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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잡는 폭염, 에어컨 대신 '북극風'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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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잡는 폭염, 에어컨 대신 '북극風' 어때?

[김용언의 '잠 도둑'] 요른 릴의 <북극 허풍담>

요즘같이 더운 날 대체 뭘 읽어야 할지, 뭘 읽긴 해야 하는 건지조차 모르겠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책을 골라서 첫 장을 펼치는 그 순간마저도 귀찮아서 독서 효율이 제로로 수렴하는 요즘 같은 나날에, 무려 세 권짜리 책을 읽었다.

좀 가볍고 즐거운 책을 읽고 싶어서 제롬 제롬의 <보트 위의 세 남자>(김이선 옮김, 문예출판사)를 다시 읽을까 하다가, 한가로운 봄날 강물을 따라 유유자적한 여행을 즐기는(말하자면 그렇다는 뜻이고 실제로는 개고생의 르포르타주) 영국 유한 계급의 농담 따먹기를 읽으면 부아만 치밀어오를 거 같아서 포기했다. 대신 최근에 번역되어 출간된 요른 릴의 <북극 허풍담>(백선희 옮김, 열린책들 펴냄)을 꺼내들었다.

보이는 거라곤 빙하와 눈과 곰과 여우밖에 없는, 사시사철 눈 덮인 오두막에 머무르는 북극 사냥꾼들의 이야기다. <허풍선이 남작 뮌히하우젠>(고트프리트 뷔르거 지음, 염정용 옮김, 인디북 펴냄)을 좋아했던 이라면 충분히 즐겁게 읽을 책이다. 게다가 북극이다. 기후 변화 때문에 북극의 얼음이 급속도로 녹는 중이고 심지어 북극곰이 물에 빠져죽는다는 말도 안 되게 슬픈 뉴스들 때문에 마음이 심란하긴 하지만….

문제적 해였던 1994년 이후 처음 겪는 폭염이라는 요즘 같은 날씨에 북극이라니, 얼음이라니, 눈이라니. 또 다른 덴마크 작가 페터 회의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박현주 옮김, 마음산책 펴냄)만큼이나, 요른 릴의 <북극 허풍담>은 추위의 세세한 결을 이야기의 중요한 분위기로 적극 끌어들이면서 그만큼 선명해지는 인간의 감각에 대해 근사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해외 작품을 읽을 때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는 낯선 이름과 지명에 익숙해지느냐의 여부다. 특히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 년의 고독>(조구호 옮김, 민음사 펴냄)과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이대우 옮김, 열린책들 펴냄)에 나오는 이름들은 정말이지…작가가 내 눈앞에 있다면 울면서 제발 이러시지 말라고 애원했을 것 같은 그 기나긴 이름들은 독자들의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한다.

▲ <북극 허풍담 1 : 차가운 처녀>(요른 릴 지음, 백선희 옮김, 열린책들 펴냄). ⓒ열린책들
요즘 미스터리 분야에서 많이 출간되고 있는 북유럽 쪽 소설도 마찬가지다. <북극 허풍담>의 경우는 진입 장벽이 그나마 낮은 편이다. 일단 등장인물이 성을 붙이지 않은 채 이름으로만 등장한다. 이야기 전체가 수십 편의 짧은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열 명 남짓한 등장인물은 매번 돌아가면서 독립된 단편의 주인공과 조연들로 자리를 바꿔가며 등장한다. <북극 허풍담> 1권 '차가운 처녀'를 읽고 나면 2권 '북극의 사파리', 3권 '피오르두르의 은밀한 열정'은 문제없이 끝낼 수 있다.

열아홉 살 안톤은 대학 입학 자격증을 딴 다음 "거대한 모피를 두른 불굴의 사내들,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도에 남은 하얀 지역들을 채우려고 애쓰는 사내들, 전설적인 곰 사냥과 바다코끼리 사냥, 순진무구한 에스키모들과의 놀라운 만남" 등등을 상상하며 사냥꾼에 지원한 순진한 청년이다. 안톤이 '사수'로 모시는 밸프레드는 "평안히 잠이나 자고 퍼먹고 다시 잘 수만 있으면 행복해" 하는, 다시 말해 "약간의 먹을 것과 건강한 몸, 다시 자려는 의지만 있다면 어둠의 계절은 손에 맞는 장갑처럼 그에게 꼭 들어 맞"는 인물이다.

