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것은 매우 익숙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책의 부제를 보면 알 수 있다(한글 번역본에서는 주제목과 부제목 순서를 바꿔놓았다). "왜 가난한 사람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 얼마 전 <한겨레신문>이 여론조사와 현장취재를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한 '빈곤층은 왜 보수정당을 지지하나(☞바로 가기)와 정확히 같은 이야기이다. 자신의 경제적 이익에 배치되는 투표선택을 하는 걸 일컫는 '계급배반투표'를 다루고 있다. 그 자신이 캔자스 출신인 토마스 프랭크는 노동계급이 자신의 경제적 이익에 배치되게 공화당을 지지하게 된 사정을 캔자스라는 지역에 밀착해서 밝혀내고 있다.
저자가 주목하는 집단은 캔자스의 노동계급이다. 캔자스는 본래 1890년대에 미국 민중주의 운동의 본거지였다. 당시 캔자스의 농민들은 농산물 가격 하락, 농가부채, 디플레이션으로 고통받았고, 이로 인해 급진주의가 급속히 전파되었으며 '자본권력'에 대해 반대하는 시위가 수시로 열렸다.
급기야 캔자스 주를 지배하던 공화당을 몰아내버리고 민중주의 지지자들이 모두 그 자리를 대체했다. 1910년 테오도어 루즈벨트가 좌파진영에게 연대를 호소한 유명한 연설도 캔자스의 오사와토미에서 행해졌다(최근 오바마 대통령은 같은 곳에서 연설을 했는데, 중산층 복원을 호소하며 부유층 증세를 반대하는 공화당을 강하게 공격했다).
▲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 (토머스 프랭크 지음, 김병순 옮김, 갈라파고스 펴냄). ⓒ갈라파고스 |
프랭크가 보기에 예나 지금이나 캔자스 사람들의 모습은 변한 게 없다. 캔자스 인들은 소박하고, 솔직하며, 꾸밈없고, 천성적으로 선량하다. 성실하고 신앙심이 깊어 자연의 섭리를 충실히 따른다. 미국의 평균적인 삶의 양식과 태도를 대표하는 게 바로 캔자스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캔자스에 대해 탐구하는 것은 미국 정치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가 되며, 이를 통해 미국은 왜 공화당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었는가를 보여주고자 한다. 그럼 무엇 때문에 캔자스, 아니 미국의 노동계급은 공화당을 지지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프랭크가 분열쟁점(wedge issues)라고 부르는 여러 문화적 의제를 중심으로 정치적 전선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분열쟁점은 낙태와 동성애에 대한 찬반, 혹은 진화론을 교과과정에 넣느냐 마느냐와 같은 이슈들이다. 공화당이 이런 이슈들을 정치쟁점화하면서, 보통의 삶을 살아가는 미국 노동계급이 자신의 적으로 삼게 된 대상은 자본가가 아니라 엉뚱하게도 라떼-리버럴(latte liberal)이다.
도심에서 고급 라떼 커피를 마시며 입만 살아서 낙태와 동성애를 찬성하는 진보주의자들은 노동자 민중의 땀흘리는 삶을 이해하지 못한다. 명문대학을 나와서 진보적 생각을 공유하며 충분한 부를 누리며 편하게 사는 이들이야말로 노동계급의 적이다. 대부분 민주당원인 이들에 대한 분노를 키움으로써 공화당 정치인들은 평범한 노동자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민주당의 잘못도 크다. 빌 클린턴, 앨 고어, 조 리버맨 등의 인물을 배출한 민주지도자회의(DLC)는 중도층을 겨냥해서 민주당의 노선을 우경화했다. 블루칼라 노동자를 배제하고, 자유주의 성향의 화이트칼라 전문직 종사자들에게 구애했다. 지지층 확대를 위해 친기업적 정책을 수용했고, 덕분에 선거자금도 많이 걷을 수 있었다. DLC의 이러한 노선은, 전통적 지지기반인 노동계급 유권자는 어차피 집토끼이므로 민주당을 지지할 것이라고 전제한다. 승리의 관건은 산토끼라고 할 수 있는 기업과 화이트칼라이므로 이들을 끌어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프랭크가 보기에 이러한 전략이 경제적 쟁점에서 민주당이 공화당과 다를 바 없게 만들었고, 결국에는 문화적 쟁점이 미국정치를 지배하게 허용했다. 공화당은 매우 영리하고 노련하게 전략을 구사했고, 민주당은 어리석게도 그것이 일반대중들에게 먹혀드는 동안 두 손 놓고 있었던 셈이다.
