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7월 30일
1946년 9월 말 미소공위 수석대표로 부임한 브라운 소장은 미군정의 어느 간부보다도 미소공위의 성공을 위해 성실히 노력하고 좌우 합작에도 열심히 협력한 인물이었다. 안재홍의 회고 중에도 미군 지도부의 협력이 필요할 때 브라운과 우선 의논한 일이 대목마다 보인다. 그런 브라운마저 7월 29일 과도 정부 부처장회의에서는 미소공위 전망을 어둡게 보는 태도를 보였다.
공위 미 측 수석대표 브라운 소장은 29일 오전 10시부터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개최된 부처장회의에 출석하여 약 1시간에 걸쳐 그동안의 공위 경과를 설명하는 동시에 미 측 주장의 정당성과 아울러 주장을 일보도 양보할 수 없다는 뜻을 말하였다 한다. 이에 모 부장은 "만일 금번 회의에서 양측의 합의를 얻지 못한다면 딴 해결 방법은 없는가?" 하는 질문을 하였던 바 브라운 장군은 "물론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끝가지 합의를 얻는 데 노력하겠다. 그러나 불행히도 합의를 얻지 못하는 일이 있다면 그때에는 또다시 마, 모 양씨 간의(양국 외상 간의) 협의에 옮기게 될 것이며 또 거기에서도 합의를 얻지 못한다면 UN에 상정시켜 해결지울 수밖에 없다"는 의미의 답변을 하였다 한다. 그리고 동 정무회의에서는 미 측 주장 지지를 결의한 다음 위원 5씨를 선출하여 성명서 작성을 위촉하였다 한다. (<동아일보> 1947년 7월 31일 "공위 불합의면 UN 상정-브 소장 부처장회의서 답변")
이승만 등 극우파에서 주장해 온 유엔 상정 가능성까지 이 자리에서 언급되었다. 당시 상황에서 유엔 상정이란 연합국 합의의 파기, 즉 현존하는 국제 질서의 포기라는 심각한 문제를 내포한 조치였다. 결성 단계에 있던 유엔이 다루기에 적합한 문제인지 여부도 합의되어 있지 않았다. 조선 문제의 유엔 상정은 유엔 운영에 대한 미국의 지배력을 확인하는 조치이기도 했다.
1947년 6월에서 7월에 걸쳐 미소공위에 대한 미국의 태도 변화가 본국 정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인상을 여러 각도에서 받는다. 7월 말 시점에서 브라운 대표의 부정적 태도 역시 본국의 지침 이외의 설명이 어려운 것이다.
미군정 간부들은 수시로 담화를 통해 제반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발표했다. 그런 공식 입장을 넘어 그들의 속생각을 알아볼 자료는 많지 않다. 그런데 7월 하순 조선을 방문한 미국 언론인단 일원인 얼 존슨 UP 부사장의 "조선 시찰기"가 눈에 띈다. 존슨의 견해는 미군정 간부들의 브리핑에 근거를 둔 것인데 그들이 조선 언론에 발표하는 공식적 입장보다 속내를 많이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UP가 극우적 관점을 많이 소개하던 매체라는 점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할 것이다. 유의할 대목에 밑줄을 그었다.
태평양을 건너고 일본을 거쳐 왕방한 우리들에게 미군 사령관들은 조선이 동양의 문제 지점이라고 말하였다. 우리가 서울에 도착하면서 이상 언명의 이유가 명백하여진다. 이는 공산주의자가 미국 군대 점령하의 지대에 혁명을 실현하려 하고 있다는 의구심에 입각한 것이다.
만일 여차한 사태가 일어난다면 미국군은 그곳에서 공산주의자와 투쟁하여야 할 것이며 그 결과 여하는 추측할 수 없다. 이런 불상(不祥)한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미군 사령관 존 R. 하지 장군은 그의 가족을 조선에 데리고 오지 않았으며 기타 육군 인원에게도 그들의 가족을 본국에 두라고 권하였다. 군대는 자리 없는 총을 휴행(携行)하고 철조망이 정원의 담을 싸고 있다. 유럽전 참가병은 서울이 그들이 그 지역에서 본 어느 곳보다도 전선같이 보인다고 말하였다.
