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4월 이승만이 축출될 때까지 남한은 국가의 틀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북한이 소련과 중국에서 받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원조를 미국에서 받고 있었지만 밑 빠진 독이었다. 권력자는 이권을 대가로 충성을 모으기 바빴다. 야당도 부정부패를 줄이자는 정도의 주장을 내놓을 뿐, 근본적 대안을 제시할 수 없었다.
1961년 5월 남한을 장악한 군사 정권은 반공과 경제 개발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둘 다 절실한 과제였다. 아직 냉전의 초창기였던 당시 상황에서 국가 존립의 필수조건인 미국의 후원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반공의 깃발이 필요했다. 그리고 경제적 자립은 진정한 독립을 위해 가장 요긴한 조건이었다.
경제 발전은 반공의 맥락에서도 중요한 문제였다. 전쟁 후 남북 대결은 군사 대결에서 경제 대결로 옮겨가고 있었다. 그런데 1950년 남한의 군사력 열세가 10년 후에는 경제력 열세로 되풀이되고 있었다. 전쟁으로 인한 파괴는 북한이 더 심했다. 그러나 북한이 회복과 발전을 위한 노력을 쌓는 동안 남한은 원조의 단물만 빨아먹으며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
남한의 서민 생활은 일제 말기와 큰 차이 없는 열악한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일부 특권층의 치부는 민중의 상대적 박탈감을 더욱 심하게 만들었다. 또한 미국 등 서방 국가들과의 접촉을 통해 경제 선진국을 선망하는 풍조가 팽배했다. (<밖에서 본 한국사>(돌베개 펴냄), 297~298쪽)
최근 몇 년간 한국 근현대사에 관심을 집중하고 지내면서 전체적 흐름에 대해서는 스스로 납득할 만한 설명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개별 사건에 대해서는 확실한 판단이 어려운 것들이 있다. 5·16 쿠데타가 그 중 하나다.
어제 <프레시안>에 실린 오홍근의 글을 읽었다. (☞관련 기사 : 박정희 '상습 쿠데타 기획' 공론화해야) 박정희와 박정희 정권에 대한 정확한 비판이 많이 들어 있고, 이 논설을 지지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한편, 반대할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중에는 정치적 이유의 맹목적 반대자도 있겠지만, 오홍근의 입장이 편파적이라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도 정확하지 못한 비판이 더러 섞여 있는 것 같다.
제목에 뽑은 "상습 쿠데타 기획" 얘기부터 그렇다. 박정희가 1952년과 1960년 초에 쿠데타를 계획한 일이 있다는 사실을 들어 그를 정치권력만을 넘보는 '쿠데타꾼'으로 규정하는 얘기인데, 그 두 시점의 상황을 감안해야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일이다. 전쟁 와중에 이승만 자신이 헌정 질서를 무너뜨렸던 1952년 그리고 인민의 불만이 한계를 넘어서고 있던 1960년 초에 정말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면 "구국의 혁명"으로 평가받을 측면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쿠데타는 1961년 5월에 일어났는데, 그 시점은 쿠데타가 정당화될 수 있는 시점이었던가? 정당화될 측면이 꽤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쿠데타의 충격 없이는 당시 정권의 의지와 역량이 주어진 상황을 헤쳐 나가기에 부족한 문제가 많았다.
최근 2년간 해방 공간의 사태 전개를 들여다보면서 대한민국이 대단히 많은 모순과 문제점을 안고 태어난 국가라는 생각을 절실하게 한다. 모순과 문제점은 1950년대를 통해 해소되기는커녕 더욱더 확대되었다. 이승만 한 사람과 그 추종자 몇몇을 제거하는 정도로 의미 있는 '혁명'이 이뤄질 수 없는 것이 1960년의 한국 상황이었다.
해방 조선의 인민이 바란 것은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의 실현이었다. 여기서 민주주의는 자유보다 평등, 특히 사회 경제적 평등에 중점을 두는 사회주의 성향의 민주주의였다. 기득권층으로 구성된 한국민주당과 정상배 이승만의 세력이 손을 잡고 미국의 후원 아래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억누르며 세운 것이 대한민국이었다.
외세에 의존한 이승만 정권은 민심을 억압의 대상이나 농락의 대상으로만 여겼다.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지키며 민심을 받들려는 사람들은 야당의 자리에조차 설 수 없었다. 감옥과 무덤만이 그들의 자리였다. 야당 자리는 한민당을 뿌리로 하는 민주당이 차지하고 민심을 농락의 대상으로만 여긴 것은 이승만 정권과 다름이 없었다. 민주당이 대통령 후보로 내세운 신익희와 조병옥의 행적을 세밀히 살펴보며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민족주의자로서도 민주주의자로서도 평가받을 여지가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정치가다운 정치가로서 모처럼 무대에 나섰던 조봉암의 운명이 당시 상황을 여실히 보여준다.
억눌렸던 민심이 1960년 4월 터져 나와 이승만을 몰아냈지만 그 빈자리를 메운 세력도 도토리 키 재기였다. 민주당 정권이 이승만 정권보다 낫게 보이는 점이 있다면 민심의 드러낸 이빨을 보았기 때문에 더 조심했기 때문일 뿐이지,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절차적 민주주의를 넘어선)의 실현을 위한 의지가 없었다. 10여 년간 억눌려 있던 민심도 분노만을 표출했을 뿐, 민족과 국가의 지향점에 대한 뚜렷한 인식을 미처 빚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민주당 정권이 혼란을 벗어나지 못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한편, 냉전의 압력과 물질적 근대화의 과제가 어떤 질서든 질서의 확립을 요구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쿠데타를 통해 식민지 시대 말기와 같은 형태의 질서를 대한민국에 복원했다.
