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 도입부에서 저 문장을 만났을 때, 그것을 일종의 비유라 생각했다. 신화와 상징이 삶을 이끌던 유토피아적 세계에 대한 미화된 회상이겠거니 싶었다. 그로부터 15년쯤 후, 명리학을 공부하면서야 저 문장이 멋진 수사법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는 엄혹한 진실이라는 점을 비로소 알아차렸다.
개인적인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자면 30대 후반쯤 명리학을 공부했다. 성인이 되어 스스로 삶을 운용하면서부터 나는 계속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다. 그것은 학교에서 배운 학문에는 없었고, 그 후 닥치는 대로 읽은 책에도 없었다. 사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 채, 다만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다. 그러다가 천지인(天地人 : 명리학, 풍수학, 동양 의학)과 관련된 전통 학문을 만나면서야 비로소 내가 찾던 것의 실체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생의 의미를 이해하고 생의 비의를 터득하여 삶의 달인이 되는 방법이었다. 내가 생에 대해 궁금해했던 것들, 생의 문제 앞에서 답답해했던 사안들, 원인도 이유도 없이 다가오는 사건들에 대한 해답과 해법이 저 학문들 안에 있었다. 그것은 인간과 우주의 본질을 설명하는 학문, 인간과 우주가 조응하는 가운데 작동하는 음양과 오행에 대한 이야기였다. 몸과 마음, 시간과 공간, 자기와 타인을 돌보는 학문이었고, 서구 문명의 유입과 함께 미신이나 신비 영역으로 물러난 오해의 학문이었다.
'프레시안 books'로부터 "고미숙 선생님이 쓴 명리학 서적"에 대한 서평 청탁을 받았을 때 내가 지나치게 반색했다는 사실을 통화를 끝낸 후에야 알아차렸다. 즉각적인 반응이 나올 정도로 그 책이 반가웠고, 내용이 궁금했다. 서양 학문의 세례를 받은 인문학자가 명리학 서적을 집필했다는 사실도 흥미로웠지만 그 이가 고미숙이라는 사실에도 호기심이 당겼다. 개인적으로 그를 알지는 못하지만 그의 지식 공동체 활동과 그의 글에 대해서는 계속 들어오고 있었다. 스스로를 "강원도 광산촌에서 자랐다"고 소개하는 이 동갑내기 여성에 대해 내 쪽에서 호감 같은 것을 품고 있었던 것 같다.
▲ <나의 운명 사용 설명서>(고미숙 지음, 북드라망 펴냄) ⓒ북드라망 |
이 책은 한 인문학자가 어떻게 명리학과 만나게 되었는지부터 소개하고 있다. 그는 사회과학 이론으로 무장하고 열정적으로 사회 운동을 해온 이들이 박탈감과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실부터 이야기한다. 모든 사회 활동 조직이 3년을 넘기지 못하고, 활동가들은 늘 마음이 우울하고 몸에 병을 달고 산다. 그는 몸에 대해 천착하기 시작했고, 동양 의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 사람이 태어나는 날의 우주의 기운이 그의 몸의 생체적 근간을 형성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지점에서 명리학을 만났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명리학 공부를 한 이후부터 나의 생일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생일이 그저 무미건조한 날짜가 아니라, 어떤 절기에 속한다는 사실이 몹시 감동적이었다. 나는 진월(辰月)생이고 곡우 이후에 태어났는데 곡우(穀雨)는 말 그대로 오곡을 적시는 촉촉한 비라는 뜻이다. (…) 아, 내가 이런 기운 속에서 태어났구나. 내 안에 이런 기운이 아로새겨져 있겠구나……. 내 몸 속에 새겨진 자연의 리듬과 진동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책은 천간과 지지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시작된다. 사주와 팔자를 뽑는 법, 존재의 축인 일주 이해하기, 오행의 상생상극 관계도, 사주 원국의 온난과 강약, 용신 운용과 대운의 시절 인연, 사주 오행과 오장육부의 관계 등에 대해 설명한다. 특히 저자는 명리학의 지장간 개념이 흥미롭다고 한다.
"나의 경우는 원국 사주에 '목'과 '화'가 없다. 그럼 간담과 심장/소장의 기운이 별 볼 일 없다는 뜻이고, 겉보기에도 좀 '없어' 보일뿐더라 몸도 찬 편이다. (그래서 도수가 센 빼갈을 좋아한다.) 하지만 다행히 지장간에 목과 화가 숨어 있다. 목/화는 내 몸과 활동을 주도하는 힘은 아니지만 잠재하고 있는 힘이라는 뜻이 된다."
