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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명 높은 프랑스인, "영화는 오락이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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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명 높은 프랑스인, "영화는 오락이 아냐!"

[철학자의 서재] 조성훈의 <들뢰즈의 씨네마톨로지>

영화를 본다는 행위의 의미

영화를 본다는 것. 너무나도 일상적으로 우리가 하고 있는 이 행동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일 때문에 쌓인 스트레스를 풀고, 심심함과 외로움을 달래고, 가까운 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우리는 극장을 찾고 TV를 켠다. 그런데 가끔은 누구에게나, 영화를 본다는 게 그런 일상에 그치는 것만은 아닌 순간이 온다. 다른 이의 삶을 보고, 나의 삶을 돌이켜 보고, 우리가 사는 세상을 돌아보고, 앞으로 다가올 나의 시간과 이 세상의 시간을 생각하게도 한다.

최근 보았던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 <멜랑콜리아>가 그랬다. 이 영화에선 표면적으로는 두 개의 이야기가 그저 겹쳐져 있는 듯 보일 수도, 혹은 따로 병치되어 있는 듯 보이기도 한다. '멜랑콜리아'라는 행성이 지구를 향해 다가오고, 결국은 지구와 충돌하여 모든 이의 삶이, 미래가, 시간이 한 순간 사라져버리는 이야기가 한 축을 이룬다. 여주인공 저스틴이 우울증(멜랑콜리아)에 빠졌지만 그 원인이 제시되지 않은 채 자신의 결혼식을 망쳐버린 다음, 지구로 다가오는 행성 때문에 불안에 떠는 언니 클레어의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다른 한 축을 이룬다.

▲ 영화 <멜랑콜리아> 중.
▲ 영화 <멜랑콜리아> 중.

영화를 보고 처음에는 멍했다. 영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흐르는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몽환적인 절망 혹은 죽음에 대한 매혹이 이 영화의 회화적 이미지들과 어우러지며, 무어라 한마디로 규정하기 힘든 어떤 우울한 매혹을 불러일으켰다. 불에 타들어가는 피터르 브뤼헐의 그림 '눈 속의 사냥꾼', 여주인공 저스틴이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존 에버렛 밀레의 그림 '오필리아'를 연상시키며 호수 위에 떠내려가는 장면 등. 논리적인 몇 마디 언어로 담아낼 수 없는 극단적인 절망과 우울 그리고 그에 대한 매혹이 뒤엉켜 있는 영화를 보면서,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멜랑콜리아 행성이 지구를 덮치는 순간 팍 하고 모든 빛이 꺼지는 종말의 순간에 매혹되었다.

나는 무엇을 하는 것일까, 영화가 끝나고도 며칠 동안 자꾸만 그 이미지들이 아른거려서, 뭔가에 사로잡힌 건 분명한데 내가 무엇에 사로잡혔는지를 몰라 자꾸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두 번이나 등장한 브뤼헐의 그림은 무슨 의미였을까. 왜 행성의 이름은 멜랑콜리아였을까. 왜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그렇게 내 발목을 회색의 덩굴처럼 잡아끌었을까.

아직은 <멜랑콜리아>가 나에게 불러일으키는 무언가에 대해 잘 모르겠다. 그런데 바로 이렇게 어쩔 수 없이 무언가 생각하게 된다는 것, 이것이 영화를 본다는 행위의 의미 중 하나일 것이다. 생각을 제대로 잘하기 위해서는 나름의 사유 도구들이 필요하다. 물론 그 도구들이 만능키처럼 모든 대상에 맞아떨어지지는 않지만 말이다.

