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8월 17일
서울시 개최로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해방 2주년 기념식에서 축사를 읽은 조선인은 서재필(?), 이승만, 안재홍의 3인이었고, 김구는 폐회 직전 만세 3창을 선창했다. 이승만의 축사에 주목할 만한 내용이 들어 있다.
"재작년 이 날 해방이 되어 2년이나 지나도록 해방이라는 것은 오직 명분뿐이요, 실제에 있어 우리는 이 해방을 의심치 않을 수 없습니다. 재작년 12월 조선의 독립을 원조키 위하여 체결된 막부 3상 결정은 조선을 참가시키지 않고 된 것이며 사리에도 맞지 않을 뿐 아니라 또한 실제에 있어서도 이 결정에 의한 우리의 독립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무릇 연합국이 일본과 싸운 것은 조선을 해방시켜 주기 위해서 싸운 것은 아니나 여하튼 우리가 왜적으로부터 해방된 것은 연합국이 승리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연합국 특히 미국에게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길과 그리고 연합국이 우리의 민주 독립을 원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38선을 철폐하고 남북을 통한 자유 선거에 의해서 민의가 반영된 정부를 수립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 날을 맞아 가일층 단결을 공고히 하는 동시에 결의를 새로이 하여 자유의 획득과 독립 전취에 일로매진합시다." (<동아일보> 1947년 8월 16일)
연합국이 "조선을 해방시켜 주기 위해서 싸운 것은 아니나 여하튼…" 하며 연합국에 대한 감사의 의미를 제한한 것이 지금의 상식에는 맞는 것이지만, 당시의 '해방자'에 대한 '무조건 감사' 분위기에서는 파격이다. 주체성 있는 발언이라고 칭찬해 줄 만한 것이지만, 그 이면의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연합국은 전쟁 수행의 목적이 자기네 국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 인민을 파시즘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데 있다고 표방했다. 공산주의자 중에는 소련에 한해 이 '해방자' 역할을 진심으로 믿는 사람이 없지 않았겠지만, 당시 사람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모든 연합국이 세계 인민을 위하는 착한 마음으로만 전쟁에 임한 것이 아님을 모를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 역할을 기꺼이 인정하고 '무조건 감사'를 표한 것은 연합국이 '해방자' 역할에 충실하기를 바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이제 이승만이 이 암묵적 합의를 깨고 연합국의 위신을 떨어뜨리는 발언을 한 것은 소련 입장을 비난하며 모스크바 결정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남북을 통한 자유 선거"가 올바른 독립의 길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자유 선거를 통한 주체적 독립. 민족자결의 원리에 맞는 좋은 길이다. 그런데 그 좋은 길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길이었는가?
이승만이 얘기한 '자유 선거'란 1946년 10월의 입법의원 선거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군정청과 경찰의 전면적인 좌익 탄압 속에 돈과 주먹이 난무한 선거, 선거 관리도 제대로 안 된 선거였지만 이승만은 더할 수 없는 만족을 표했었다. 1946년 11월 11일의 담화문 중에 이런 말이 있었다.
"입법의원 선거는 정식으로 되었으니 우리 민족이 다 축하할 것이다. 관선 입법의원은 불일내로 군정에서 발표가 있을 것인데 합작위원과는 하등 관계가 없는 것이요 군정당국이 한인 직원들과 협의하여 정한다니 또한 공정히 선택되기를 바랄 것이다. 애국남녀는 설령 불충분한 점이 있어도 그대로 세워가지고 점차로 교정하여 국권 회복만을 도모할 것이다." (<서울신문> 1946년 11월 12일)
더 중요한 문제는 조선에 개입하고 있던 두 연합국 중 미국만을 받들고 소련을 배척하는 길이 현실적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하는 것이었다. 소련은 점령 초부터 자기네에게 적대적인 국가가 조선에 세워지지 않기 바란다는 뜻을 공언해 왔다. 속셈을 감추지 않고 '공언'했다는 것은 자기네 영향을 일방적으로 받는 위성 국가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중립적 국가를 바란다는 뜻이었다. 당시 소련이 중국의 공산 혁명을 지원하지 않고 장개석 정부와 정상적 관계를 추구한 것을 보더라도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적극적 '적화 야욕'이 없었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모스크바 결정을 폐기하고 미군정-이승만 식의 '자유 선거'를 전 조선에 실시하자는 주장은 소련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북 지역에서 아무리 공정한 선거를 시행하더라도 그 갑절이나 인구가 많은 이남 지역에서 미군정-이승만 식 '자유 선거'를 실시한다면 반공 반소 국가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조선인이 '민족 자결'을 내세우며 연합국 외상 회담 결정을 파기하라는 주장이 소련 입장에서 어떻게 보였을까? 조선은 전쟁 중 일본 제국의 일부였다. 조선인의 역할 중 일본 제국을 도와준 것이 연합국을 도와준 것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적대 행위의 책임을 물어도 물을 만한 민족을 '일본 제국 해체'라는 큰 그림에 맞춰 너그럽게 봐주기로 한 것이다. 자기네는 선의의 '해방자' 노릇을 하면서 조선인도 알아서 협조적 태도를 보이기 바랐다. 10년 신탁 통치를 군소리 없이 받아들인 오스트리아인들처럼. 그런데 염치도 없이 '민족 자결'을 들고 나오고, 미국의 일방적 영향 아래 들어가겠다는 속셈이 훤히 보이는 주장이었다.
