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는 일본의 경제가 한창 고도성장을 기록하고 있던 시절이기도 했다. 좋은 시절은 늘 그렇듯, 좋은 대학을 나온 엘리트 청년의 앞길은 어떤 경로를 택하더라도 탄탄대로였다. 젊고 야심있는 인재를 필요로 하는 세상은 대학생들이 졸업도 하기 전에 입사 원서를 받아주었고, 그래서 진짜로 학문에 열의가 있는 사람들만이 대학원에 갔다. 청년 와타나베 쇼이치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독립된 지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했던 모양이다. 영문학자였던 그는 철학자 데이비드 흄, 소설가 월터 스콧, 에세이스트이자 사상가였던 필립 해머튼 등의 삶을 성찰했다. 자꾸 반복해서 이야기하지만 당시는 좋은 시절이었다. 경제는 성장 일로에 있었지만, '경제 동물'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듣던 일본인들은 그 돈을 어떻게 써야 할지 제대로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고민 끝에 깨달음을 얻은 젊은 영문학자 와타나베 쇼이치는, 1976년 대중들을 향해 외친다.
"돈을 벌어서 책을 사라. 돈을 모아서 더 이상 월급쟁이 생활을 할 필요가 없는, 하루 24시간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삶을 이룩하라. 그것이 지적 생활의 방법이다."
<知的生活の方法>(講談社 펴냄, 1976년)은 그렇게 탄생한 책이고, 출간 이후 지금까지 스테디셀러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책은 외환 위기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았던 1998년, <지적 생활의 방법>이라는 제목으로 한국 출판계에 소개되었다. 하지만 당시는 출판 시장이 완전히 죽어가던 때도 아니었고(다들 입버릇처럼 "단군 이후 최고의 불황"이라고 말은 많았지만), 워낙 내용이 좋은 책이다 보니 국내에서도 꾸준히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나 또한 이미 이전 판본으로, 대학교에 다니던 시절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기억이 있다.
▲ <지적 생활의 발견>(와타나베 쇼이치 지음, 김욱 옮김, 위즈덤하우스 펴냄) ⓒ위즈덤하우스 |
첫째, 1998년보다 요즘의 출판 시장이 훨씬 안 좋다. 책의 내용이 워낙 쉽고 잘 넘어가서, 5500원이던 구판을 나는 굳이 구입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13800원으로 돌아온 신판을 사람들이 사서 볼 이유도 별로 없지 않을까? 게다가 이미 좁은 출판 시장 속에서 볼 사람은 다 본 그런 책 아닌가?
둘째, 외환 위기 직후였다고는 하지만 어쨌건 1998년에 <지적 생활의 방법>은 한국 사회에서도 그렇게까지 생뚱맞은 소리는 아니었다. 1997년까지 이어지던 고도성장의 관성이 아직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돈을 벌어 책을 사고, 책을 꽂기 위해 집을 사라'로 요약되는 '지적 생활의 방법'을 구현하기 위한 꿈을 꿀 수 있는 사람들이 그나마 없지는 않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2011년 그리고 2012년 현재의 상황은 그보다 훨씬 어둡다.
셋째, '지적 생활'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회 내에서 일종의 희극이 되어버렸다. "인문학과 기술을 결합"한다는 스티브 잡스의 발언 등이 화제가 되면서, '인문학'이나 '철학', '지적 생활' 같은 단어들은 본래의 아우라를 잃고 아무 시골 장터나 돌아다니며 노래하고 푼돈 받는 3류 가수 신세가 된 지 오래다. 모두가 인문학의 중요성을 이야기하지만, 그 '인문학'은 구글 플레이 북 앱을 깔아서 전자책을 두어 쪽 넘겨보다가 카톡 메시지에 응답하는 것을 뜻할 뿐, 이사할 때 짐만 되는 종이책을 사다가 평당 천만 원짜리 아파트의 귀한 공간을 잡아먹는다는 뜻이 결코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인터넷 서점의 판매 지수와 리뷰 등을 통해 검토해볼 때, <지적 생활의 발견>은 잘 팔리고 있다. 인터넷 서평가로 유명한 '로쟈'는 <매경이코노미>에 보낸 서평에서 "그렇다면 이 책은 분수에 맞지 않게 지적 생활을 꿈꾼 이들이 마음을 접는 용도로도 활용할 수 있을 듯싶다"고 살짝 비꼬았지만, 정작 독자들의 반응은 긍정적이다.
이것은 얼핏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쉽지 않은 일이다. 집을 가진 사람들은 집값이 떨어진다고 한숨을 쉬고, 그 집에 세들어사는 사람들은 날로 치솟는 전세값에서 공포를 느낀다. 젊은이들은 한달 내내 아르바이트를 해도 자기 몸 하나 누일 방 한 칸을 마련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2년 현재 이런 내용이 담긴 책을 사서 읽으며 '지적 생활'의 꿈을 키우는 독자들이 남아있는 것이다.
