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심장을 겨냥했지만 배(胃)에 맞고 말았다."
비정규직 노동자로 연명하거나, 범법자, 매춘부, 굶어죽기 중에서 '선택'해야 했던 야수적 자본주의에서 신음하는 노동자들을 위해 썼지만, 사회의 반응은 오로지 식품위생의 문제로 축소되어 버렸다는 뜻이다. 뒤에 그가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 출마한 것은 다시 '심장'을 겨냥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하지만 결과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싱클레어는) 빈농의 대변자로서 캘리포니아 예비선거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영화계는 이미 아나콘다나 아틀라스 등의 자본가들에게 몸을 팔고 있었다. 1934년 싱클레어는 할리우드의 역선전 캠페인으로 인해 선거에서 패배했다. 분장한 엑스트라를 동원해서 싱클레어가 얼마나 못된 인간인지를 증명하는 가짜 뉴스 영화를 제작하는 것이었다. (히로세 다카시, <제1권력> 중)
거기에 그치는 게 아니었다. 할리우드의 자본가들은 "싱클레어가 당선되면 할리우드에서 철수해서 뉴욕으로 가겠다"고 주민들을 협박하기도 했고, '캘리포니아는 모스크바가 되어버리고 전국의 거지와 부랑아들이 복지를 찾아 몰려올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싱클레어는 선거에서 패배하고 만다.
싱클레어의 사례는 여러 가지 생각거리를 던져주지만, 자본 검열의 문제도 그 중의 하나가 될 터이다. 그는 소설로 일어섰지만 영화와 자본에 의해 참패하고 만다. 문학은 원고지와 펜만 있으면 쓸 수 있고 소규모의 자본으로도 출판할 수 있지만, 영화에 필요한 돈의 규모는 인쇄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러니 영화는 거의 전적으로 자본의 지배를 받는 예술이다.
불확실한 상품에 대규모의 자본을 투자하는 것이므로 투기성을 띨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위험성을 줄이기 위해 대중들이 이미 지니고 있는 고정관념에서 출발한다. 무제한 관람가 판정을 받지 못하면 투자금을 반환한다는 약정까지 있다. 대중들이 받아들이기에 무난한 이야기, 기껏해야 그들의 고정관념에 약간의 균열만 내는 수준에 머문다. 좀 더 근본적인 차원의 '불온성'은 제기되기 어렵다. 돈이 적게 드는 다른 예술들이, 대중들의 지배적 세계관이나 미의식에 대해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불온성'을 자주 띠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널리 알려진 이야기지만 할리우드는 유대자본이 지배하고 있다. 메트로 골든 메이어(MGM), 워너브라더스, 파라마운트, 20세기 폭스 등이 대표적이다. 목사·신부·무슬림 등을 비판하는 영화는 할리우드에서 무수히 만들어졌지만 유대 랍비를 비판하는 영화는 전혀 없음은 이와 관련된다. 오히려 유대인 학살자로서 히틀러에 대한 희화화는 할리우드의 단골 메뉴이다.
하지만 할리우드가 늘 그랬던 것은 아니다. 예컨대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한 이후 미국이 참전할 때까지의 아카데미상 수상작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굿바이 미스터 칩스> 등 반전(反戰) 성향이 짙은 작품이었다. 히로세 다카시에 따르면, 그 이유는 미국을 지배하는 모건-록펠러 두 재벌이 독일과의 전쟁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독일에 무기를 수출하고 히틀러의 미국 투자를 관리하는 등 독일자본과 이해관계를 함께하고 있었으며, 히틀러를 공산주의에 맞서는 동맹자로 간주하고 있기도 했다.
반면 미국의 유대인 자본은 유대인 탄압 때문에 히틀러를 공격하고 싶었다. 모건-록펠러 연합과 유대인 자본은 미국의 참전을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참전이 불가피해진 직후 아카데미상의 경향은 급변한다. <카사블랑카>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등 '정의를 위한 전쟁'의 불가피성을 강조하는 작품들이 상을 받는다. 무슨 영화를 볼까 고민하다가, 에이 그래도 뭐 상 탔다는데, 하고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라면 재고하실 필요도 있겠다.
