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9월 3일
트루먼 대통령 특사 앨버트 웨드마이어 중장(1897~1987년)이 9월 3일 조선을 떠났다. 중국과 조선 상황을 점검하는 임무를 띤 웨드마이어 특사는 7월 22일 중국에 도착해 한 달간 머무른 다음 8월 26일 조선에 들어왔다가 8일 만에 떠난 것이다.
1944년 10월부터 2년 가까이 주중 미군 사령관을 지낸 웨드마이어는 미국 군부에서 중국 사정을 제일 잘 알고 장개석 정부와 비교적 사이가 좋은 사람이었다. 2년 동안 중국에 있으면서 장개석과 철천지원수가 되었던 전임자 '식초 장군' 조지프 스틸웰과의 대비 때문에 이 우호 관계가 두드러져 보였다(1946년 9월 16일자 일기).
웨드마이어 특사의 사명은 물론 중국 쪽에 중심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사명에 조선 문제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당시 상황에서 큰 주목을 끄는 것이었다.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의 한 부분으로 조선 문제가 검토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종래 조선에 파견된 미국의 고위급 특사는 에드윈 폴리뿐이었다(1946년 11월 18일자 일기). 폴리의 임무는 배상 문제에 국한된 것이었는데, 웨드마이어의 임무는 상황의 전면적 검토였기 때문에 미국의 대 조선 정책에 큰 영향을 끼칠 것으로 기대되었다.
도착 당시 웨드마이어의 사명에 관하여 이런 공식 발표가 있었다.
[주 서울 AP특파원 램버트 제공 합동] 26일 오후에 입경한 웨드마이어 중장은 즉시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 공보부 특별 발표
트루만 대통령의 지시에 의하여 내조한 사절단의 주목적은 중국에 관한 것과 같이 현하 조선의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및 재정적 상태를 조사하는 것이다. 사절단 일행은 하등의 구속이나 편견 없이 완전한 객관적 입장에서 사실을 조사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사절단의 공평한 실정 조사 계획안은 수행되지 못할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자료를 적당히 수집하여 조선 국민의 복리를 향상시키고 고심하여 얻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조선 국민과 협력하는 방법을 강구함에 있어서 미국 정부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26일 당지에 도착한 미 대통령 특사 웨드마이어 중장은 신문 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1. 우리 사절단 일행은 조선 사태 조사에 있어서 순전한 객관적 태도를 취할 것이며 혹종의 언약을 하거나 예단 재결은 하지 않을 것이다.
2. 조선에서 수집된 정보는 미국으로 하여금 조선인 민생 문제 향상을 위하여 조선인과 협력하는 방책과 많은 고통을 겪고 획득한 평화를 조선인에게 유지시키는데 대한 방책을 결정하는 데 미국은 도울 것이다." (<조선일보> 1947년 8월 28일)
웨드마이어 도착 직후 그의 활동에 대한 기대를 표명하는 성명이 민주의원, 조선민주당, 민족통일총본부, 한독당 그리고 좌우합작위원회에서 나온 것이 보도되었다. 미국 특사이므로 좌익 쪽에서 시큰둥해 하고 우익과 중간파에서 환영한 것일 텐데, 이승만이 아무 말 없는 것이 오히려 눈길을 끄는 일이다. 김구가 군정청 인사들과 함께 비행장에 출영한 것과 대비된다.
김구의 출영은 중경 시절 교분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승만은 웨드마이어를 '자기 편'으로 여기지 않고 있었던 듯하다. 이승만은 9월 1일 발표한 담화의 한 부분에서 웨드마이어 환영의 뜻을 표하는 데 그쳤다. 이런 부분이다.
"웨드마이어 장군이 금번 대통령의 특파 대사로 실정을 조사하기 위하여 우리나라를 심방케 되었으므로 우리는 웨 장군과 그 일행을 열정으로 환영한다. 미국 정부에서 이와 같은 권위를 가진 인물을 파견하게 된 것은 가장 우리의 광영으로 알며 트루먼 대통령께 심심한 사의를 표하고자 한다.
씨가 중요한 사명을 띠고 중국에 다년 시무하여 공산파에 대하여 타 고관들보다 특히 정확한 관찰을 가진 분이므로 이번 시찰에 이 문제에 대하여 정당한 보고가 대통령께 갈 줄로 믿으며 따라서 씨는 38선 문제가 악화된 것을 깊이 유감으로 생각하는 터이니 이 문제에 대하여 원칙적 조처가 있기를 우리는 깊이 바라는 바이다." (<동아일보> 1947년 9월 2일)
웨드마이어는 군정청 보고에 주로 의존하고 조선인 상대의 독자적 조사는 별로 행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가 조선인을 개별적으로 접견한 것은 떠나기 전날 조소앙(국민의회)과 전진한(대한노총)을 만난 일만이 보도되었다(<조선일보> 1947년 9월 3일). 그러나 공식적 조사는 아니라도 조선인들을 꽤 여럿 만나 꽤 깊은 이야기를 나눈 것으로 보인다. 커밍스는 웨드마이어 보고서의 일부 내용을 이렇게 소개했다.
