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대선을 앞둔 우리 정치를 보면서 이런 느낌을 받는다. 확인할 수 없는 의혹들이 줄을 잇고, 장밋빛 공약이 쏟아지고, 치열한 공방이 오가는 것이 언젠가 본 듯해서다. 선거철이면 되풀이되는 현상이서일 게다. 그러니 양해하자.
엘리엇 애런슨·캐럴 태브리스의 <거짓말의 진화>(박웅희 옮김, 추수밭 펴냄)는 2007년 번역판이 나왔다. 당시 서평을 쓰면서 "장삼이사에서 국가 지도자까지 반드시 읽어볼 만하다. 대선을 앞두고 진위를 가리기 힘든 주장이 난무하는 요즘 특히 그렇다"고 했다. 5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이 책을 들먹이자니 그 권유는 여전히 유효하다. 씁쓸하지만 그렇다.
그렇지만, 이 책이 정치꾼들만 겨냥한 것은 아니다. 자신과 당파의 이익을 '국가와 민족'이란 명분으로 가린 채 틀린 줄 알면서도, 이루지 못할 줄 알면서도 거짓말과 허언을 일삼는 이른바 정치인들이 많긴 하지만 말이다. 그보다는 한 번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어" "당시로선 그것이 최선의 해결책이었어" "난 그럴 자격이 있어" "나만 그런 게 아니야"라는 말을 해본 경험이 있는, 우리 모두를 겨냥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거짓말이 진화하면 어떻게 될까. '진화'는, 진보나 마찬가지로 방향성이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일반적으로 좋아진다고 생각한다. 번역판의 이 제목은 거짓말이 참말이 되는, 아니 참말로 여기게 되는 심리 과정을 담았다는 의미다. 원제는 "Mistakes were made(But not by me)." '잘못은 저질러졌다(그러나 내가 한 것은 아니다)'란 정도의 뜻으로 자기 정당화(self-justification)를 다뤘으니 영 딴판인 제목은 아니지만 조금 멀리 간 제목이긴 하다.
▲ <거짓말의 진화>(엘리엇 애런슨·캐럴 태브리스 지음, 박웅희 옮김, 추수밭 펴냄). ⓒ추수밭 |
문제는 이런 인지 부조화가 온갖 분야에서 발견되며 이를 해소하기 위해 명백한 증거도 왜곡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왕따 현상을 보자. 가해자 중엔 또래 아이들과 어울려 다니기를 좋아하지만 애꿎은 친구를 못 살게 구는 일엔 관심 없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남을 괴롭히는 일에 부조화를 느낀 그 아이는 "그 앤(피해자) 바보에다 울보야. 게다가 기회가 있었다면 내게 똑같이 했을 걸"이라 자신을 설득하게 된단다.
그럼 이런 자기 합리화가 정치에서는 어떻게 벌어질까. 유력한 대권 후보가 TV에 출연해 사생활이며 친인척 관리, 재산 형성 과정에서 이런저런 비리를 저질렀다며 대통령 감으론 최악이라 고백해도 "아, 저렇게 솔직한 사람이 있다니.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는 바로 저런 대통령이 필요해"라고 말하는 지지자들이 있을 것은 분명하다. 그들에겐 누가 뭐라 해도, 심지어 본인이 이야기해도 들리지 않는 것이다. 자신의 믿음에 충실하기 위해 어떤 이유든 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기 신념에 부합하는 증거, 자기에게 좋아하는 대로 해석하는 경향을 '확증 편향'이라 한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질까. 뇌에는 자신의 인식과 신념들을 정확하고 실제적이며 편견이 없는 것으로 정당화해주는 자기 본위 습관들이 패키지로 묶여 있단다. 사회심리학자 리 로스가 '소박 실재론(naive realism)'이라 이름붙인 것이다. 이에 따라 개방적이고 공정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당연히 합리적 견해에 동의한다, 내가 가진 견해는 무엇이나 합리적이어서 '적'들이 실상을 안다면 내게 동의할 것이고 그렇지 않을 경우는 적들이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는 증거라는 논리가 성립한다는 것이다.
오만과 편견이 자기 합리화의 주범이이지만 이는 기억도 왜곡한다. 자신이 한 것 혹은 하지 못한 것에 대해 좋게 평가하고 기억되도록 자기도 모르게 '가공'하는 것이다. 지은이는 그 예로 2003년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됐던 제임스 프레이의 <백만 개의 작은 조각>을 든다. 마약과 알코올 중독, 기억 상실 등의 재활 과정을 회고록 형식으로 쓴 이 책은 체험담이 아니란 사실이 밝혀져 큰 물의를 빚었는데 지은이는 "우리 대다수는 거의 항상 완전한 진실을 말하지도 않으며, 의도적으로 속이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잘못이 있더라도 다른 사람이 저지른 것이며 자신은 그 자리에 있긴 했지만 기껏해야 죄 없는 구경꾼 노릇을 한 것에 불과하다고 기억하는 것이 일반적이란다. "내 기억이 '내가 그것을 했다'고 말하지만 내 자존심은 '내가 그것을 했을 리가 없다'고 말한다. 결국 기억이 굴복한다"는 니체의 말이 실감나는 경우다.
그렇다고 자기 정당화 그 자체로는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지은이들은 주장한다. 자기 정당화가 있기에 우리는 발 뻗고 편히 살 수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자기 정당화가 없다면 가지 않은 길을 아쉬워하고 지나온 길을 후회하느라 두고두고 자기를 괴롭힐 것이란 지적은 맞다. 그러나 무심코 하는 자기 정당화는 유사(流砂)와 같이 우리를 더 깊은 불행 속으로 끌어들일 것이라 경고한다. 과오를 바로잡는 것은 물론 제대로 보는 것조차 방해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범죄로 하여금 자기 행위에 대한 책임감을 회피하게 한다. 동창, 친구와의 식사 한 끼가 골프장 동행을 거쳐 '사과 상자'나 정경 유착으로 이어지는 것도 '우정'이나 '관행'으로 합리화한 탓 아닌가.
책은 자기 정당화의 원인과 현상을 짚는 데 무게가 실렸다. 때문에 '처방'이 상대적으로 소홀해 아쉬움이 있다. 지은이들이 구루가 아닌 학자이고, 자기 정당화가 우리 모두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인 만큼 어쩌면 피할 수 없는 한계인 것으로 보인다.
대신 지은이들은 '겸손'을 주문한다. 개방적이고 진심으로 배우고자 하는 의사를 갖고, 반드시 옳아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건전한 자기 확신과 오만을 가르는 선을 쉽게 넘게 된다고 경고한다.
마음이 어떻게 조화를 갈망하고, 신념과 판단, 기호에 이의를 제기하는 정보를 어떻게 거부하는지를 이해하면 우리는 실수의 가능성에 관대해질 수 있다.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지만 우리 자신과 요즘 정치판의 속내를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새삼 눈에 들어오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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