▲ <들뢰즈의 씨네마톨로지>(조성훈 지음, 갈무리 펴냄). ⓒ갈무리
영화가 말을 건네는 중요한 방식인 이미지는 그저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편도, 의미의 층위와 동떨어진 허깨비 비주얼에 불과한 것도 아니다. 의미를 감각적인 방식으로 관객에게 전달하는 이미지를 어떻게 영화가 구현해내고 있는가를 분석하는 것은 영화적 사유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중요한 사유 대상이다. 영화가 전달하는 내러티브에만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 어떤 다양한 이미지들이 영화적인 새로운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가에 관심 있는 철학자가 바로 질 들뢰즈인데, 그의 영화 철학이 전개되어 있는 저서 <시네마>(질 들뢰즈 지음, 유진상·이정하 옮김, 시각과언어 펴냄)를 알기 쉽게 풀어쓴 책 <들뢰즈의 씨네마톨로지>(조성훈 지음, 갈무리 펴냄)를 소개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 글은 사실 <들뢰즈의 씨네마톨로지>에 대한 자세한 서평은 아니며, 다만 이 책을 계기로 삼아 영화를 본다는 것의 의미의 한 조각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들뢰즈의 씨네마톨로지

들뢰즈의 <시네마>는 난해하기로 악명이 높은 책 중 하나이다. 베르그송의 철학적 논의들을 기반으로 영화적으로 펼쳐진 다양한 이미지들의 의미들이 쉽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논의의 층위가 다층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들뢰즈의 표현을 빌어 다시 표현하자면, <시네마>는 자유간접주관적인 방식으로 쓰였기 때문에 혼종되어 있는 다양한 목소리들의 층위를 구분해서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에서도 악명이 높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늘 같은 방식으로 읽히는 책이 아니라는 점에서 흥미롭다고 말할 수도 있다.

먼저 들뢰즈의 논의 중 가장 명시적으로 눈에 띄는 층위는 철학과 영화, 그 중에서도 <들뢰즈의 씨네마톨로지>에서 주로 전개되고 있는 것처럼, 베르그송의 철학과 영화라는 이질적인 둘을 마주치게 하여 생산한 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베르그송의 철학이나 영화 둘 중의 하나에 익숙하다고 해서 이 책이 쉽게 읽히진 않는다. 또한 1980년대까지 프랑스에서 형성된 영화 이론들이 녹아 들어있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이전 저작들의 논의가 녹아들어있다. 녹아들어있다는 표현은 변형 없이 그대로 주어져 있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베르그송에 대한 들뢰즈의 입장도 이전의 저작들에서의 입장과 동일하지 않다. 이러니 난해함으로 악명 높다는 것을 이해할 만하다.

들뢰즈의 <시네마>가 독자들에게 쉽게 다가가는 책이 아니다 보니, 들뢰즈 사상의 다른 분야들보다도 연구자가 적은 것이 현실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내 저자가 저술한 <들뢰즈의 씨네마톨로지> 출간 소식을 들었을 때 반가움과 궁금함에 책을 집어들게 되었다.

<들뢰즈의 씨네마톨로지>라는 제목의 이 책은 'cinema'와 'symptomatology'를 합성하여 만든 새로운 용어를 통해 들뢰즈가 분류한 이미지들을 다루고 있다. 서문과 후기를 제외하고 전체 8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장에서 7장까지는 <운동-이미지>의 주요 개념들을 다루고 있으며, 8장만이 <시간-이미지>와 관련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책을 펼쳐 들고 읽기 시작하니 이 책이 어떤 독자를 염두에 두고 쓰인 책인지 분명해졌다. '악명 높은' 들뢰즈의 <시네마>를 읽어 보고자 하는 입문자들이다. 이 책은 이들을 위해 가능한 한 친절하게 길잡이 역할을 하고자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1장부터 등장하는 베르그송의 운동과 이미지에 대한 논의, 감각-운동 도식을 통해 분류되는 다양한 이미지들에 대한 논의를 찬찬히 따라가면서, 들뢰즈가 예시로 드는 영화들의 스틸 장면과 설명을 곁들여 난해한 들뢰즈의 논의를 가능한 쉬운 언어로 풀어 설명하고 있다. 분명 <시네마>에 입문하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들뢰즈와 친숙해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시네마>에서 들뢰즈가 가장 전면적으로 그리고 명시적으로 참조하고 있는 베르그송의 논의는 영화를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 조명된 세계, 우주에 대한 존재론적 논의이다. <시네마>에서 펼쳐지는 영화에 대한 논의들은 그저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심오한 존재론이기도 하다. 이 존재론적 논의는 영화에 대한 들뢰즈 논의의 '출발점'이다. 다시 말해 <시네마>는 존재론만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넘어서 실천적인 물음으로 나아가고 있다. 특히 <시네마 2: 시간-이미지>의 중반부 이후부터의 논의는 실천적인 물음들을 가지고 영화를 통해 사유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으며, 영화가 결국 사유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지, 어떠한 영화가 좋은 영화인지에 대한 사유를 제공한다.