앨버트 웨드마이어 장군은 1947년 후반의 조선 방문 때 이와 비슷한 증거를 보고했다. "과도 정부의 행정관 중 압도적 다수가 한민당 당원이거나 암묵적 지지자들"이라고 그는 기록했다. 한민당은 지주들의 정당이며 그 지도자 김성수는 서남 지방의 대지주였고, 또 하나의 지도자 장덕수는 김성수와 떼어 놓을 수 없는 동지이자 한민당의 두뇌와 같은 사람인데, 일본 식민 통치에 대한 "강력한 지지" 경력 때문에 공적 활동에 다소의 제약을 받는 사람이라고 적었다. 그러나 하나의 정당으로서 한민당에는 중대한 한계가 있다고 했다. "대도시 외에는 지방에 조직이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많은 조선인들이 공산주의를 신봉해서가 아니라 친일 협력자들에 대한 반감 때문에 좌익의 길을 택했다는 사실을 웨드마이어는 조선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알게 되었다. 인민이 공산주의자들을 지지하는 까닭이 이북 세력의 획책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애국적 항일 운동을 기억하기 때문이라고 저명한 문인 정인보가 웨드마이어에게 말해주었다. "이곳의 공산주의는 민족주의라는 비료에서 영양분을 얻은 것입니다." 나아가 정인보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리와 접경해 있는 러시아만이 일본에 대한 적대감을 우리와 공유해 왔다"는 사실을 따끔하게 지적하기도 했다.
반공주의자인 소설가 강용흘은 웨드마이어에게 보낸 편지에 "조선은 세계 최악의 경찰 국가 중 하나였다"고 썼다. 조선 내의 대립은 "배부른 소수 지주층과 배고픈 대중 사이의 싸움이며 지금 지주층(한민당)이 칼자루를 쥐고 있는데 다수 대중은 오래된 이 불의를 바로잡고 싶어 한다"고도 썼다. 강용흘은 이승만이 유엔의 지지를 얻음으로써 "러시아인들을 이북에서 쫓아낼"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고 예측했다. 조선 정치의 교착 상태의 피할 수 없는 결과가 내전이라는 이야기를 웨드마이어는 그 밖의 저명한 조선인 여러 명으로부터도 들었다.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2>, 187~188쪽)
정인보와 강용흘 외에는 이름이 나타나 있지 않지만, 중간파 사람들의 이야기를 웨드마이어가 많이 들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에서 '좌익'의 정체에 대한 이런 관점이 잘 파악되었다면 맹목적 반공-반소 정책을 조정하는 데 참고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9월 19일에 제출된 웨드마이어 보고서는 정책 결정에 큰 작용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웨드마이어의 보고서는 미국의 대한 정책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이 보고서가 제출되기 전에 이미 한국 문제를 유엔에 이관하려는 정책이 워싱턴 고위 당국자들 사이에서 합의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트루먼 행정부는 미국이 나쁜 영향을 최고화하는 선에서 한국으로부터 철수할 수 있도록 한국 문제를 처리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했다. (<맥아더와 한국 전쟁>(이상호 지음, 푸른역사 펴냄), 127쪽)
웨드마이어 보고서가 관심을 집중시킨 것은 역시 조선보다 중국 문제였다. 국무장관 마셜이 1946년 중 중국에 특사로 나가 국·공 대립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미국이 추구한 해결 방안은 국민당이 주도하는 연립 정부에 공산당이 참여함으로써 내전을 피하는 것이었다. 마셜은 국민당의 협조 여부에 군사 원조를 연계시킴으로써 협조를 강요하다시피 했지만 장개석은 '멸공(滅共)'의 고집을 버리지 않았다.
국민당에 가장 협조적인 미국 장군 웨드마이어를 특사로 고른 것은 장개석에 대한 압박을 최대화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웨드마이어까지도 부패 청산과 연립 정부 추진을 권한다면 미국의 뜻에 의문의 여지가 없을 테니까. 웨드마이어 보고서에는 역시 중국에 대한 대대적 원조를 추천하면서도 국민당 정부의 개혁을 조건으로 붙여놓았다.
그러나 장개석은 이 조건에 따르지 않았고 미국의 원조가 끊기면서 공산당에게 대륙을 내어주기에 이른다. 공산당의 대륙 석권 후 미국 반공 진영에서는 '중국 상실'의 책임 문제가 끓어올랐다. 트루먼과 마셜이 혹독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는데, 비판이 집중된 대목의 하나가 웨드마이어 보고서에서 권한 원조 강화 권유를 묵살했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웨드마이어는 반공 진영의 아이콘이 되기도 했다.
웨드마이어 방문 당시 조선에 대한 미국 정책은 미소공위를 떠나 유엔으로 조선 문제를 옮겨가는 쪽으로 확정되어 있었으므로 그의 보고서가 방향 결정에 작용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방문을 계기로 조선 문제를 중국 사정에 연계해서 보는 관점이 세워졌고, 이에 따라 중국의 공산화가 조선 문제에 대한 미국의 태도를 경직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중국 사정은 과연 어떻게 변해가고 있었는가, 머지않아 한 차례 살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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