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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김구, 어디서 갈라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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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김구, 어디서 갈라섰나?

[해방일기] 1947년 8월 26일

1947년 8월 26일

8월 25일 이승만이 민족대표자대회(민대) 회의에서 이런 요지의 발언을 했다.

"현하 한인들은 대개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기대하고 있으나 일부에서는 이를 반대하고 있으며 또 우익 진영 내에서도 미군과 협조하지 않고 자율적으로 한다 하며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우리는 미군과 협조하여 하루바삐 총선거를 실시하도록 해야 할 것이며 만일에 한미 합작으로 잘 안되든지 또 지연된다 하는 때에는 우리는 단독으로라도 총선거를 하도록 해서 조속한 시일 내에 자유 정부를 수립하여 시급한 민주 문제 등을 해결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조선일보> 1947년 8월 26일)

우익 진영 내에서 미군과의 협조를 반대한다는 사람들이란 김구 이하 중경 임정 세력을 말하는 것이다. 이승만이 말하는 "우익 진영"이란 극우 세력을 말하는 것이고, 1945년 말 이래 극우 세력은 반탁 운동에 힘을 합쳐 왔다. 한국민주당, 이승만, 김구는 기본 입장에 상당한 차이가 있었지만 반탁 운동을 통해 미소공위를 배척하는 데는 득실을 함께 했던 것이다.

극우 3개 세력은 각각의 강점을 갖고 있었다. 한민당은 재력과 함께 군정청에서 경찰에 걸치는 인적 자원을 갖고 있었다. 이승만은 미국 정계, 군부, 언론계의 극우파와 유대관계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김구는 임시정부의 권위와 민족주의자로서 명망을 갖고 있었다. 기세 높았던 1945년 말의 반탁 운동은 3개 세력의 힘이 처음으로 합쳐진 결과였다.

한편, 각 세력은 나름의 약점을 갖고 있었다. 한민당은 가장 큰 실력을 갖고 있었지만 명분과 위신이 없었다. 민족주의의 척결 대상인 친일파와 민주주의의 타도 대상인 지주층이 그 실력의 배경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주도적 역할을 맡을 수 없었고, 그 구성원들도 상황에 따라 개인적 득실 관계가 유리한 쪽으로 빠져나가기 쉬웠다.

이승만과 김구는 국내 기반이 없다는 것이 약점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한민당의 실력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각자의 조직을 키우는 데 주력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조직 확대를 놓고 경쟁하는 입장이었다.

중경 임정을 등에 업은 김구가 이 경쟁에서 유리한 점을 많이 갖고 있었다. 1946년 4월 국민당과 신한민족당이 한독당과 합당한 것은 민족주의자로서 성망 덕분이었다. 이승만이 극우 세력에만 매달린 반면 김구는 민족주의 세력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김구는 반탁 세력의 장악을 더 중시했기 때문에 민족주의 세력의 지지를 잃었다. 1947년 5~6월 한독당의 분열이 그 결과였다.

김구가 민족주의 세력보다 반탁 세력, 즉 극우 세력을 더 중시한 것은 '임정 추대' 때문이었다. 한민당은 창당 때부터 '임정 봉대'를 내세워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외면-적대했고, 같은 임정 추대를 제창한 안재홍 국민당의 '보강론'과 달리 '직진론'을 주장했다. 보강론은 중경 임정을 뼈대로 삼되 국내 인물로 보강한다는 것인데, 직진론은 국가 권력을 통째로 있는 그대로의 중경임정에 맡기자는 것이었다. 1945년 말 반탁 운동이 터져 나올 때 한민당 계열 군정청-경찰 간부들이 앞 다퉈 김구에게 충성을 맹서한 것이 이 직진론의 입장이었다.

이승만과 김구의 귀국 직후 3자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는 한민당 측의 기록이 재미있다.

임정이 민족 진영에서 주도권을 잡으려면 한민당을 눌러야 했는데 인물로 당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제일 큰 적수로 본 것이 송진우와 장덕수였다. 송진우에게는 구실이 없는지라, 일제 말기에 학병 권유 연설을 한바 있는 장덕수를 친일파로 몰아 제거하려고 들었다. 더구나 장덕수는 민족 진영에서 손꼽히는 이론가요, 웅변가였다.