소련 입장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 소련이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이었다. 그렇다면 어떤 결과에 이르게 되는가? 전쟁 아니면 분단 건국이었다. 만족할 만한 정치적 진행을 겪고 있던 이북 지역을 소련이 자진해서 포기할 리는 없으니까.
조선인들이 아무리 찧고 까불어도 모스크바결정의 당사자들 사이에 협조가 굳건하다면 문제가 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난 2년 동안 미-소 간 대립이 심각해진 결과 소련을 봉쇄(contain)한다는 트루먼 독트린이 나와 있었다. 미국 스스로 조선에 관한 모스크바 결정을 뒤집고 싶어 하는 조짐이 뚜렷해지고 있었다.
미국에 40여 일 가 있다가 8월 7일 귀임한 러치 군정장관의 움직임이 이와 관련해 주목된다. 귀임 후 며칠간 두드러진 행동이 없던 러치가 8월 11일 입법의원에 선거법 처리를 재촉하는 편지를 보냈다.
입법의원에서는 보선법에 대한 지난 7월 20일부 헬믹 준장의 요청을 토의한 후 작보한 바와 같이 동원의 견해를 밝히고 대략 원안대로 할 것을 행정부에 전달한 바 있었거니와 러취 군정장관은 불원간 선거를 시행하기 위하여 급속히 헬믹 준장의 요청을 검토하여 달라는 요지의 서한을 11일부로 입의에 전달하여 온 바 있었다. 동 서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군정장관 대리가 입의에 재고를 요청한 제점은 중요한 것으로 믿는 바이지만 본관으로서는 동법을 속히 통과시켜 하루빨리 선거를 실시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군정장관 대리가 지적한 제점을 고려하여 수정할 점을 고쳐서 급속히 동 법안을 본관에게 보내주기 바란다." (<서울신문> 1947년 8월 14일)
이튿날 러치는 이승만과 김구를 만났는데, 그 취지도 선거법의 조속한 처리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선거법 회부 즉시 공포-민의의 입법부 창설-이, 김 양씨와 회담코 러 장관 언명"
조선에 관한 중대 임무를 띠우고 워싱턴에 갔다가 지난 7일 귀임한 러취 군정장관은 그 동안 기자단과의 회견도 하지 않고 시정 방침을 연구 중이던 바 12일 오전 중에는 이승만 오후에는 김구와 군정장관실에서 개별적으로 장시간 회담하였다 한다. 신빙할 만한 소식통의 말에 의하면 러취 장관은 양씨와의 회견 석상에서 미국시민들은 조선에 있어서의 선거법 공포 실시가 금일까지 지연되고 있음을 크게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과 동 장관 부재중 헬믹 장관대리가 입의에 통과된 보선법을 재고하라는 서간을 보내었는데 원의에 의해서 수정을 해오든지 원안대로 회부되든지 재회부되는 대로 보선법을 공포하여 하루빨리 민의에 의한 입법부를 세우겠다는 굳은 견해를 피력하였다 한다. (<동아일보> 1947년 8월 14일)
입법의원은 즉각 러치의 '지시'에 따랐다. 헬믹 군정장관대리가 7월 20일부 서한으로 재고를 요청했던 선거권자 연령 등에 대한 재고를 8월 12일 제128차 본회의에서 후다닥 해치우고 원안대로 가결해서 군정장관에게 송부했다. 입의속기록에서 아래와 같은 내용이 눈에 띈다.