"예술가의 영혼을 지닌 낭만주의자" 헤르버트는 멋진 수탉 알렉산더를 애지중지 키우며 낚싯줄로 목줄을 만들어 함께 빙하 위를 산책한다.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로이빅은 2년 동안 방문객의 코빼기도 본 적이 없다. 비요르켄은 대화를 무한히 이어가는 나쁜 습관으로 주변 사람들을 질리게 만든다. 안경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반장님이 된 동료 '낯짝'은 비요르켄의 장광설을 참을성 있게 견뎌내고, 스웨덴인과 덴마크인 사이에서 태어나 이 세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자괴감에 시달리던 소심한 젊은이 라스릴은 북극에서 처음으로 마음의 평화를 찾는다.

한철 북극에 머무른 요엔손 씨는 탁월한 문신 재주로 사냥꾼들의 마음을 호려놓는다. 그리고 '아랫것들'이라 통칭되는 유럽과 그린란드를 이어주는 유일한 연락책인 식량 보급선 '베슬 마리' 호의 올슨 선장은 매해 여름 이곳을 방문할 때마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에 맞닥뜨린다. 요엔손 씨가 영감을 한껏 발휘했던 그해 여름, 모두들 문신을 자랑하기 위해 웃통을 벗고 앉아 해변에 쭉 앉아있자 올슨 선장은 소리를 꽥 지르며 한탄한다.

"웬 귀신 놀음이야! 빌어먹을 저 미술 갤러리는 다 뭐야?"

군인 출신 사냥꾼 한센 중위는 그린란드에서도 군대식 전술을 도입하려다가 전혀 원치 않는 사냥꾼들에게 철저한 북극 교육을 받고 온순해진다. 기지장 매스 매슨은 분위기를 띄우겠다는 일념으로 상상의 여인 '엠마'를 지어냈다가, "접근이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희귀한 폭탄 같은 것이어서 조심스레" 다뤄야만 하며 "모호하고 조심스러운 표현으로 암시"하는 편이 옳은 '여성'이라는 존재를 북극 사냥꾼들의 마음속에 심어놓음으로써 열병을 앓게 만든다.

레우즈는 그린란드 최초로 벽으로 둘러싸인 화장실(그전까진 개를 한 마리 데려가서 해결했다고)을 만듦으로써 선량하고 아둔한 동료 시워츠에게 "엉덩이로 섬세하게 대패질된 널판자를 느끼고 싶은 욕망"을 심어준다. "단순하고 구체적인 영혼"의 소유자, 아이슬란드인 사냥꾼 피오르두르는 오래전부터 불태워왔던 모종의 은밀한 욕망에 탐닉하고, 다른 사냥꾼들은 그 욕망의 정체를 알아내려 애쓰다가 결국 자기들까지 전염된다. (욕망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이후 독자들의 즐거움을 위해 이 자리에서 밝히지 않겠다.)

"저 아랫동네의 기름진 땅에서 생산되는 모든 작물로 곳간을 채우는 것보다 여기서 1년에 호밀 한 줌과 북극 감자 두 알을 수확하는 걸 더 좋아"하는 귀족 출신 사냥꾼 '백작'은 자신의 변호사 볼메르슨마저 "하느님, 저를 지켜 주소서. 제게는 이렇게 어리석어질 권리가 없습니다"라며 그린란드에 눌러앉아버리는 큰일을 저지르게끔 인도한다. 그리고 주둥이가 길어 슬픈 래시 정도는 그냥 집 지키는 바둑이 정도로 치부해도 될 만한 충견+명견 라반의 놀라운 활약담이 3권의 대미를 장식한다.

요른 릴의 <북극 허풍담>에서 가장 부러운 건 그 유머 감각이다. 사실 말로도 어렵지만, 글로 사람을 웃기는 게 더 힘들다고 생각한다. 표정이나 독특한 악센트나 제스처의 부가적인 도움 없이, 그냥 글씨 안에 숨겨진 생략과 과장과 반전의 효과만으로 사람을 웃겨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을 읽으면서 미친 듯이 웃었던 경우가 별로 없다. 앞서 언급했던 <보트 위의 세 남자>(속편 <자전거를 탄 세 남자>는 그것보단 좀 강도가 약했다)나 산악 코믹물 <럼두들 등반기>(W. E. 보우먼 지음, 김훈 옮김, 마운틴북스 펴냄) 정도? 그런데 <북극 허풍담>의 경우는 '이게 왜 유머 문학이라는 거야?'라고 툴툴거리며 읽다가 어느 순간 5분에 한 번씩 낄낄거리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말았으니.