이 쿠데타를 "구국의 혁명"이니 "최선의 선택"이니 옹호하는 박근혜의 발언이 물의를 빚고 있는데, 미시적으로는 일리 있는 말이다. 쿠데타 시점에서는 질서 확립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었다. 질서만 세워놓고 다른 폐단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구국의 혁명"이란 표현도 무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세워놓은 질서라는 것이 구시대의 질서였다는 데 거시적 문제가 있다. 해방된 민족이 간절하게 바라던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는 더욱더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박정희의 쿠데타는 일시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공로를 세웠지만 한국 사회를 시대를 역행하는 길로 이끌었다. 감기를 낫게 해준다고 마약에 중독시킨 셈이다.
ⓒ프레시안 |
박정희 정권이 경제 성장에 공을 세운 점 하나는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이들에게 타이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인적, 물적 자원 조건이 한국과 비슷한 나라들과 비교해볼 것을 권한다. 1960년에서 1990년까지 30년간 이 나라들의 총 경제 성장은 모두 한국과 비슷했다. 한국과 같은 기반 조건을 가진 나라들이 그만한 경제 성장을 이룰 시대적 조건이 그 기간에 존재했던 것이다. 박정희 정권과 같은 독재 정권의 존재가 경제 성장의 필요 조건이 아니었다.
이승만 정권은 한국을 형편없이 망쳐놓았다. 그 출발점이었던 해방 직전의 질서라도 복원시킨 것은 박정희 쿠데타의 공로다. 그 시대착오적 노선을 1~2년 정도 적용하는 것은 새 출발의 동력을 얻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4~5년 정도 권력을 잡고 버텼다면 "공과가 반반"이란 말을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구 집권을 꿈꾸며 18년이나 매달려 있었던 것은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의 발전을 가로막은 범죄였다.
오홍근은 "상습 쿠데타 기획"과 함께 박정희의 친일 문제와 남로당 경력을 비판 대상으로 지적했다. 친일 행적은 감출 수 없이 드러난 문제인 반면, 남로당 경력은 박정희 추종 세력이 끈질기게 감추거나 얼버무리려 해온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이것을 믿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짐 하우스만의 증언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을 것이다. 하우스만은 1949년 당시 미 군사고문단 참모장이었고, 1981년까지 미 8군사령관 특별고문으로 있으면서 한국 국방 정책에 엄청나게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나는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이 숙군 작업이 얼마나 잘 엄중하게 처리되고 있는가에 대해 1일 보고를 하도록 명령받고 있었다. 나는 그때 신성모 국방장관, 윌리엄 로버트 고문단장 등과 함께 수시로 이 대통령을 만나고 있었다. 박정희 피고의 형 집행을 면죄해 줄 것을 이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그 이유로 나는 그가 일본 육사 출신으로 모스크바 공산주의자는 아니며, 군의 숙군 작업을 위한 군 내부의 적색 침투 정보를 고스란히 제공한 공로를 들었다.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짐 하우스만·정일화 지음, 한국문원 펴냄), 34쪽)
그러나 나는 박정희의 친일-좌익 경력에 지나친 무게를 두는 데 반대한다. 그의 친일-좌익 경력, 그리고 체포 후의 배신행위는 그 인간성의 이해를 통해 쿠데타와 독재 정치의 성격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그 자체에 '역사적 평가'의 대상이 될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쿠데타와 독재 정치는 그 자체로 평가되고 비판받아야 한다. 주변적 요소에 너무 치중하면 '인격 살인'의 반론 때문에 정작 중요한 논점이 흐려질 염려가 있다.
박정희의 유산에 대한 박근혜의 고뇌가 보이지 않는다는 오홍근의 지적에는 전적으로 찬성한다. 정수장학회에 대한 박근혜의 "눈 가리고 아웅" 식 대응은 철저한 기회주의자의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아버지의 유산 중 자산은 이용하고 부채는 외면하려는 기회주의자다.
그런 박근혜가 정두언의 체포 동의안 부결 후 "정두언 의원이 직접 책임지고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뉴스를 보며 과연 그에게 "책임"이란 말이 무슨 뜻을 가진 것인지 의아한 생각이 든다. 정두언이 무엇에 책임을 지고 무엇을 해야 한다는 말인가? 동의안 부결은 정두언이 아니라 새누리당이 한 짓인데, 입증되지도 않은 혐의에 책임을 지란 말인가? 자기 동생 박지만이 물의를 일으켰을 때 잡아떼던 태도와 대비시키는 논평이 꼬리를 물고 있거니와, 박근혜는 "책임"이란 것에 대해 극히 주관적인 관념을 가진 것 같다.
박정희의 유산에 대한 상반된 태도가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채 격돌을 계속하고 있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과거에 대한 이 사회의 시각이 정리되지 못하고 있으니 미래에 대한 전망도 확실히 세우기 힘든 것이다. 그 딸인 박근혜가 아버지의 유산에 대해 너무 치우친 시각을 갖고 정치에 나선 것이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 같다.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부탁이 닭 한 마리 값 갚으라는 것이었다. 한 세상 살고 가면서 세상에 남긴 빚을 먼저 걱정하는 것이 훌륭한 사람의 자세다. 박정희가 남기고 간 빚을 박근혜가 잡아떼기만 한다면 후세에 남는 박정희의 평판은 더욱 나빠질 것이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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