1945년 4~6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렸고, 본부가 뉴욕시 가까운 롱아일랜드의 레이크석세스에 마련되었다. 1946년 1월 첫 총회가 런던에서 열린 외에는 1952년 맨해튼의 본부 건물이 완성될 때까지 매년 레이크석세스에서 총회가 열렸다. 비용 분담에서도 미국의 몫이 압도적이었다.
유엔 창설을 미국이 이끌었지만, 실제로 만들어진 유엔은 루스벨트가 생각한 것과 꽤 다른 모습이 되었다. 원래 루스벨트가 생각한 "United Nations"는 "연합국"의 의미가 겹쳐진 것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패전국들은 앞으로 다시 군사력을 가지지 못할 것이고 세계 질서를 논하는 자리에 끼일 자격도 없을 것으로 루스벨트는 생각했다. 전쟁 시의 연합국들이 전쟁 후에도 협력을 통해 세계 질서를 운영해 가리라는 전망 위에 그 협력 기구로 유엔을 만들고자 한 것이었다.
냉전이 그 전망을 바꿔놓았다. 유엔 창립 당시 제외되었던 추축국 중 이탈리아는 1955년에, 일본은 1956년에 가입했다. 동서 분할 때문에 가입이 늦어졌던 동독-서독도 1973년에 가입했다. 지금 독일과 일본은 안보리 상임이사국까지 넘보고 있다. 2011년도 유엔 예산 분담금에서 22퍼센트의 미국에 이어 12.5퍼센트의 일본과 8퍼센트의 독일이 2, 3위 자리를 맡고 있다.
과거 추축국의 역할 성장은 훗날의 일이고, 창립 단계에서부터 유엔은 미국의 반공-반소 정책에 영향을 받았다. 유럽의 기존 강대국들이 모두 전화로 피폐한 상황에서 막강한 재력과 무력을 가진 미국의 입김이 유엔의 진로를 결정했다. 미국이 이끄는 방향에 대한 반발로는 프랑스의 드골이 유엔을 "그 물건(le machin)"이라 비하하며 세계 질서 유지를 위해 개별적 조약보다 유엔이 쓸모가 없을 것이라고 비판한 정도가 눈에 띄는데, 그가 이끌어 온 프랑스민족해방위원회(CFLN)의 연합국 승인에 대한 루스벨트의 비협조 때문에 유엔 설립에 관한 초기 논의에서 프랑스가 배제된 데 대한 불만으로 이해된다.
임기 5년의 사무총장을 한 차례 중임, 10년씩 근무하는 것이 제2대 하마슐트 총장 이래 유엔의 관행이었는데, 제6대 부트로스-갈리 총장만이 단임으로(1992~1996년) 끝났다. 미국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를 이은 코피 아난 총장도 비슷한 문제로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고 한다. 미국의 위상이 압도적이던 시대가 지나갔기 때문에 일어난 갈등이었다.
조선 문제가 유엔에서 다뤄지는 과정을 이제부터 살펴보며 미국의 의지가 당시 유엔에서 어떻게 관철되고 있었는지 알아보게 될 것이다. 미국 정치가들은 아무리 말도 안 되는 제안이라도 자기네 제안이 유엔에서 채택되게 할 자신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소련은 조선 문제의 유엔 상정을 극력 반대했던 것이다.
당시 유엔 회원국의 분포가 어떠했는지 궁금한 생각이 들어 출범 당시 51개국의 명단을 훑어보았다. 한 가지 놀란 것이 아메리카-오스트레일리아 신대륙 국가가 24개로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는 점이었다. 모두 미국 편이 확실하다. 아시아-아프리카의 12개국은 미국의 원조가 절실한 가난한 나라들이다. 유럽의 10여 개국 중에도 소련에 확실히 동조할 나라는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우크라이나, 벨로루시의 4개밖에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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