이를테면 '사냥꾼의 자격' 편에서, 곰 사냥에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해 풀이 죽어 고국으로 돌아가려는 젊은 사냥꾼 라스릴을 위해, 동료 비요르켄과 낯짝은 작은 음모를 꾸민다. 비요르켄이 먼저 곰 한 마리를 쏘아 죽인다. 그리고 핏물을 잘 닦아내고 마치 포효하는 곰이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처럼 세워놓은 다음 라스릴에게 뒤처리를 맡기려는 식이다. 그런데 또 다른 곰이 그 자리에 등장한 게 사건의 발단이었다. 곰 두 마리를 연달아 쏘아죽인 라스릴은 환희에 차서 희생물을 보러 갔다가, 한 마리는 아직 따뜻한데 또 한 마리(그러니까 비요르켄이 먼저 죽인 곰)는 차갑게 굳어있는 것에 의문을 품는다.

"왜 뻣뻣하죠? 이상하지 않아요?""하나도 안 이상해. 우리가 방금 해체한 놈은 따뜻한 피를 가진 종류지만 이놈은 차가운 피를 가진 놈인 거지. 위험한 살인 곰들은 항상 피가 차가워. 너도 알다시피 인간들도 마찬가지야."
라스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난 늘 그냥 표현이 그런 줄만 알았어요."


그러니까 <북극 허풍담>의 웃음의 요체는 작정하고 말장난을 치거나 슬랩스틱 코미디를 구성하려는 데 있지 않다. 북극 생활을 실제로 경험한 작가의 간결하고 정확한 묘사들과 함께, 도저히 극복하거나 대적할 수 없는 대자연 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웃어넘길 줄 아는 인간군상의 너그러움에서 비롯되는 웃음이다.

등장인물과 배경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명이 전제되어 있다는 건 중요한 조건이다.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에 대해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특히 몇 개월 내내 밤만 지속되는 겨울엔 시간이 항상 너무 많기 때문에) 몇날 며칠 모든 가능성을 다 따져보면서 (중간 중간 눈을 쌓아 바람막이도 만들고 몸을 덥히기 위해 독주와 커피를 끓여 마시며), 연관된 다른 추억으로도 한참 빠져들고 짧은 지식으로나마 서로의 의견을 모아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는 사냥꾼들의 진지함이 유발하는 웃음이 억지스럽지 않다. 밸프레드의 말처럼.

"왜냐하면 여기서는 모든 게 웅대해지거든. 사람들도 웅대함에 익숙해지는데 (…) 항상 멀리 보는 사냥꾼이나 선원이 원시가 되고, 항상 코 아래 책을 놓고 사는 책벌레가 근시가 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지."

"라스릴, 이곳이 우리는 만물의 시초나 다름없어. 우리는 유인원들한테서 그다지 멀어지지 않았어. 빙하기에 거의 동일한 조건에서 사방을 뛰어다녔던 조상들 말이야. 우리는 그 상태로 되돌아가는 게 어렵지 않아. 사냥 정도나 하면서 실존을 만끽하고 있으니까. 그러니 우리는 완벽히 진화한 생물이기도 하지만 시초이기도 한 거야. (…) 우리는 역사의 중심에 서 있어. 우리는 긴 팔에 몽둥이를 든 선조들과 똑같은 걸음을 내딛고 있는 거야. 저 아래 사람들은 너무 꽉 끼는 신발을 신어서 굳은살이 잔뜩 생긴 발로 제자리만 맴돌고 있지."

<북극 허풍담>은 짧은 단편 여러 개로 구성되었지만 하나의 거대한 장편이라 해도 무방하다. 그 형식 자체가 그린란드와 무척 닮았다. 어쩌다보면 2년 넘게 단 한 명의 방문객이 없을 수도 있는 극도의 고독 속에서 "혼자가 되는 것. 세상과 동떨어져 인간이 거의 없는 연안에 혼자 남는 것, 오직 자신의 능력과 의지만 믿고 자기 자신의 주인이자 하인이 되는 것"에 익숙해져야 하는 장소.

"대개의 경우 고립은 경이로운 자유의 감정을 준다. 북극 지방은 생명력과 변화로 가득하다. 원소 말고는 장애물이 없고, 자연 말고는 섬길 것이 없으며, 사람들이 저들끼리 정하는 법 말고는 따로 법도 없다."

그리하여 누군가에게 어떤 사건이 터질 때마다 이틀씩 꼬박 개썰매를 타고 달려와야 하지만, 그것을 도저히 놓칠 수 없기 때문에 기를 쓰고 '열 네 명의 사내와 백여 마리의 개'가 무더기로 모여들어 각자의 의견을 왁자지껄하게 내놓는다. 그리하여 그 광대한 지역, 오랜 고독의 시간 속에서 띄엄띄엄 벌어지는 이야기들은 그린란드 자체의 이야기,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거대한 하나의 틀로 완성된다.

