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와 자본주의 발전
우선 자본 흐름의 관점에서 자본의 재생산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비는 자본이 재생산되기 위해서는 다음 여섯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본다.
①자본 순환을 시작할 수 있는 충분한 화폐 자본, ②자본의 필요에 부응하는 충분한 노동 공급, ③(자연자원을 포함한) 생산 수단, ④기술과 조직의 혁신, ⑤자본 축적에 효율적인 노동 과정, ⑥충분한 유효 수요(노동자와 자본가의 소비와 자본가의 재투자).
이 여섯 가지 조건 가운데 하나라도 충족되지 않으면 자본 흐름의 연속성이 단절되고, 이것이 상당기간 지속되면 자본 축적이 중단되는 위기가 발생한다. 다시 말해 이 여섯 가지는 자본이 재생산되기 위해 끊임없이 극복해야 하는 잠재적 한계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는 이러한 잠재적 한계가 현실화되면 자본 축적의 중단이라는 파국을 맞게 되는가?
하비는 그렇지 않다고 설명한다. 자본 흐름의 연속성을 가로막거나 둔화시키는 장애가 발생하면 자본(과 국가)은 그것을 극복하거나 우회하는 방법을 발견할 수 있으며, 그럼으로써 자본은 다시 순환하게 된다. 하비의 이러한 설명은 자본주의의 내재적 위기 경향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자본주의가 붕괴되지 않고 확대 재생산된 이유를 보여준다.
그러나 여기서 하비는 또 한 가지 점을 지적한다. 자본이 직면한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찾은 방법은 또 다른 장애에 맞닥뜨리도록 한다. 즉, 자본주의는 하나의 장애를 피하면서 곧 다른 장애에 직면하게 되는 끊임없는 변화 과정 속에서 발전한다는 것이다. 하비의 이와 같은 생각은 위기를 본질적으로 모순적인 체제의 '비합리적인 합리화 기제(irrational rationaliser)'로 인식하는 것과 맞닿아 있다. 위기는 자본주의가 진화하고 발전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재생산에서 위기의 역할은 재생산의 중단을 초래하는 동시에 재생산이 확대된 형태로 이루어질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물론 그럴 수 있기 위해서는 자본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적절한 방법을 찾아야 하지만 말이다(지금까지는 그렇게 해왔다).
2008년 위기와 자본주의의 근본 문제
▲ <자본이라는 수수께끼>(데이비드 하비 지음, 이강국 옮김, 창비 펴냄). ⓒ창비 |
위기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적인 주요 위기 이론들, 대표적으로 이윤 압박 이론, 이윤율 저하 이론, 과소 소비 이론 간의 대립을 뛰어넘는 것처럼 보인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위기의 경향은 내재하지만 이것은 상이한 형태로 발현될 수 있으며, 따라서 특정한 위기의 원인은 그 위기가 발생한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2008년의 세계 금융 위기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하비는 이 책에서 1970년대의 구조적 위기를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현재의 위기가 배태되었다고 본다. 1970년대에 노동 공급의 위기 및 그에 따른 이윤 압박의 위기에 직면한 자본은 노동을 억압하는 신자유주의를 통해 이 위기를 우회했지만, 이러한 시도 자체는 유효 수요 부족이라는 또 다른 문제를 초래했다. 자본은 이러한 잉여의 실현 문제를 금융의 팽창을 통해 해결하려고 했으나, 그 시도는 일시적으로 위기를 우회하는 효과만 있었을 뿐 결국 현재의 위기로 귀결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유효 수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금융화는 하비가 '자본 잉여의 흡수 문제(capital surplus absorption)'라고 부르면서 자본주의의 핵심적 근본 문제로 인식하는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러한 관련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효 수요 문제의 해결 방법에 대한 하비의 이해 방식을 알 필요가 있다.
하비는 유효 수요 문제는 가계 부채의 증가를 통한 노동자들의 소비 지출 증가뿐만 아니라 잉여의 재투자(과잉 자본의 투자)를 통해서 해결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잉여가 재투자되는 곳이 반드시 생산 부문일 필요는 없다. 투자를 좌우하는 것은 '수익성'이며, 생산 부문보다 금융 부문의 수익성이 더 높다면 과잉 자본은 금융 부문으로 더 많이 몰릴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1970년대 이후 실제로 전개된 과정이라고 하비는 보고 있다. 그런데 자본은 '경쟁의 강제 법칙(coercive law of competition)' 하에서 작동하는 자본 축적의 논리에 따라 끊임없이 수익성 있는 새로운 투자 기회를 찾아야 하는 근본적인 문제에 직면하는데, 하비는 이것을 '자본 잉여의 흡수 문제'라고 부른다. 따라서 하비에게 금융화는 '자본 잉여의 흡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인 것이다.
자본주의의 진화와 위기의 새로운 개념화
하비는 이 책에서 자본주의의 역사적 진화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자신이 '활동 영역(activity sphere)'이라 부르는 개념을 도입한다. 특히 자본주의의 진화와 관련되는 것은 다음 일곱 개의 활동 영역이다.
