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를 하는 도중에 나는 우리네 삶이 얼마나 힘든지를 보여주기 위해 가끔 충격요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한국인의 자살률은 세계 1위이다. 그래도 어느 정도 심각한지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여러분이 내 수업을 듣는 2시간 동안 2명 내지 3명의 한국인이 자살을 했습니다"라고 말하면, 학생들의 반응이 갑자기 달라진다.
"신종 플루로 며칠 만에 한 명이 죽을 때마다, 언론에서 난리를 치던 몇 년 전의 일이 생생한데, 바로 이 두 시간 동안 2~3명이 자살하는 것에 대해서는 왜 전국적 난리를 치지 않는가요?"
요즘 사람들은 자기 존중감이 상당히 높다. 상대방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도 상당히 높다. 자기 존중감이 높아진 것은 바람직한 일이고, 일찍부터 교육을 통해 그것을 형성해주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자살률이 높고, 타인에게 인정받는 것에 연연해한다면, '사실은 자기 존중감이 낮다'는 역설을 가능케 한다.
그래서 서평을 너무나 상투적인 말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인생은 지옥이다. 인생은 감옥이다. 물론 지옥보다는 감옥이 낫겠지만, 왜 인생을 감옥이라고들 할까?
지금 읽고 있는 책 알렉스 파타코스의 <무엇이 내 인생을 만드는가>(노혜숙 옮김, 위즈덤하우스 펴냄)의 원제목도 'Prisoners of our thoughts'이다. 감옥이 너무 심했다면, 감옥 대신 수용소로 바꿔볼까? 일부러 바꾸지 않아도, 이 책은 <죽음의 수용소>라는 빅토르 프랭클의 책에서 지혜를 얻었다고 책표지에서부터 이미 천명되어 있다.
프랭클과 파타코스, 죽음의 수용소와 사유의 수용소, 게토의 수인과 일상생활의 수인, 두 저자의 주장이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 따로 분리하여 책을 읽어나가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파타코스가 프랭클 책이 자신의 교과서임을 밝힌 셈이기 때문이다.
똑같은 얘기를 해도 프랭클보다 파타코스가 좋은 이유
▲ <무엇이 내 인생을 만드는가>(알렉스 파타코스 지음, 노혜숙 옮김, 위즈덤하우스 펴냄). ⓒ위즈덤하우스 |
물론 프랭클도 시작은 소소한 일상이었고, 핵심 이론은 수용소에 갇히기 이전에 형성했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서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지독한 정신적 외상이 꼭 필요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가공할 만한 사건을 겪은 사람이다 보니, 그를 뒤쫓아 가기에는 버거움이 느껴진다. 그에 반해 파타코스는 나처럼 그다지 위대하지도, 그다지 유명하지도, 그다지 선구적 이미지도 없는 소시민의 감수성을 자극한다. 프랭클 책을 열면 갑자기 숭고해지지만, 파타코스 책은 내 이웃의 친근한 얘기를 들려주는 듯하다.
파타코스는 프랭클의 기본 입장을 '의미 있는 삶을 위한 7가지 원칙'으로 압축하고, 책의 각 장을 이에 준해서 구성한다. 프랭클의 주장과 유사한 소제목, 유사한 내용이 반복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프랭클 책을 먼저 읽고 난 뒤에 파타코스 책을 읽으면 이론적 기반과 임상적 체험을 동시에 엮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파타코스의 이론적 교과서 : 프랭클의 로코테라피
파타코스는 '의미 추구가 21세기의 큰 흐름'이라고 주장한다. 21세기는 기술 발전으로 인해 노동 방식과 형태가 바뀌면서 의미를 상실하게 하는 요소들이 증가되었다. 그래서 오히려 "기술이 발전할수록 일은 인간적 요소들을 더 충실히 수용할 수 있도록 재설계"(30쪽)되는 측면도 있다. 파타코스의 책은 이런 상황에서 "일에서 인간 정신을 고양시키고, 그러한 일의 정신적 영역을 우리의 일상생활과 통합시키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이 책의 목표는 일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프랭클이 정신의학자로서 심리 치료를 위해 했던 것을 일에 적용하는 것이다."(31쪽)라고 말한다.