임정이 한민당을 적대시하는 또 한 가지 이유는 한민당이 이승만을 적극 지지하였기 때문이다. 김구는 연배로나 학식 경력으로나 이승만에게 형사(兄事)하여 협력할 뜻을 거듭 밝혔지마는,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은 이승만이 있는 한 자기들은 햇빛을 보지 못할 것이라 하여 두 사람 사이를 떼어 놓으려고 하였다. 그 일례로 임정계는 독촉중앙협의회와는 별도로 같은 성격을 가진 특별정치위원회의 결성을 꾀하였는데 여기에는 좌익계도 가담할 움직임을 보였다. 그들은 임정의 주미외교위원회 위원장에 지나지 않는 이승만이 먼저 환국해서 국부(國父)의 행세를 하면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결성한 것이 못마땅했고, 따라서 이승만을 받드는 한민당은 우당(友黨)이라기보다 정적(政敵)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민주당이 계속 임정을 지지하는 태도를 바꾸지 않은 것은 그 법통 때문이었다. 상대할 만한 인물은 김구 이시영 김규식 외에는 별로 없었으나 군정에 종지부를 찍고 독립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임정 법통을 이용하는 것이 명분이 있고 가까운 길이었다. 한민당의 수석총무로 임정의 고자세를 자주 대하게 된 고하는 울화통을 터뜨리기도 했다.

"해외에서 고생했다고 받들어 주니까 30년 전의 머리를 그대로 갖고 자기들만이 애국자란 얼굴을 한단 말이야."

그러나 인촌은 냉정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어떤가. 지금은 그들을 받들고 나라를 세울 때란 것을 잊지 말게." (<인촌 김성수 전>(인촌기념회 펴냄), 485~486쪽)

한민당 입장의 미화-정당화를 위해 작성된 글이지만 뜻하지 않게 비쳐 보이는 사실들이 있다. 이승만과 김구 사이의 경쟁, 그리고 한민당과 김구 세력 사이의 반감이 드러나 있다. 다만 반감에도 불구하고 한민당이 임정을 지지한 것이 그 "법통" 때문이라 한 것은 충분한 표현이 아니다. 한민당은 임정에 의지해서 친일파 규탄을 모면하려 한 것이었다.

한민당과 임정 사이의 초기 관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일화가 하나 있다.

임정의 환국을 누구보다 고대하고 열렬히 환영한 것은 한국민주당이었는데 임정은 이 한민당에 대해 고자세로 나왔다. 한민당이 앞장서 만든 '환국지사후원회'는 그들에게 일차로 기금 900만 원을 전달하였던바 그 속에 부정(不淨)한 돈이 들어 있다 하여 왈가왈부 말이 많았다. 이 문제로 양측이 자리를 같이 했을 때는 오고가는 말도 거칠었고, 국내 숙청론(國內肅淸論)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국내에서 친일하지 않고 어떻게 생명을 부지해 왔겠느냐고 하는 치졸한 논리였다. 송진우는 참다못해 한마디 했다.

"여보 해공(신익희), 부정, 부정 하지만 중국에서 궁할 때 무엇을 어떻게 하고 살았는지 여기서는 모르는 줄 아오? 임정은 정부요. 정부가 받는 세금 속에는 양민의 돈도 들어있고 죄인의 돈도 들어있는 법이요." (<인촌 김성수 전>, 485쪽. 같은 이야기가 <설산 장덕수>(이경남 지음, 동아일보사 펴냄) 326~328쪽에는 더 길게 나와 있다.)

'국내 숙청론'이란 친일파 처단 주장을 한민당에서 부른 이름이다. 친일파만 처단하자는 주장인데, 마치 국내 인사롤 몽땅 숙청하자는 진짜 치졸한 주장처럼 부풀려 말하는 전형적 흑색선전 수법이다. 단란주점 가봤냐는 질문에 "뭐가 어떻게 단란한 건데요?" 가볍게 대답한 것 갖고 그 사람이 단란주점이나 룸살롱에 가본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했다는 비슷한 수법이 요즘도 쓰이고 있다.