일상에서 만나게 되는 미국정치의 변동을 실감나게 서술한 프랭크의 책은 뉴욕 타임즈가 2004년 그 해의 정치 분야 베스트셀러로 선정하기도 했다. 많은 언론에서 프랭크의 논지에 기반해서 민주당을 비판하기도 하고, 조언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캔자스 사람들의 인식이 미국 전체의 실상을 대변하는지는 확실치 않다.
실제로 미국의 저소득층이 공화당 지지로 돌아섰는지에 대해 프린스턴 대학교의 래리 바텔즈(L. Bartels)는 여론조사 자료를 통해 검증하였다 (☞바로 가기). 바텔즈의 결론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소득기준으로 전체 10분위 중 하위 3분위를 하층으로 규정할 경우, 이들의 민주당에 대한 지지는 지난 50여 년간 별 변화가 없었다. 교육수준으로 평가하더라도 대졸이하의 백인 유권자 계층에서 민주당 지지는 큰 변동이 없었다. 소득이 낮을수록 민주당을 더 지지하는 경향은 변함없이 뚜렷하게 유지돼 왔다. 선거이슈의 중요도에 대한 유권자들의 인식에서도 낙태나 여성의 사회적 역할 같은 문화적 이슈보다는 정부지출과 같은 경제적 요인이 더 중요하게 평가받았다.
바텔즈가 보기에 프랭크가 설명하는 현상은 공화당의 꾐에 넘어간 유권자의 비합리성과는 전혀 상관없다. 단지 1960년대 민주당이 민권법을 제정하면서 흑인들의 지지를 확보하는 대신, 남부의 지역기반을 상실하는 정당 재편성(realignment)의 효과가 캔자스에서 나타났을 따름이다.
프랭크의 현란한 묘사에 비해 바텔즈가 반박하는 근거는 매우 건조하다. 현장취재와 여론조사 분석 중 어느 것을 우월하다고 단정하긴 어려울 것이다. 다만 프랭크가 우울하게 그려낸 미국사회는 마치 보수의 천년왕국을 연상케 한다. 공화당의 교활한 전략가들의 농간에 속절없이 휘둘리는 미국 민중의 모습이 애처롭게 그려진다. 그럼에도 책이 출간되고 불과 2년 뒤에 민주당은 의회를 장악했고, 이어진 대선에서 오바마는 압승을 거두었다.
한국에서도 야권이 패배하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것이 '계급배반투표'의 논리였다. 가난한 사람일수록 현재의 민주통합당이나 통합진보당이 아니라 새누리당을 지지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태까지 한국의 선거연구들을 보면 소득수준이 투표선택에 별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 중론이다. 최근 <한겨레신문>의 조사를 보더라도 표본수가 너무 작을 뿐 아니라(800명) 연령, 지역, 성별 등 다른 요인들의 영향력을 통제하지 않은 결과이다.
가령 노년층에서는 가난할수록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경향이 분명하지만, 젊은층에서는 반대로 가난할수록 민주당을 지지하는 게 뚜렷하다면 이것은 소득의 효과가 아니라 연령의 효과인 것이다. 호남에 거주하는 부유층이 민주당을 지지한다면, 이것은 계급배반이 아니라 지역적 정체성으로 봐야 한다.
이러한 다른 요인들을 감안하지 않고 섣불리 가난한 사람들의 정치성향을 단정지어서는 곤란하다. 계급배반이라고 할 만한 근거로는 한참 부족하다. 이것이 야권에게 위안이 될 수는 없다. 민주주의의 약속은 '1원 1표'의 자본주의가 낳는 불평등을 '1인 1표'의 평등선거권을 통해 완화한다는 데 있다. 그러려면 계급투표가 강화되어야 마땅하다. 이를 어렵게 하는 역사적 구조적 조건이 분명히 있다. 그럼에도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는 결국 정당이다. 민주당은 전통적으로 중산층과 서민의 정당을 표방해 왔지만, 계급정당은 지양해 왔다. 논리적이지는 않지만 현실적인 이유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계급투표를 강화하는 것은 매우 현실적인 목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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