물론 들뢰즈가 말하는 좋은 영화는 고정되어 있는 실체는 아니다. 베르그송의 논의들만을 참조해서 생각했을 때 대답될 수 있는 부분도 아니다. 존재론적 사유? 물론 이는 중요한 것이긴 하지만 어쩌면 별 볼일 없을 수도 있다. 마치 철학적 사유가 중요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세상에 대해 무력한 것처럼. 그렇다면 들뢰즈가 혹은 우리가 영화를 가지고 해야 하는 사유는 무엇이고,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탈영토화의 운동으로서의 영화 보기

들뢰즈가 영화를 새로운 사유기계라고 한 것은 어쩌면 세상에 대해 문자와 이성 중심의 사유와는 다른 방식의 사유가 가능함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고, (들뢰즈는 명시적으로 관객에 대한 논의를 거의 하지 않지만) 관객의 새로운 사유의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치 철학자들처럼 새로운 사유를 생산해내는 영화들을 보는 관객들 역시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에 대해 사유해야 한다. 영화를 더 이상 오락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유 대상으로 설정한다는 것 자체가 지배적인 사유 방식에 대한 전복이기도 하다. 들뢰즈의 개념으로 표현하면 지금까지의 보는 방식을 '탈영토화'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물어야 할 것들이 있다. 탈영토화는 어디로 향하는가. 탈영토화하는 운동의 힘은 그냥 주어지는 것인가. 영화 사유의 탈영토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탈영토화할 수 있는 힘은 그저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자신의 한계를 넘고 그럼으로써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새로운 영화, 새로운 관람, 새로운 사유. 이 모든 것들은 주어져 있는 기존의 틀을 벗어남으로써만, 안락하고 편안한 과거의 틀을 파괴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새롭기만 하면 다 좋다는 것인가.

들뢰즈 입장을 말하자면, 당연히 새로운 모든 변화가 좋기만 한 건 아니다. 그 변화와 창조가 우리 삶의 창조적 역량을 증가시키는 좋은 에너지 쪽으로 가야만 한다. 바로 이 지점들이 들뢰즈의 실천적 태도를 보여주는 핵심이다. 이 지점이 탈영토화가 향하는 방향이고, 영화적 탈영토화가 의미하는 바이며, 우리의 삶을 억압하고 창조적 역량을 소멸시키지만 동시에 편안하고 안락하게 느껴지는 과거의 것에 죽음을 선고한 뒤 변신을 거듭해야 하는 윤리적 행동에의 요청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삶을 끊임없이 창조적으로 살아내기 위해 우리는 영화가 필요한 것이고, 철학도 필요한 것이다. 우리를 제대로 살게 만드는 힘.

들뢰즈 사유의 힘은 철학적 사변의 구조물을 축조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의 새로운 영역과 대상과의 만남 속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실험과 실천에 있다.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에 창조적으로 대답하는 것, 이것이 영화를 통해 그가 말하고 싶었던 실천적 의미일 것이다.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지배 질서의 공고한 틀을 깨뜨리고 그 경계를 넘어가며 우리의 삶이 가진 역량을 확대시키고자 노력하는 것, 그것이 탈영토화라는 개념으로 그가 하고 싶은 말일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영화를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글을 시작하면서 언급했던 <멜랑콜리아>에 대한 생각으로 대답을 대신하고자 한다. 맨 처음 들었던 생각은 반쯤은 농담처럼 '우울증에 대한 우주론적 정당화'인가 싶었다. 우울증에 걸려 헤매고 있던 저스틴의 행동은 종말의 위기가 닥쳐오기 이전에는 그저 이상하게만 보였을 수 있다. 하지만 위기가 닥쳐오면서 저스틴이 우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쩌면 이 우주의 변화를 예민하게 감지하고 무언가의 이치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울증은 그저 정신적으로 나쁜 증상이 아니라, 어차피 종말에 처하는 이 지구의 시간을 미리 체험해낸 자가 겪어야 하는 대가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 영화 <멜랑콜리아> 중.