900만 원. 쌀 한 가마에 50원 안쪽일 때였다. 오늘날의 수백억 원 가치였다. 최고액권인 백원 권으로도 수백 킬로그램의 짐이니, 그야말로 '차떼기'다. 이런 거액이 단순한 '성금'일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돈을 받아먹는다는 것은 한민당 편이 된다는 얘기였다.

한민당으로서는 '재력 시위'이기도 했다. 한민당 사람들이 허리띠 졸라매고 쓸 돈 아껴서 갖다 바친 돈이 아니었다. 마음에 들게 행동하면 얼마든지 더 갖다 줄 수 있다는, 일종의 '계약금'이었다.

아무리 부자들이라 하더라도 이런 큰돈을 이처럼 가볍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정상적인 일이 아니다. 미군 진주 전에 총독부에서 서둘러 찍은 30억 원의 '빨간 돈'이 아니고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이승만과 미군정 당국자들에게는 얼마나 갖다 바쳤을까. 임정 측이 받아들이는 데는 한 차례 진통이라도 있었기에 이런 일화가 전해지지만, 조용히 받아먹은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돈을 돈으로 인정해 줬겠지.

한민당 친일파들이 해방 직후 느끼던 불안은 미군정이 자리 잡음에 따라 흐려져 갔다. 그래서 1946년 10월에는 당내 민족주의자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토지 개혁을 반대하는 본색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이 단계에 와서는 임정의 권위에 의지할 필요도 없어졌다. 불안한 시절을 넘기기 위해 임정 세력에게 수수료를 지불한 셈일 뿐이었다. 그래서 한민당을 한독당에 통합시키려는 김구의 집요한 노력을 거듭거듭 뿌리칠 수 있었다. 그리고 제2차 미소공위에 이승만과 김구의 뜻을 거스르며 협의대상 신청을 할 수 있었다.

1947년 초 이승만이 미국에 가 있는 동안 김구는 우익 세력을 반탁독립투쟁위원회(반탁투위)와 국민의회로 정비하고자 했다. 3월 1일을 기해 국민의회를 발판으로 정부수립을 선포하려는 시도까지 했다. 이승만이 김구의 주도권 장악을 걱정해서 귀국을 서둘렀다고 하는 설도 있다(<한국 현대 민족 운동 연구>(서중석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536~537쪽).

우익의 주도권을 둘러싼 김구와 이승만의 물밑 경쟁은 두 사람의 귀국 이후 꾸준히 계속되었다. 이승만은 1947년 4월 귀국 이후 지지 세력을 민족대표자대회로 재조직했는데 김구 측은 이것을 국민의회와 합치려 시도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8월 9일 통합 대회를 열었다가 성과 없이 끝났는데, 이때 두 지도자의 "정치이념 차이"가 공공연히 지적되기 시작했다.

무성과로 폐회된 합동 대회에서 민대 측과 국의 간의 정치 이념 차이가 명백화하였음에 비추어 9일 민대 측은 국의에 포섭된 대의원 전원에 대하여 소환장을 전달하고 11일에는 독촉국민회 회의실에 약 100여 명의 대의원이 참집하여 소환에 불응하는 대의원 처분 문제와 이에 따르는 대의원 보선 문제를 결의하는 동시에 독자적 입장에서 이 박사의 정치 이념을 근간으로 하는 선거 대책의 수립과 동 대책위원회의 구성 등을 토의 결정할 것이라 한다.

한편, 이러한 비상사태에 처하여 국의 측에서도 합동대회 이후 상임위원회를 소집하고 이에 대한 선후책을 강구중이었는데, 11일 상오 김구 주석은 국의 의장 조소앙을 대동하고 돈암장을 방문하고 국면 타개책에 관하여 요담하였다고 한다. (<동아일보> 1947년 8월 12일)

두 사람 사이의 "정치 이념 차이"는 무엇인가. 파시스트 성향에서는 차이가 없었다. 김구는 민족주의자였고 이승만은 아니었던 것이 차이였다. 그래서 이승만은 남조선에 미국의 영향을 받는 국가를 세우고 싶어 했고 김구는 모든 외국의 영향에서 벗어난 국가를 한반도 전체에 세우고 싶어 한 것이었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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