가장 간단히 말한다면 조선 문제는 여하히 이 나라를 소련의 위성국이 되지 않고 조선인에게 반환하느냐에 있다. 제2차 대전이 끝날 때에 소련군은 북조선에 진입하여 38도선까지의 북부 조선을 점령하였다. 카이로와 모스크바의 연합국 회의에서는 조선이 "적당한 시기"에 독립을 향유할 것을 결정하였으며 미소 양군의 분할 점령은 일시적인 조치이다.
1945년의 모스크바 결정에 의하여 연합국은 조선을 임시 정부 하에 두고 최고 5개년간에 적당한 시기에 조선에 신탁 통치를 실시하고 조선이 독립을 획득케 하기 위하여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하였다. 이 위원회는 즉시 회의를 시작하였으나 최초에 있어 하등의 진전이 없었고 그 후에도 진전이 없다. 이제 이는 또다시 정돈 상태에 있다.
위원회의 투쟁은 460개의 조선 정당 단체 중 어느 것이 임시 정부 수립에 관련하여 위원회와 협의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미국 측은 소련 측에서 극좌 단체에 우선적 대우를 주어서 위원회 업무를 방해하려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위원회는 정당이 협의에 참가하기 전에 여하한 자격을 가질 것인가에 관하여 의견이 대립되고 있다. 조선인은 신탁 통치를 배격하고 있는데 그들은 신탁 통치가 일본인이 1910년부터 1945년까지 그들에게 부하한 예속적 지배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소련 측은 38도선 이북의 그들 점령 지역을 소련의 위성국으로 만들었다 한다. 북조선에는 약 1000만의 인구가 있고 美國 지대엔 약 1900만의 인구가 있다. 경계선 양측에 군사적 감시대가 있으나 북부의 공산주의자들은 수천 명의 우수한 사상 훈련을 받은 공산주의자를 남부에서 소요를 일으키는 데 현지의 동료들과 협력시키기 위하여 미국 지대로 보내고 있다. 이들은 경계선을 넘어 매일 소련 지대로부터 도망하여 온다는 피난민 이외의 것이다. 그들을 미국 당국은 장차 혁명의 위협을 줄 세력으로 보는 것이다. 미국 지대의 봉기는 주민이 자발적으로 일으킨 것 같이 보이나 실상은 이북에서 동 지대에 침투한 당 공작원에 의하여 조직 지도된 것으로 보인다.
이 정세에 또 한 가지 우려할 점은 소련이 20만의 조선인 군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경계선 이북에 남아 있다. 경계선 이남에서는 미군을 보충하는 군대가 전연 없으나 1만 명의 경비대와 2만8000의 경찰대가 있다. 이것은 이 빈궁하고 분열된 국가에 있어서의 세력 대항 상태이다.
조선은 중국 러시아 그리고 최후에 일본에 의하여 지배당하여 오던 40년의 역사에 있어 독립기념일을 가지지 않았다. 1945년에 그들은 해방 직전에 있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때부터 2년이 경과한 오늘 해방은 상금 요원한 것으로 보인다. 인민은 실망하고 싸움을 좋아하게 되었다. 현재 세계를 분할시키고 있는 2대 이데올로기 대립은 이 나라에 있어 분할 경계선 때문에 기타 어느 나라에서 보다도 현저한 초점이 되고 있다.
기타 5개국을 합한 것보다도 많은 정당으로 분열된 정치적 사상을 가진 조선인은 공산주의와 서방 민주주의 세력이 이 반도에서 공공연한 충돌을 행하게 된다면 혼란을 더욱 조장시킬 따름일 것이다. (<동아일보> 1947년 7월 30일, "공위 또 정돈, 공당은 소요 공작, 양 사상 대립의 초점, 국권 상실의 신탁은 배격")
소련과 공산주의자들의 의도에 대한 몇 가지 "의구심"이 두드러져 보인다. 그 의구심 중에는 "20만의 조선인 군대"처럼 허무맹랑한 것도 있고 이남에서 "혁명을 실현하려" 하고 있다는 것처럼 그럴싸한 것도 있다. 그러나 그럴싸한 것이라도 이남의 민중 봉기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이북에서 동 지대에 침투한 당 공작원"에 의한 것이라는 해석처럼 균형을 벗어난 것이 많다. 이런 과장된 의구심은 소련을 믿지 못할 상대로 규정함으로써 미소공위 파탄의 정당화에 필요한 것이었다.