심신과 성격과의 관계, 육친과 대인 관계 등의 차원에서도 재미있는 설명이 이어진다. 위 예문에서도 보이지만, 이 책이 그동안 읽었던 명리학 서적과 분별되는 지점은 문체의 스타일에 있다. 인문학자의 세련된 문체에 간결 발랄하게 읽힌다는 미덕을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풍부한 동서양 지적 상식을 자유자재로 가져다 사용한다. 다음은 육친에 대해 설명하는 대목이다.
"남성에게 관성이란? 바로 자식이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 여기서 나온 모양이다. 자식이 웬수라는 말도. (…) 중국이나 로마 황제들에게 가장 큰 적은 무엇보다 아들들이었다. 실제로 아들에게 암살당한 일인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 책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명리학을 도구로 하여 공동체와 사회 현상을 설명하고자 시도한다는 점이다. 다음은 관성에 대해 이어지는 설명이다.
"(관성의 압박이 심한 시기) 그것이 80년대 민주화 운동이었다. 그때 대학생들은 저항과 투쟁의 상징이었다. (…) 나처럼 체력도 후지고 세계관도 영 모자랐던 경우도 시대적 소명을 늘 되뇔 수밖에 없었던 시대, 그게 바로 불연 연대라 불리는 80년대다. 한편으로는 고난의 시대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 당시 청년들은 그 시대의 힘으로 청춘을 통과했으니 대단한 행운이기도 했다. 관성이란 건 바로 이런 의미다."
이밖에도 인성과다와 88만 원 세대, 식상과다와 SNS 시대, 재다신약과 물질적 욕망의 레이스, 관성과다와 포르노 천국 등, 명리학의 이론으로 오늘날의 사회 현상을 설명해내고 있다. 저자가 책의 말미에서 제안하는 주제는 '운명애'이다. 모든 운명은 평등하고, 삶에 길흉은 없다고 전한다. 개운을 하고 싶은 자가 있으면 자업자득과 자승자박의 이치를 받아들이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산다는 건 절대 공짜가 아니다. 평생 재화를 일구어야 하고 주기적으로 생의 문턱을 넘어야 하고 애증의 갈림길에 서야 한다. 만약 이 모든 것을 대충 피해 간 존재가 있다면 그건 사실 태어난 의미가 별로 없다."
실로 냉철한 운명 사용 설명서이다. 명리학에 입문하려고 하지만 어쩐지 그 학문이 모호하거나 비과학적이라고 느끼는 이들이 있다면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동양 학문이 비현실적이거나 비실용적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도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여담으로 이야기를 마쳐야겠다. 명리학을 공부할 때는 우선 자기 사주를 옆에 놓고 이론들을 공부해 나간다. 그러니까 자기 사주에 대해서 가장 먼저 통달하게 된다. 그럴 때 두 가지 놀라운 변화를 맞는다. 하나는 나르시시즘이 깨어지면서 누추한 자기 운명을 사랑하게 되는 용기, 하나는 오행이 계속 운행하는 한 어떤 고난이나 행운도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라는 사실에 대한 안도감. 이론을 익힌 다음에는 타인들의 사주를 풀어보는 임상에 들어가는데, 그때는 성격, 성향, 삶의 여정을 익히 아는 주변 지인들의 사주를 우선 사용한다. 임상용 사주를 풀어 당사자에게 설명해주며 검증해나갈 때, 명리학의 기본 이치만을 설명하는데도 지인들은 내게 "용하다"고 했다. 내가 용한 것이 아니라 그 학문이 오해된 것이라고 말해주지 못했다.
또 하나 말하지 않은 것. 내가 타인들의 눈에 무모하거나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선택을 할 때, 거기에도 명리학적 운명 사용법이 활용되고 있었다는 것. 내가 "집을 팔아서 9개월간 외국 여행을 했다"는 사실에 대해 대책 없는 무모함이나 예술가다운 치기쯤으로 여기는 일이 보통일 것이다. 하지만 그때도 나는 명리학을 참고했다. 그 시기에 새로 맞는 대운 글자가 원국의 지지와 합을 이루어 식상과다 형국으로 변화했다.
식상과다는 몸에서 힘이 빠지고 정신은 예민해지고, 익명성의 숲으로 숨고자 하는 욕구가 강해지는 시기이다. 더구나 나의 원국에는 역마살의 글자가 두 개나 있는데, 대운 글자 역시 역마의 기운이었다. 그런 시기는 긴 여행을 하면서 물러나 쉬거나 재충전하는 기회로 삼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 만약 그 시기에 책상을 붙들고 앉아 무엇인가를 해내려 애썼다면 완전히 탈진하고 말았을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재앙이었을 것이다.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재앙을 피해갔던 것, 그것이 나의 운명 사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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