권력 또한 영화를 이용하고 싶을 때 비자금을 동원했다. 1950년 조지 오웰이 죽자 미 중앙정보국(CIA)은 오웰의 미망인으로부터 <동물농장>의 영화 판권을 사들인다. 제작비도 일부 대었고 제작 과정에도 일일이 관여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영화 <동물농장>은 물론 '대주주' CIA의 의도를 충실히 반영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모두가 비인간적이라고 비판했던 원작은, 사회주의 소련만을 비판하는 영화로 탈바꿈해 버렸다.
이렇게 자본은 영화를 좌지우지한다. 자신의 이해관계에 의해 특정 영화를 죽이고 살리며, 시상제도와 언론을 좌우함으로써 관객들의 반응까지 조정한다. 관객들은 배우나 감독을 기준으로 영화를 선택하곤 하지만, 자본에게 그들은 그저 비정규직 노동자에 불과하다. 물론 돈은 좀 많이 받긴 하지만.
이쯤 되면 영화 보기 껄끄러워지는 분들 계시겠다. 하지만 영화인들 역시 이런 문제를 절실하게 고민했고, 다른 방식으로 제작비를 마련하는 노력들을 기울여왔다. 찰리 채플린은 히틀러를 비판한 영화 <독재자> 제작비를 스스로 충당했고, 많은 독립영화, 실험영화들 역시 뜻있는 사람들의 십시일반이었다. 특히 주목할 만한 현상이라면 '소셜 펀딩(Social Funding)' 방식이 영화에 본격 적용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 <두 개의 문> 포스터. |
본격적인 극영화에도 소셜 펀딩이 이뤄졌다. 광주항쟁을 그린 강풀의 웹툰 <26년>이 드디어 영화 제작에 돌입한 것. 2008년 투자를 확약했던 자본이 돌연 철회하면서(왜 그랬을까는 굳이 물을 필요가 없겠다) 제작이 무산되었다가 이번에 소셜 펀딩을 통해 모금한 4억 원으로 제작비 일부를 충당할 수 있었다.
후원자들에게는 최소한이라도 대가를 지불한다. 영화 티켓을 미리, 그리고 조금 비싸게 구입하는 형식이다. 몇 억 짜리 아파트는 미리 사면서 영화표는 왜 미리 사지 못할 것인가. 물론 관람료보다 좀 비싸다는 점은 문제이지만, 우리는 원가 공개조차 거부하는 아파트를 아무 이의제기 없이 사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참여자가 늘어난다면 점차 티켓 수준에 가까운 액수로도 소셜 펀딩은 가능해질 것이다(실제로 식민지 시기에 이미 도서 예약출판제도가 있었고 이는 유익한 책의 출간에 제법 도움이 되곤 했다).
물론 이렇게 모인 돈은 늘 충분치 못하다. 독립다큐를 찍는 영화인들은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해결하면서 자신의 인건비는 아예 제작비에 포함시키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지만 소셜 펀딩으로 충당된 돈은 그 비정상적인 제작비에도 턱없이 못 미친다. 소설 펀딩이 활성화되어야 하겠지만, 동시에 국가의 지원도 절실하다.
현대의 모든 예술은 자본을 매개로 대중들에게 전파되는 바, 자본은 예술가들에게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광장'을 베풀어주기도 했지만 동시에 '족쇄'로 작용하기도 한다. 소셜 펀딩은 이 족쇄로서의 자본을 견제하는 기능을 맡고 있거니와, 아직 충분치 못하다. 자본의 전일적 지배에 의해 특정 담론의 영역이 심각한 편향을 가져올 우려가 있을 때, 국가는 담론의 다양성 확보를 위해 이에 개입할 필요가 있다.
