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테스처럼 혼전 성관계를 통해 사생아를 출산한 '부정한' 여자가 목사의 아들과 결혼한다는 행복한 결말이란 빅토리아 시기 독자들의 상식을 정면으로 위반한 것이었고, 누구도 출판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팔리지 않을 것이 뻔한 데다가 자칫하면 출판사의 이미지에 큰 타격을 받게 될 노릇이었으니까. 하디는 여러 출판업자와 접촉하였고 계약했다가 파기되기도 했다. 물론 하디라고 독자들의 반발을 의식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래서 결혼과 동시에 두 사람을 브라질로 보내버렸다. 하지만 이런 정도의 절충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끝내 테스는 죽는 것으로 처리되어서야 출판될 수 있었다. 테스를 죽인 것은 대중들의 편견이었다.
▲ 하디의 <테스>를 원작으로 한 로만 폴린스키 감독의 <테스> 포스터. |
한국에서도 물론 이런 보기는 적지 않다. 한국 최초의 근대소설이라는 이광수의 <무정>부터가 그랬다. 이광수의 <무정>은 매일신보에 연재되던 중에 독자들의 편지에 의해 구성이 바뀌었다. "영채가 너무 불쌍하다" "영채를 이대로 죽일 것이냐" 하는 편지가 쇄도하자 이광수는 그를 살리기로 한다. 독자들은 테스를 죽이고 영채를 살렸다. 그뿐 아니라 작품 자체를 '죽이기도' 했다.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던 이상의 <오감도>는 정신이상자의 작품이라는 독자의 항의에 못 이겨 연재가 중단되었다. 이상은 연재중단 이후 이런 글을 남겨 유감을 표명했다.
"왜 미쳤다고들 그러는지 대체 우리는 남보다 수 십 년씩 떨어지고도 마음 놓고 지낼 작정이냐. 모르는 것은 내 재주도 모자랐겠지만 게을러빠지게 놀고만 지내던 일도 좀 뉘우쳐 봐야 아니 하느냐. 여남은 개쯤 써 보고서 시 만들 줄 안다고 잔뜩 믿고 굴러다니는 패들과는 물건이 다르다. 이천 점에서 삼십 점을 고르는데 땀을 흘렸다."
그렇다. <테스>와 <무정>과 <오감도>에서의 검열은 국가검열이 아니라 민간검열이다. 독자들의 독서취향과 도덕적 판단 기준, 그리고 이를 반영하여 출판 여부를 결정짓는 출판 자본은 작가 쪽에서 본다면 검열 권력으로 작동한다. 원론적인 의미에서 검열의 주체는 권력이나 자본이고 객체는 발신자와 담론 그리고 수용자이지만, 역방향의 검열, 즉 수용자에 의한 검열도 없지 않다.
독자의 검열이 국가검열을 촉발하기도 한다. 김동인은 검열관이 무사통과시켜 출판된 작품을 독자가 읽다가 문제를 제기하는 수도 있으니 검열관도 가능한대로 엄격하게 검열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실제로 수필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의 번역자로 널리 알려진 김진섭이 일제의 검열에 걸린 경우는 좋은 보기이다. 그는 해외문학파로 소위 순수문학론자였으므로 검열과는 별 관련이 없었다. 문제가 된 원고(<매일신보> 1940년 1월 6일자)만 해도 경무국의 공식검열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나중에 그 글을 읽은 헌병대 간부가 반전(反戰) 사상의 혐의를 제기해 재검열을 받고 직장을 그만두는 등 고초를 겪었다.
검열관마저도 다시 검열당하는 상황. 푸코는 판옵티콘(원형감옥)을 이야기하면서, 감시가 내면화되면 간수가 없더라도 수인들은 규칙을 철저하게 지키게 된다고 말한 바 있다. 김진섭의 경우라면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간수의 자리는 텅 비어 있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다. 죄수들은 자기 스스로를 감시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죄수끼리 서로 감시하기도 하며, 나아가 죄수가 간수를 감시하기까지 하는 시스템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수용자에 의한 검열은 자칫하면 만인의 만인에 대한 감시체제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 '반응' 때문에 엔딩을 바꾼 <신들의 만찬>. ⓒMBC |
전통적인 문학양식에서도 수용자가 중시되는 새로운 시도들이 나온다. 예컨대 사이버 소설(또는 하이퍼 소설)에서는 독자들이 여러 줄거리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나감으로써 다양한 소설이 만들어지고 수용된다. 이제 수용자는 '레디 메이드' 상태로서의 예술을 그저 수용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예술을 만들어나가는 하나의 주체로 등극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수용자 대중이 작품을 죽이고 살리는, 또는 함께 만들어나가는 현상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작가 쪽에서 볼 때는 명백한 검열의 효과를 불러오지만, 수용자 쪽에서라면 어떤가. 작가가 만들면 대중들은 무조건 수용해야만 한단 말인가. "이러이러한 것은 위대한 작품이니 너희들은 무조건 숭배하라"고 말하면, "네 알았습니다" 하고 알아 모셔야 한단 말인가.
물론 그렇지는 않다. 누구도 당신에게 이런 작품은 훌륭한 것이니 꼭 감상하라고 강제할 수는 않는다. '테스는 순결한 여인'이라고 말하면 알아 모시고, '영채=낡은 세계관의 상징은 죽어야 한다'고 말하면 '네 알았습니다' 대답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강제가 일어날 때 문화는 독재자를 위한 도구로 전락하게 된다. '내선일체 작품을 읽고 독후감을 쓰시오, 건전가요를 부르시오, 대한뉴스를 보시오' 등의 사례에서 질리도록 보았듯이.