멜랑콜리아 - 메멘토 모리

하지만 그보다는 나를 가장 매혹시켰던 마지막 장면에 대한 이야기로 대답을 대신하고 싶다. 영화는 지구보다 거대한 크기의 멜랑콜리아 행성이 결국 지구와 충돌하면서 마치 '파박' 하고 조명이 터지듯 끝난다. 그 누구도 피해갈 방법이 없다. 가난했든 부자이든 권력자이든 모두 그렇게 종말을 맞이하는 것이다. 영화가 끝나는 순간, 피할 수도 없고 어떤 식으로든 미화될 수도 없이 모든 것이 소멸되어 버리는 그 종말의 순간을 함께 겪은 것만 같은 그 느낌이 가장 매혹적이었던 것 같다.

왜 가장 매혹적이었을까. 영화의 설정은 지구의 종말이지만, 사실 인간 모두에게 죽음의 시간은 피할 수 없이 닥쳐온다는 것을, 미래에 도래할 죽음이라는 인간의 한계 조건을 목도한 것 같은 기분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 영화의 불안과 우울은 인간의 무의식의 억압 같은 기제에서 오는 것으로 그려지지 않고, 인간을 넘어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마지막 시간과 관련된다. 마지막을 향해 계속해서 흘러가는 멈출 수 없는 시간. 그리고 마지막 순간.

▲ 영화 <멜랑콜리아> 중.

아직 이 영화를 제대로 분석하지는 않았지만 들뢰즈의 '시간-이미지'라는 개념을 통해 <멜랑콜리아>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들뢰즈가 '시간-이미지'라는 어려운 개념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수많은 의미들 중 한 가지는, 초고속 촬영으로 만들어낸 이 영화의 아름답고 몽환적인 극단적인 슬로 모션 이미지들의 형상화에서도 느껴지듯, 시간은 어떻게든 흘러가서 결국은 우리 모두 죽게 된다는 것을 생각하라는 것도 포함되지 않을까. 17세기에 바로크 화가들이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며 자신들의 그림에 해골과 곧 소멸될 꽃과 빛의 순간을 그려 넣은 것처럼.

▲ 필립 드 샹파뉴의 <바니타스>.

하지만 들뢰즈는 바로크 화가들처럼 결국은 죽음일 뿐이라는 삶의 '허무(vanitas)'라는 결론으로 이행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 주어진 이 삶의 허무를 용감하고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만일 정말 아무것도 없이 소멸될 자신의 죽음을 마음 깊이 느낀다면, 우리 삶은 어떻게 변할까.

시한부 삶을 사는 환자들이 재산이나 권력을 향해 탐욕적으로 변해가는 것을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아마 죽음을 미리 불러올 수 있다면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자면 '죽음에로의 선구'를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 얼마나 빛나는 것이었는지, 어떻게 본래적으로 살아가야 할지 알게 될 것이다. 나에게 떨어질지도 모를 작은 몫의 이득 부스러기나 기득권을 지키는 것보다 소중한 것이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까? 그 소중한 삶을 제대로 살아내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삶의 창조적 역량을 최대치에 이르게 할 수 있도록, 사유하고 행동하고 실천하며 사는 것을 선택하지 않을까? '나'라는 작은 영토에 꽁꽁 갇혀 '찌질하게' 살지 말고, 조금이나마 이 세상이 좋은 방식으로 변화할 수 있는 행동을 긍정해내게 되지 않을까.

지금 현재 권력과 부를 가진 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당신들의 시간도 결국은 유한하니 '찌질한' 짓들 좀 그만하고 가지고 있는 권력으로 멋진 생을 살아보라고. 그리고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에게도 같은 말을 하고 싶다. 부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조금씩이라도 좋게 변할 수 있도록 선택하고 행동하자고. 헛되고 헛된 탐욕의 지질한 덫에 그만 갇혀 살자고. 내 삶의 시간의 찬란함을 잊지 말라고 영화는 그렇게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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