문제는 이 낯선 시공간, 낯선 감수성에 얼마나 쉽게 마음을 열고 다다갈 수 있는가의 여부다. "왜 잔치를 벌였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었지만 잔치가 즐겁기만 하다면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라는 자세를 견지한다면, 당신도 이 이야기-제목에 허풍담이라는 게 들어간다는 것이야말로 허풍스럽게 느껴진다. 나는 이 모든 이야기가 진담일 것이라 진지하게 믿는다-에 매혹되고 말 것이다.

비요르켄이 말했다. "저 친구에게는 상상력이 부족해"
시워츠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바로 그거야."
비요르켄이 두 손을 모으며 말했다. "그런 능력이 있었더라면 모든 게 잘됐겠지!"

몇 년 동안 여자 그림자도 볼 수 없는 북극에서 뭔가 참을 수 없는 갈망과 답답증에 시달리던 젊은 사냥꾼들이 점점 미치광이처럼 되어가자 "바지를 벗고 남동풍을 마주 보며 최대한 빨리 달려라"라는 얼토당토 않는 충고 한참 뒤에 이어지는 두 번째 충고는 이렇다.

"이렇다고, 안톤. 이렇게 지나간다니까. 남동풍을 마주 보고 달려야 하는 사람도 있고, 태양을 잡으러 달려가야 하는 사람도 있어. 그리고 술병 바닥에 남은 술로 위안을 삼을 줄 아는 우리 같은 사람도 있지. 효과만 있다면 어떤 방법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그리고 한참 뒤, 동일 인물 안톤의 동일한 고민을 다루는 '눈멧새' 편에서는 남동풍에 맞서 달리기보다 좀 더 본질적인 깨달음으로 향한다. 안톤은 자그마한 멧새를 통해 "이 거대한 북극 나라가 3년 동안 끈질기게 그의 앞에 펼쳐 보이고 있었던 자유"를 비로소 받아들이게 된다.

안톤은 북극의 삶이 그때까지 그가 알아 왔던 것처럼 발견의 연속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 그는 그 이상을 원했다. 밸프레드와는 달리 그는 똑같은 하루가 이어지는 걸, 그렇게 한 해가 끝날 때까지 똑같은 날이 이어지는 걸 받아들이지 못했다. (…) 저곳에서 그는 애쓰고 화내고 꿈꿨다. 혹독한 기후를 견디며 깊게 쌓인 눈밭에서 고집 센 개들과 함께. 여행은 악몽처럼 끔찍했지만, 정확히 그가 견딜 수 있을 만큼 끔찍했다. 안톤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예전엔 갇혔다고 느끼던 바로 그곳에서 그는 산이 보호해 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예전에 불가능을 얻길 꿈꿨던 그곳에서 그는 이제 불가능 없이도 행복하다고 느꼈고,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서 제집에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깨달음은 <북극 허풍담> 자체에 대한 나 자신의 감상이기도 하다.

1931년생인 작가 요른 릴은 19살의 나이에 그린란드 북동부 탐사에 참여했다가 그곳에 매료되어 16년 동안 머무르게 됐다. 사냥꾼이자 탐험가로서 성실하게 하루하루 살던 그는 동료들과 겪은, 혹은 동료들이 들려준 이야기들을 잊지 않기 위해 글로 기록했고, 그것이 우연찮은 계기에 책장수의 기이한 도움으로 출간되면서 그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됐다.

요른 릴의 작품 중 은 캐나다에서 영화화되었고, 2008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비포 투모로우>라는 제목으로 상영되기도 했다. <북극 허풍담>을 읽은 사람이라면, 작중 인물 중 안톤이 요른 릴 그 자신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게 될 것이다. 증거는 여기 있다.

"안톤 때문이야. 그런 걸 계산하고 있잖아. 일기를 쓰거든. 백작, 안톤이 갈겨쓴 게 완전히 바보 같은 건 아냐. (…) 그 친구가 쓴 게 솔직히 멍청하지는 않았어. 짧은 소설이었는데 꽤 복잡했어. 하늘색과 날씨와 사냥과 감정에 대해, 특히 감정에 대해 많이 썼더군. 거의 매일 한 쪽씩이나 감정 얘기가 있더라고."

<북극 허풍담>의 날개에 실린 출판사 측의 설명에 의하면 "4권 이후의 출간은 독자의 요청에 달려 있습니다"라고 한다. 출간 압박용 이메일 주소도 게재되어 있으니(sajangnim@openbooks.co.kr) 다들 주저 말고 한 통 씩 탄원 메일을 보내도록 합시다. 그런데…저 이메일 주소, 정말 사장님의 이메일 주소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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