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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보다 '바리스타'가 더 위대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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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보다 '바리스타'가 더 위대한 이유?

[프레시안 books] 브라이언 크리스찬의 <가장 인간적인 인간>

비슷한 듯하면서도 미묘하게 다르게 쓰이는 단어가 '지능'과 '지성'이다. 너무 까탈스럽게 구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문학과지성사를 '문학과지능사'라고 하거나 현대지능개발사를 '현대지성개발사'라고 하면 어떤가? 적어도 그 출판사들을 아는 사람들은 피식거리며 웃을 것이다. 우리는 두 단어를 구별한다. 저명한 학자에게 '위대한 지성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라고 하지 않고 '위대한 지능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라고 하면 아무래도 비아냥으로 들린다.

지성이 근대 철학의 용어라면 지능은 현대 심리학의 용어다. '지성'은 처음부터 인간의 불가분하고 독점적인 속성으로서의 지적 이해력과 분별력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고, 지금도 어느 정도는 마찬가지다. 반면 '지능'은 인간의 두뇌에서 처음 발견된 특정한 기능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것은 주어진 환경을 파악하고 그에 대응하여 적절한 행동을 도출하는 일련의 정보 처리 과정으로서, 다른 생물학적 기능들과 마찬가지로 19~20세기에 인간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왔다.

덕분에 우리는 '침팬지의 지능'에 대한 연구 논문이나 '인공 지능'을 구현하는 기계 장치들을 가지게 됐다. 그러나 누군가 침팬지의 지성을 주장하거나 인공 지성의 존재를 긍정하면 대번에 복잡하게 뒤엉킨 논쟁에 휘말릴 것이다. 지능과 달리, 지성은 여전히 인간에게만 허락된 신비로운 가치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브라이언 크리스찬은 <가장 인간적인 인간>(최호영 옮김, 책읽는수요일 펴냄)에서 바로 그 신비로운 가치를 되도록 신비롭지 않은 방식으로 규명하려고 시도한다. 지능을 기계화하여 정신 노동을 대체하는 경향이 급증하고 있는데도 여전히 '인간 고유의 지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우리를 본떠 만들어진 인공 지능 시스템들이 날로 발전하는 가운데, 지적 능력을 가진 존재로서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를 어떻게 갱신해야 할까?

▲ <가장 인간적인 인간>(브라이언 크리스찬 지음, 최호영 옮김, 책읽는수요일 펴냄). ⓒ책읽는수요일
말하자면 이런 것이 저자의 질문 거리다. 그는 '뢰브너 프라이즈(Loebner Prize)'라는 기묘한 인간성 테스트를 통과한 경험을 토대로, 지능을 기술적으로 구현하려는 그간의 노력을 추적하고 인간 지성의 미래를 타진한다.

1991년에 시작된 뢰브너 프라이즈는 쉽게 말해 인간과 컴퓨터의 입담 대결이다. 심사위원단이 정체를 숨긴 대화 상대와 5분간 채팅한 후, 상대방이 인간 참가자인지 자동 채팅 프로그램인지 판단하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많이 인간으로 오해받은 프로그램은 '가장 인간적인 컴퓨터'의 영예를 누리고, 가장 적게 기계로 오해받은 인간은 '가장 인간적인 인간'이라는 타이틀을 얻는다. 짐작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 지성이든 지능이든 지식이든 간에 어떤 지적인 면을 어쭙잖게 뽐내려다간 자칫 '가장 컴퓨터 같은 인간'이라는 오명을 쓰기 십상이다.

이러한 상황은 뢰브너 프라이즈의 원형인 소위 '튜링 테스트'와 묘한 대구를 이룬다. 튜링 테스트는 1950년에 영국의 수학자 앨런 튜링의 논문에서 제시된 개념이다. 당시 튜링은 인공 지능을 연구하고 있었는데, 아직은 '지적 능력이 있는 기계'라는 생각 자체가 형용모순으로 여겨지던 때라 용어를 정의하고 논의를 진행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차선책이 '지적 능력을 가진 인간과 동일한 행동을 보이는 기계'를 가정하는 것이었다.

기계가 인간의 대화에 참여하여 다른 인간과 구별되지 않는 퍼포먼스를 보여준다면, 어쨌거나 그 기계는 지적 능력이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나, 그럼 이제 그 기계가 구체적으로 어떠해야 할지 생각해 보자. 이것이 튜링의 논법이었고, 튜링 테스트의 원래 맥락이었다.

다시 말해 튜링 테스트는 인간이 지적 능력의 유일무이한 실제 사례였을 때 그에 준하는 능력을 기계를 상상하기 위해 고안된 개념이었다. 인간 같은 기계, 인간처럼 사고 능력이 있는 기계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반면 뢰브너 프라이즈에서 튜링 테스트가 실제 경연으로 탈바꿈했을 때는, 이미 기계적인 정보 처리 시스템이 다방면으로 상용화되고 있는 시점이다. 지적 능력은 더 이상 인간다움의 동의어가 아니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스타트렉> 시리즈의 논리적인 외계 종족 벌칸 성인은 고도의 지성체지만 인간적이지 않다고 여겨진다. 오히려 그것은 '컴퓨터 같다.' 인간 참가자든 컴퓨터 참가자든, 뢰브너 프라이즈에서 수상권에 들려면 이런 '컴퓨터 같음'을 효과적으로 회피해야 한다.