오히려 검열이란 전통적으로 엘리트 중심주의적이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 검열이란 '무지한 대중'이라는 인식을 전제로 삼는다. 문화의 정도가 낮은 대중(조선인/노동자/무학자/여성/아동 등으로 변주되는 숱한 이름을 통칭하는 의미에서의 대중)들에게 제공되는 정보는 늘 제한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일본인은 괜찮지만 '조센징'은 민도(民度)가 낮아서 안 된다, 여성과 어린이('아녀자'!)에게 제공해도 좋은 정보는 최소화되어야 한다, 노동자들이 알면 사회 혼란을 일으킬 우려가 있으므로 곤란하다, 대학교수들이 연구 목적으로 북한 문학을 읽는 것은 괜찮지만 대중들에게는 불허한다, 뭐 이런 식이었다. 모든 정보를 수집한 뒤에 선별적으로 공개하겠다는 것. 그 권리를 권력이 쥐겠다는 것이다.
근대 국가는 거의 모두가 검열 금지의 원칙을 채택했다. 이는 자유로운 개인의 자기결정권에 대한 신뢰에 기반을 두는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수용자들이 예술작품에 대한 수용 여부를 스스로 결정하는 일은 당연하다. 그러나 자기결정권은 책임이 뒤따른다. 그 주요한 책임 중의 하나는 타인의 결정권에 대한 존중인데, 이는 단지 타인의 결정에 대한 개입의 금지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결정을 숙고하여 자신의 결정에 참고하는 열린 자세 역시 그 존중의 주요한 덕목이다.
우리는 이미 지니고 있는 세계관과 미의식을 좀처럼 바꾸지 않는다. 반면 예술가들은 그 고정관념에 충격을 가하고 새로운 세계관이나 미의식을 전파하고 싶어 한다. 하디는 순결에 대한 고정관념을, 이광수는 봉건적 세계관을, 이상은 봉건적 미의식을 각각 파괴하고 싶어 했지만, 대중들은 이에 반발하고 거절했다.
이 갈등에서 일방적으로 어느 한 쪽이 승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봉건시대의 수용자들이 지나치게 수동적이어서 문제였다면, 요즘의 수용자들은 지나치게 능동적인 것은 아닌지. 그리하여 새로운 가치관과 미의식을 수용하기를 거부하는 성향이 두드러지게 되는 것은 아닌지. 자기결정권이 아집으로 화석화된다면 어떤 진전도 불가능해진다. <조선일보>는 제 홀로 <조선일보>의 위력을 지닐 수 있는 게 아니라, <조선일보>의 이념과 다른 주장에 대해 귀를 틀어막는 무수한 독자들의 고정관념 때문에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믿음에 충격을 가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거부하거나 심지어는 적개심만을 보이는 사람들을 고슴도치형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고슴도치들은 낯선 것을 위협이라고 간주하고 가시를 곤두세우며, 또한 첫 주인에게 길들면 좀처럼 다른 주인과 친해지기 어렵다고 한다. 이러한 고슴도치형 인간은 자기결정권을 바람직하게 행사하고 있다고 인정하기 어렵다.
고정관념을 깨는 일은 혼자서는 어려우니 대화가 중요하다. 하버마스가 강조하는 '상호소통적 이성'이라는 것. 특히 인터넷 공간은 인류가 발명한 어떤 공간보다도 효율적으로 상호 대화를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하버마스의 가치는 돋보인다. 하지만 대화란 지상선인 것은 아니어서, 대화를 통해서 오히려 고정관념이 증폭되기도 한다. 정보가 폭증하다보니 선별해서 들어야 할 터인데, 그때 흔히 사용하는 선별의 기준은 듣고 싶은 것만을 골라서 듣는 방식에 그치는 것이다. <조선일보> 독자들은 <조선일보>만 읽고, 황순원의 <소나기>의 애독자는 <소나기>만 본다.
고정관념에 대한 도저한 도전은 예술의 덕목 중 하나이다. 진정한 예술이란 늘 전위적이고, 김수영의 말대로 늘 '불온'하다. 상식이란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것들을 '상식'에 포함시키는 일을 훼방 놓기도 한다. '불온'이 없는 상식은 부패하며, 상식이 없는 불온은 위태롭다. 불온을 통해 그 상식의 공고함에 균열을 내는 행위는 충분히 보장되어야 한다. 자신의 세계관과 미의식에만 오로지 의존할 때,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자세가 없을 때, 우리는 상식의 독재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 때 수용자는 예술에 대한,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검열관이 되어버린다.
최근의 애국가 논쟁 역시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애국가 대신에 민중의례를 하겠노라는 주장은 물론 상식에 어긋난다. 하지만 왜 이런 주장을 하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들어보기조차 거부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애국심이 파워엘리트에 의해 악용되고 오히려 대다수 국민들이 소외당하고 있다는, 국가주의의 폐해에 주목하기 위해 애국가도 돌이켜 보자는 주장은 과연 일고의 가치가 없단 말인가. 불온은 처벌과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상식의 건강성을 높이는 영양제이다. 불온에 대한 처벌의 목소리만 드높은 나라에서는 상식이라는 이름의 독재, 대중이 자행하는 검열이 판을 친다.
고슴도치는 추위에 약한 동물임에도 좀처럼 서로 다가서서 체온을 나누지 않는다고 한다. 가시에 찔리지 않기 위해서 그런다는 것. 하지만 추위가 일정 정도를 넘어서면 그놈들은 서로 접근한다. 서로 가시에 찔리지 않으면서 체온도 나눌 수 있을 만큼. 그렇게 해서 고슴도치들은 서로 알맞은 거리를 두는 게 좋다는 것을 마침내 깨달았다고, 쇼펜하우어는 한 우화에서 말한 바 있다. 예술과 수신자, 상식과 '불온' 사이의 거리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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