미소공위에 직접 관계되는 문제로 "소련 측에서 극좌 단체에 우선적 대우"를 준다는 주장을 보자. "극좌 단체"의 기준이 무엇인가? 북조선인민위원회와 북조선민전 등 이북의 주축 단체들은 좌익 주도이기는 해도 통일 전선의 기본 성격을 가진 조직이었다. 결코 "극좌 단체"가 아니었다.
7월 16일 브라운 대표가 양국 간 합의가 되지 못하는 문제점들을 소상히 발표한 중에도 이 문제가 들어있지 않았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 문제에 대한 미국 측 주장은 입증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공식 회담에서 제기될 수 없었을 것이다. 미국 측이 그저 "의구심"으로 가지고 있어서 좌우 균형에 불안감을 품고 소련 측의 합리적 주장에도 동의하지 못하는 심리적 근거가 된 것이었을 뿐이다.
이북의 38개 단체가 미소공위 진행에 모두 협조적 태도였다는 사실은 이남의 수백 개 단체 중 미소공위에 비협조적인 극우 단체가 많았다는 사실과 대조되어 미국 측 입장을 당혹스럽게 만들었을 것이다. 미국 측은 이북 단체들의 미소공위에 대한 협조적 태도를 소련에 대한 협조적 태도로 해석하고 "극좌 단체"의 딱지를 붙임으로써 자기네 약점을 변명하는 구실로 삼은 것이다. 이남의 민중 봉기를 미군정의 실정에 대한 민중의 불만이 아니라 공산주의자들의 책동으로 보는 것과 같은 식의 억지 해석이었다.
소련 측이 반탁투위 가입 단체의 제외를 요구한 것은 합리적 주장이다. 6월 23일 시위에서 미소공위 반대 의사를 분명히 표명한 반탁투위에 가입한 상태에서 미소공위에 들어오겠다는 것은 무리한 주장이었다. 그 날 시위에서 소련 대표단에 대한 투석 여부에 대해서조차 미군정과 미국 대표단에서는 시인하는 것을 반탁 진영에 동조하는 것이 명백한 경찰 수뇌부는 부인하고 있을 정도였으니, 반탁 세력에 대한 미국 측의 단호한 태도가 미소공위 진행을 위해 꼭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미국 측이 극우 단체 배제에 동의하지 않은 것은 이북 단체들을 모두 "극좌 단체"로 보기 때문이었다. 공식적으로는 내놓을 수 없는 "의구심"을 일방적으로 가진 채 그를 근거로 몽니를 부린 것이었다.
존슨 시찰기 끝 문단의 "인민은 실망하고 싸움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대목에 눈길이 머문다. 시찰단 입국이 여운형 암살 사흘 후였으니 그런 측면에 관심이 끌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인에 대한 이런 관점을 미군정 간부들이 미국 언론인들에게 심어주고 있었다는 사실이 씁쓸하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조선 침략을 합리화하던 조선인관이 이제 미국의 조선 문제 개입을 정당화하는 데 쓰일 시점이 된 것이다.
바로 며칠 전 브라운 대표가 발표한 담화에서도 미소공위 성공을 기원하는 조선인의 마음이 느껴진다. 미국의 전략적 판단은 이런 민심을 무시한 채 옮겨가고 있었던 것이다.
앞서부터 농민 기타 각층에서 미소공위의 성공을 비는 뜻으로 양국 대표에게 식료품이며 옷감 미술품 등속을 선물하는 일이 빈번하여 일부 측에서는 마땅치 않게 생각하는 편도 있는 터인데 공위 미국측 수석대표 브라운 소장은 이에 관하여 그 호의는 감사하나 개인적으로 선물 받는 것은 매우 처치가 곤란하니 그만둬 달라고 26일 대강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미소공위 미 측 대표는 사회 각 단체와 개인을 위시해서 각 방면으로부터 많은 선물을 받았는데 이 대부분은 미술품이다. 이것은 조선 인민이 미소공위 성공을 열망하는 표현으로서 그 동기에 심심한 사의를 표하는 바이다. 그러나 미 측 대표는 이런 후의를 받기에 처지가 곤란하니 금후로는 이런 선물을 보내지 않도록 바란다.
그리고 미 측 대표가 받은 식료품은 고아원에 다시 선사했고 그 밖에 귀중한 물품은 남대문 국립도서관에 기증했는데 이 물품은 8월 1일부터 거기서 공개 전시하게 되어 있으며 이것은 미 측 대표의 기증품으로서 조선 민중의 영원한 기념품이 될 것이다." (<조선일보> 1947년 7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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