부조리, 변덕, 실수, 비격식적인 태도, 원어민 특유의 변칙적인 언어 구사력, 개인의 구체적 역사, 감정적 역동성, 심층적 감상, 이런 것들이 역대 '가장 인간적인 컴퓨터'가 공략했던 '인간미'의 사례다.

전통적으로 인간 지성의 특징이라기보다 인간의 동물적 결점이나 한계로 여겨졌던 것들도 많이 보인다. 이제 인간은 유일한 지성적 존재의 지위에서 내려와 이국적 매력이 넘치는 동물계의 일원으로 돌아오려는 것일까? 저자는 뢰브너 프라이즈에서 '가장 인간적인 인간' 타이틀을 획득하기 위해 연구를 계속하면서 이러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한다.

문제는 인간 아닌 것과의 차이를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소중한 가치를 지키고 인간의 잠재성을 충만하게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주지하면서, 저자는 우리가 인공 지능과 대면함으로써 인간적 가치 또는 인간적 지성을 더욱 구체적으로 계발할 수 있다고 말한다. (역서에는 빠졌지만, 이 책의 원래 부제는 '인공 지능이 우리에게 살아있음에 관해 가르쳐 주는 것들'이다.) 그에 따르면 문제는 '기계냐, 인간이냐' 또는 '지성이냐, 개성이냐'가 아니라 인생의 가치를 북돋우는 새로운 지성의 모델을 개발하고 발전시키는 것이다.

인공 지능과 근대 철학의 역사, 컴퓨터 같은 사람들과 컴퓨터를 넘어선 사람들의 사례를 두루 살피면서, 저자는 근래의 인류 문명을 지배했던 좌뇌 중심주의의 한계를 역설한다. 언어 구사와 논리적 사고를 담당하고 불확정성과 불가지성의 최소화를 지향하는 좌뇌의 작동 패턴이 지성 그 자체로 여겨지면서, 인공 지능뿐만 아니라 인간 정신과 사회 전반이 환경 통제와 매뉴얼화된 상호 작용에 의해 결정론적으로 재구축되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모델 하에서는 인간 지성이 오히려 활력을 잃게 된다고 비판하면서, '과거 체스 게임의 족보를 낱낱이 연구하여 이미 그 결과가 예측된 행마만을 답습하는 체스 선수'의 예를 든다.

그렇다면 반대항으로는 누가 있을까? 이를테면 이 책에는 인간 체스 챔피언 게리 카스파로프와 IBM의 딥블루 컴퓨터의 대결이 한 장에 걸쳐 소개되는데, 그 와중에 "말의 행마를 산출하는 3만 6천 개의 딥블루 트랜지스터를 직접 손으로 설계했다"는 전기공학자 슈펑슝의 이야기가 잠깐 나온다. 하지만 슈펑슝의 비상한 능력은 저자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오히려 저자가 반복해서 이끌리는 사례는 평범한 바리스타다. 그는 커피를 내리고 서빙하고 정리하고 손님과 잡담을 나누면서 매 순간 주어진 상황에 창의적으로 대응한다. 그것은 좌뇌와 우뇌가, 나의 뇌와 당신의 뇌가 협력하여 유연하고 섬세하게 반응하며 미묘한 차이들을 생성하는 감응적인 지성을 보여준다.

저자는 '살아있음'을 근본적으로 선물, 또는 거의 신학적인 은총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듯하다. 그러니까 '지성'은 인생이라는 멋진 선물의 핵심이자 가장 달콤한 부분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사색과 성찰, 지적 분별을 순수한 즐거움의 원천으로 여겼던 고대 그리스 철학의 업데이트 판 같기도 하다.

여기서 저자가 생각하지 않는 것은 이를테면 이런 질문이다. 평범하고 사람 좋은 인상의 바리스타가 맛있는 커피를 내리는 길모퉁이 작은 커피집이 지속적이고 일반적으로 존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제도적인 장치가 전제되어야 하고 얼마나 많은 불확실성이 수작업적으로 해결되어야 하는가? 우리의 '살아있음'이 얼마나 근본적인 수준에서 우리 스스로 만든 인공적 환경의 연약한 확실성에 의존하고 있는가?

개인의 수준에서든 사회의 수준에서든, 지난 세기에 세계의 일부 지역에서 적당히 따분하고 안전한 생활을 보장하는 데 성공했던 일련의 매뉴얼들은 그 자체로 엄청난 지적 창의력과 무자비한 혁신, 얼마간의 운이 작용한 결과였다. 굳이 거슬러 올라가자면, "나는 '해결된' 인생을 원치 않으며 '해결 가능한' 인생도 원치 않는다"라고 말할 수 있는 저자의 당당함 역시 저 고루한 근대적 지성에 얼마간 빚지고 있다.

이제 오래된 매뉴얼들과 점점 아귀가 맞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새로운 세기의 한가운데서, 우리는 정말로 새로운 지성, 또는 지능, 여하간 지적 능력을 창안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저자는 어떠한 경우라도 인간이 자신의 인간다움을 더욱 발전시키면서 한층 더 고귀하고 놀라운 지성적 존재로 계속 거듭날 것이라고 기대한다. 나 역시, 그렇게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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