'나만의 도서관'을 갖는다는 것은 지적 생활의 향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경제적인 형편이 여의치 않아 별도의 작업 공간을 임대하지는 못하더라도 방 한 칸, 혹은 집 한구석에 그런 지적 공간을 만들 수는 있다. 이는 조금만 노력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대출을 받아 아무리 좋은 집을 얻었더라도 나를 위한 서재는커녕 전용으로 쓸 수 있는 책상 하나 둘 수 없는 집이라면 너무나도 비참하지 않겠는가. (65쪽)
나는 이 기현상을 곱씹으면서, '멘토'와 '힐링'에 목을 매달고 있는 한국의 출판계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모든 멘토들이 입만 열면 인문학 타령이지만, 그 어떤 멘토도 쇼와 시대를 살아가던 와타나베 쇼이치처럼 이렇게 담담한 어조로 '현실'을 이야기해주지는 않는다. 잘 될거야, 기운 내, 아자아자, 책 많이 읽고 똑똑해져야지, 같은 공허한 도닥거림만이 허공을 맴돌 때, 1930년에 태어난 일본의 노학자는 한결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지적으로 살려면 책을 사. 네가 물건으로서 소유하는 책을 몇 번이고 읽어서 정말 네 것으로 만들어. 그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어. 돈? 돈이야 들지. 하지만 그것 말고는 지적 생활을 하는 방법이 존재하지 않아."
'좋은 시절'에 쓰인 이 책을 지금과 같은 '나쁜 시대'에도 꾸준히 독자들에게 읽히게 하는 본질적인 힘의 근원은 바로 이러한 현실주의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책을 통해, 책과 함께 성장하기 위해서는 책을 '소유'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그런데 책을 소유한다는 것은 그 책을 꽂아놓을 수 있는 공간과, 반복되는 이삿짐 싸기에 지쳐버린 나머지 힘겹게 모은 책들을 다 버려버리지 않을 수 있는 정신적인 여유를 함께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모든 것들은 책보다 훨씬 비싸다. 이것은 비단 한국에서만의 일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한국보다 주거 공간을 좁게 쓰는 일본에서 "방 한 칸, 집 한 구석"을 책에 할애한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것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적 생활을 하고 싶다면 다른 방법이 없다.
그 현실에서 눈을 돌리지 않은 채 '실용서'적인 조언, 가령 '애초부터 저혈압 체질인 사람은 억지로 아침형 인간이 되려 하지 마라'거나, '위장이 편안해질 수 있는 식단을 선택하라', 심지어 '일본의 여름은 무더우니 여름에도 지적 생활을 하고 싶다면 반드시 에어컨을 사라'와 같은 구체적인 이야기를 함으로써, <지적 생활의 발견>은 여타의 '인문학 멘토'들의 그것과는 다른 맥락을 형성하게 된다.
현실을 이겨내기 위해 거창하고 웅장한, 혹은 너무도 외롭고 치열하고 비장한 '학문의 세계'를 논하는 게 아니라, 지식과 삶이 맞닿을 수 있는 그 비좁은 지점을 찾아보고자 함께 고민하고 연구하는 책이 되는 것이다. 물론 이 책은, 반복해서 말하지만 '좋은 시대'의 산물이고, 그때 겪어야 했던 문제들은 지금과 전혀 같지 않다. 하지만 이 책이 '가르치는' 책이 아니라 '함께하는' 책이라는 사실에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지적 생활의 발견>의 배경이 되는 1976년 고도성장기의 일본을 부럽다고만 하지 말고, 망해가는 출판 시장 앞에서 눈물만 흘리지 말고, 바로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가진 것들을 통해 최대한 '지적 생활'을 누릴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그런 책의 필요성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일본은 그때나 지금이나 출판 왕국이고, 모든 정보가 필터링되어 결국에는 책으로 나온다. 하지만 한국은 다르다. 가뜩이나 얄팍한 지적 문화가 인터넷으로 인해 더욱 형해화되어가는 형국인 것이다.
또한 지적 생활을 시작해야 할 젊은이들의 구매력은 더욱 형편없는 수준으로 추락하고 있고, 그 윗세대들은 이 집 팔고 저 집 사고 평수 늘리고 줄이고 빚 갚는 계산하느라 정신이 없다. 이런 상황 속에서, 지금 여기의 '지적 생활의 방법'은 뭐가 있을까? 그런 고민이 들 때마다 나는 이 책을 들춰보곤 한다.
어떤 해답이 있어서가 아니라, 내가 속하지 않은 시공간의 느긋한 자장 속에서 약간의 위안을 얻기 위해서이다. 바로 그런 목적에서라도 이 책은 서가에 꽂혀 있을 만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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