1. 선거권자 연령에 대하는 선거의 경험과 훈련이 없고 처음으로 보선을 실시하는 조선의 현실로서는 23세를 선거연령으로 택한 것은 국정에 타당하다고 확신한다. 또 현시와 같이 정계와 사조가 혼란한 시기에 있어서 23세 이하의 청년층의 정치적 판단이란 건전하다고 단정할 수 없으므로 본원의 견해는 변함이 없다.
1. 자서(自書) 투표는 문자 해득 시험을 과하는 것이며 투표자 수를 제한하려는 것이라고 논하였으나 원래 우리 국문은 해득키 용이한 것이므로 결코 문맹층을 제한하여 투표에 참가치 못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이승만의 측근 로버트 올리버의 회고 중 1947년 7월 워싱턴에서 러치의 행동으로 이해하기 힘든 것이 있다. (<대한민국 건국의 비화>(계명사 펴냄), 128~130쪽)
자기의 최종 보고를 위해 워싱턴에 온 그는 리 박사와 하지 장군 사이의 정돈상 태를 깨려는 마지막 노력을 기울였다. 임병직 대사가 베푼 만찬에서 러치 장군은 정세를 논하며 내가 존 힐드링 국무차관보로부터 받은 다짐과 마찬가지로 미국 정책이 모스크바 협정으로부터 자주적인 한국인의 공화국 수립으로 전환하고 있음을 우리들에게 새삼 다짐하려고 최선을 다해 이야기하는 가운데 밤이 늦도록 시간을 보냈다. 그 다음날 7월 15일 러치 장군과 나는 리 박사에게 내가 보내야 할 한 통의 적절한 전문을 작성하기 위해 몇 가지로 고심하였다. 나의 서명을 받기 위해 러치가 작성한 첫 기초문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었다.
(…) 나는 러치 장군으로부터 그 본문을 거두면서 그에게 귀하가 초안한 것은 "썩 잘 된" 것이 아니니 내가 곰곰이 다시 생각해 보마고 말했다. 그 내용은 잘못된 것이 있는 반면 옳은 점도 역시 많았다. 신탁 통치를 반대하는 것은 리 박사와 다른 한국의 애국자들의 의무인 동시에 그만큼 하나의 권리이기도 하였다.
러치의 극우 성향은 업무 수행 자세에서 일관되게 드러난 것이다. 그런 그가 워싱턴 방문 중 이승만의 측근들과 깊은 접촉을 가지는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올리버가 이승만에게 보낼 전문의 초고를 대신 써준다? 맨입으로? 근거 없는 추측을 또 참기 어렵다.
올리버는 러치의 초고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자기 손으로 다시 썼다고 한다. 미국 정세에 관한 보고서였던 모양인데, 러치에게 이렇게 청했을 것 같다. 우리는 뜻이 같은 사이고 당신이 나보다 더 잘 아는 분야니까 당신이 써주면 고맙겠소. 러치가 쓴 초고는 버렸지만 사례는 그대로 했을 것이다. 그렇게 부탁하고 사례하는 과정을 통해 러치를 자기네 편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러치가 귀국하자마자 헬믹이 재고를 요청해 놨던 선거법을 즉각 처리해 달라고 서두르는 것 같은 유별난 행동을 그런 추측 없이는 이해하기 힘들다.
이승만은 미소공위 좌초에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7월 16일 제이콥스 미소공위 대표가 주선한 하지 사령관과의 만남이 결정적 계기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이 자신감은 8월 10일 우익 신문들의 '조선신문기자협회' 결성식 축사에서 한껏 드러난다. 이 협회의 위원장은 <동아일보> 고재욱 주필이었고 부위원장은 <민중일보> 이헌구 주필과 <대동일보> 이건혁 편집국장이었다.
이승만은 남조선 총선거를 주장하여 10일 조선신문기자협회 결성 대회 석상에서 대요 다음과 같이 연설하였다.
"우리는 국권을 회복하고 정부를 세워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뜻대로 만드는 것이 우리의 정부이지 미소공위나 만국회의에서 만드는 것은 우리의 정부가 아니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우리의 민의대로 총선거를 시행하자는 것이다.
38 이북은 그만두고 경상도 하나만이라도 독립하고 UN에 가입하여 국제적으로 말할 수 있게 되면 우리는 우리를 점령하고 있는 외국 사람들에게 물을 것이 많다.
미국 사람이나 소련 사람들은 우리를 위하여 싸운 것이 아니고 대세에 의하여 싸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루바삐 총선거를 시행하여 입법부를 구성하고 통일정부를 세워서 독립해야 한다." (<경향신문> 1947년 8월 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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