①기술과 조직 형태, ②사회적 관계, ③제도적·행정적 장치, ④생산과 노동 과정, ⑤자연과의 관계, ⑥일상생활과 종의 재생산, ⑦세계에 관한 정신적 개념.
이 활동 영역은 그 어떤 것도 지배적이지 않다. 각각의 영역은 다른 영역(들)에 의해 결정되지 않은 채 스스로 진화하지만 항상 다른 영역들과의 역동적인 상호 작용 속에서 진화한다. 이 활동 영역들의 끊임없는 상호 작용과 그 속에서의 재구성을 하비는 자본주의 역사 속에서 활동 영역의 '공진화(co-evolution)'로 파악한다.
하비는 이 일곱 개의 활동 영역들이 어떤 사회의 특정한 시공간에서(예컨대 1850년의 영국) 서로 어떤 관계를 맺으며 어떻게 조직되고 구성되는지를 파악하면 그 사회의 일반적 성격과 조건을 알 수 있다고 본다. 즉, 특정한 시공간을 대상으로 이 일곱 개 활동 영역의 공진화를 연구하면 그 사회의 자본주의 진화 궤도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곱 개 활동 영역의 공진화는 결정적이지 않고 우연적으로 발생하며, 그 과정이 항상 조화로운 것도 아니다. 하비는 활동 영역들의 공진화 속에서 그들 간에 발생하는 긴장과 적대의 관점에서 위기를 새롭게 개념화한다. 즉, 활동 영역들 간의 긴장과 적대가 공진화를 중단시키는 파열로 귀결될 때 자본주의의 위기가 도래한다는 것이다.
누가, 무엇을 할 것인가?
공진화가 중단되는 파열 국면에서 자본주의는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는가? 하비가 지적하듯이, 자본은 활동 영역들 간의 질서와 조화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 대대적인 노력을 감행할 것이며, 이것은 다양한 영역에서 정치적 권력 투쟁의 토대를 마련할 것이다. 이 투쟁에서 비판 세력이 성공하여 보다 민주적이고 평등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기 위해서는 일곱 개 활동 영역들이 이에 조응하는 방식으로 함께 변화해야 한다.
그렇다면 누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지점에서 활동 영역은 그 어떤 것도 지배적이지 않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대안 운동은 자본의 공세에 맞서는 반자본주의 운동이지만 계급투쟁이 아니다. 하비의 설명에서 계급투쟁은 중심적이지도 지배적이지도 않다. 반자본주의 운동은 활동 영역들 가운데 그 어떤 영역에서도 먼저 시작할 수 있다.
다만 먼저 시작된 영역에서의 변화의 움직임이 서로를 추동하며 강화하는 방식으로 다른 영역으로 전파되면서 모든 영역들이 함께 변화할 때 반자본주의 운동은 성공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자본의 수수께끼를 풀어 그 비밀을 드러내는 비판적 지식인의 역할이 중요하게 제시된다.
질문들
글로벌 금융 위기가 끝났다고 공식적으로 선언된 지 3년여가 지났지만 여전히 본격적인 회복은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실업률도 여전히 위기 이전보다 높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 빠른 회복세가 나타날 것 같지도 않다. 오히려 유로존의 재정 문제로 위기의 재발 가능성이 우려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줄이고 보다 나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는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질문이다. 하비의 이 책은 자본주의의 대안을 사고하는 전통 속에서 이 질문에 의미 있는 답을 제시하기 위해 자본 축적의 근본적 모순과 자본주의의 위기 경향을 밝히고 현재의 위기를 구체적으로 해명하려고 시도한다. 이 점에서 이 책은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대안을 모색하는 대다수 위기 이론들과 차별을 보이면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이론적 전통을 한층 풍부하게 만들고 있다.
물론 하비가 이 책에서 제시한 개념과 분석이 논쟁의 여지가 없지는 않다. 예컨대 '자본 잉여의 흡수 문제'가 자본 흐름의 여섯 가지 장애 중 하나인지, 아니면 '자본 잉여의 흡수 문제'가 자본주의 위기 경향을 내재적으로 만드는 근본적인 모순이고 여섯 가지 장애로 인한 위기는 이것의 발현 형태인지가 분명하지 않다. 한마디로 '자본 잉여의 흡수 문제'와 자본 흐름의 여섯 가지 장애에 대한 설명이 하비의 위기 이론에서 각각 어떤 수준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둘의 관계는 어떠한지가 분명하게 제시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활동 영역의 공진화 이론을 통해 분석되는 위기가 자본의 순환 및 그로부터 발생하는 위기와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또한 1970년대 위기부터 현재의 위기까지 그 위기의 성격에 대해, 그리고 현재의 위기의 극복 가능성, 즉 자본주의가 현재의 위기를 일시적으로 우회할 수 있을 뿐인지 아니면 이윤 창출과 잉여 흡수의 새로운 기반을 발견하게 되어 다시 지속적인 성장으로 회복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더 면밀한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앞으로 이러한 문제들을 비롯하여 이 책에서 제시된 분석과 개념이 보다 생산적인 논쟁으로 이어진다면, 이 책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이론의 발전을 위해 의미 있는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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