<두 개의 문>의 주제 자체가 돈으로 상징되는 욕망의 충돌이지만, 그 제작 및 상영 과정에도 돈은 긴밀하게 얽혀있다. 소셜 펀딩에 힘입었다는 점 말고도, 이 영화의 시사회가 열렸고 지금도 주된 상영관인 광화문의 인디플레이스라는 공간 자체도 그렇다. 인디플레이스는 독립영화 전용 상영관의 필요성을 인정한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의 지원으로 2007년 문을 열었다. <워낭소리>의 흥행 성공도 이곳에서 장기 상영하면서 입소문을 얻은 결과였다. 하지만 유인촌이 문화부 장관이던 2009년 지원금을 끊었고 휴관할 수밖에 없었다. 2년여 만에 시민과 영화인들의 성금에 힘입어(좌석에 붙어있는 이름들은 그 후원자들이다) 올해에야 재개관했다.
그런데 영진위가 모처럼 칭찬받을 일을 했다. <두 개의 문>과 <어머니>를 '다양성 영화 개봉 지원금' 대상으로 선정한 것. 그동안의 영진위 행보를 보면 어리둥절해지긴 하지만, 누군가 문책당하지 않나 걱정스럽기까지 하지만, 모처럼 세금을 의미 있게 쓴 셈이다. 그 지원금은 소셜 펀딩으로 모인 액수와 비슷한 수준이라고 한다. 역시 국가는 돈이 많다. 그 돈은 물론 우리의 세금이며, 나는 내 '머슴들'에게 내 돈을 의미 있는 곳에 쓰도록 요구한다. '4대강 죽이기' 말고 반값 등록금과 무상급식에 쓰라. 미국제 전투기를 바가지 값에 구입하지 말고 무상보육과 무상의료에 쓰라. 영화에 국한하여 말하자면, 아예 공영 영화사를 만드는 데 쓰라. 공영방송은 있는데 공영 영화사는 왜 안 되나.
소셜 펀딩은 물론 큰 의미가 있는 일이지만, 최근 들어 제법 활성화되면서 가는 곳마다 모금에 동참하라는 권유를 만난다. 영화 부문만 해도, <26년> 추가 펀딩이 진행 중이고, <두 개의 문>을 제작한 '성적소수문화 환경을 위한 모임 연분홍치마', 독립 영화제 등에 후원금이 절실하다. 그뿐인가. '개미스폰서', '소셜 펀치' 등 소셜 펀딩 관련 사이트에 가면 영화 말고도 무수한 사연들이 후원(또는 투자)을 기다리고 있다. 외면하자니 양심이 '껄쩍지근'하고 일일이 응하자니 지갑이 비명을 지른다. 그러다보니 궁금해진다. 왜 이렇게 좋은 일을 국가는 하지 않고 서민들만 주머니를 털어야 하나. 국가의 기능이 정상화된다면 소셜 펀딩은 보완적 기능만을 맡으면 될 노릇 아닌가.
소셜 펀딩이 활성화되고 있지만 국가는 뒷짐만 지고 있다. 관련법 하나 만들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러다가 이를 악용한 사기꾼도 나올 수 있을 테고 그리되면 모처럼의 시민 운동은 찬서리를 맞게 될 것이다. 그들은 혹시 이렇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싱클레어는 '가슴을 맞히려다가 배를 맞히고 말았다'고 했거니와, <두 개의 문>과 <26년>은 무엇을 맞힐 수 있을까. '가카'는, 우리 정치인과 관료들은 과연 루즈벨트 정도의 반응이나마 보일 수 있을까. 아무래도 자신이 없다. 하지만 루즈벨트 또한 대중들의 분노에 직면하여 나서지 않으면 안 되었을 때 나섰던 것뿐이다. 박원순은 뉴타운 정책을 전면 수정하였고 용산 강제 진압에 (다행히고 시장의 관할인)소방대원 투입을 막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니 이렇게 말할 밖에. "역시 선거는 잘 하고 봐야 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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