프랭클은 도덕적, 정신적 자아가 무너지는 사람의 요인을 3가지로 설명한다. ①육체적 요인 ②심리적 요인 ③정신적 요인. 프랭클은 ③에 초점을 맞춘다. 프로이트 학파와 아들러 학파는 ②에 초점을 맞추어서 인간을 치유한다. 프랭클은 ③은 심리적 요인이 아니며, 특별히 정신병에 걸리지 않아도 바로 내가, 내 이웃의 동료가 겪게 되는 실존적 문제라고 판단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프로이트 학파는 쾌락 의지를, 아들러 학파는 권력 의지를 제시하는데, 프랭클은 ③을 위해 오스트리아 학파를 창시하고,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를 대안으로 내건다.
현대인이 고통, 무기력, 상실감, 좌절, 원망 그리고 우울증에 빠지는 것은, 열심히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치 마라톤 선수가 열심히 달리고는 있는데, 왜 달리는지, 어디로 달리는지,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트랙의 단계 단계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트랙 주변 사람들이 내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모르는 채 달리는 것과 같다.
이런 사람들에게 의미를 찾는 방법으로 로고테라피(logotherapy=logos+therapy)가 제시된다. '언어 치료 요법', '실존 분석적 정신 요법'이라고도 하는데, 프랭클이 로고스를 들여온 것은 철학적 치료의 중요성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현대인은 물질적 풍요와 일상적 성실성에도 불구하고 가치관의 혼란, 타인과의 대화 단절로 실존적 삶이 위기에 처하곤 한다. 위기를 타개하려면 현실 문제에 철학적으로 접근하여 가치관을 재고하고, 타인과의 대화를 확장하고 정신적 의미를 발견할 필요가 있다. 요즘 붐이 이는 철학 상담도 같은 문맥에서 바라볼 수 있다.
로고테라피의 효과 : 자기 초월을 통한 회복 탄력성
로고스는 철학사에서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지만, 파타코스는 '의미', 의미를 교환하는 타인과의 '대화', 대화를 통한 '연대감'으로 특화한다. 의미를 찾고, 타인과 의미 교류를 하고, 그로 인해 공동체와 유대감을 형성한 사람은 고통과 상처의 회복도 빠르다. '회복 탄력성'(265쪽)이 높다. 회복 탄력성이 높으면, 자살을 선택하지 않을 가능성도 높아진다.
이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개개인은 그가 어떤 사회적 지위를 갖는가와 관계없이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유일무이한 존재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내 자신이 아무리 별 볼일 없는 사람처럼 보여도 나를 대체할 사람은 없다.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유일한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다.
수용소에 갇히지 않아도, 자신이 유일무이한 존재이며 그러한 가치 내지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망각하면 수용소에 갇힌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 각자는 내부에 수용소를 갖고 있다. (…) 우리는 충만한 인간 존재로서, 현재와 미래를 용서와 인내로 헤쳐 나가야 한다."(228쪽). 관건은,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따라 세상은 달라진다는 것이다.
수용소를 벗어나려면 일상에서 의미를 찾는 노력을 해야 하는데, 프랭클이나 파타코스 모두 "의미는 우리에게 던져져 있음"을 강조한다. 그렇듯이 우리 삶에는 각자의 '과제'가 던져져 있다. 삶 속에서 과제를 발견하고, 과제의 의미를 발견하고, 그 과제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를 스스로 '선택'하라. 현재의 일과 인간관계에서 고통과 짜증과 싫증을 느꼈다면, 관점을 바꾸어 달리 생각하는 훈련을 해보라. 구조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의식 전환'을 해보라는 것이다. 주어져 있는 상황을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달리 생각할 것인가 말 것인가는 내가 바꿀 수 있다.
이렇듯 의미를 찾고 선택을 하면, 더 나은 단계로 발전하게 된다. 이것을 자기 초월이라고 부른다. 실존주의 맥락에서는, 주어져 있는 상황에서 '자기 기투'를 하여 '타인과 관계 맺기'를 하는 것이다. 인생은 자기 기투의 연속이며, 곧 자기 초월의 연속이다. 이렇게 자기를 넘어가도록, 파타코스가 각 장에서 설명하는 내용들, 즉 순간순간의 의미를 발견하고, 과정을 중시하고, 나와 거리를 두고, 관심을 전환하는 것과 같은 방법이 필요하다. 이 방법을 구체적으로 실천해 나가면 회복 탄력성이 높아진다.
파타코스가 제시한 방법을 사용해 보자
파타코스가 '자기 초월'과 '타인과 관계 맺기'를 설명하는 가운데서 심혈을 기울이는 것은 '의미의 구체성'과 '이타심'이다. 자기를 넘어서려면 타인을 고려할 수밖에 없고, 타인과 만나는 가운데 타인에게 '봉사하고자 하는 절실한 마음'이 생긴다. '자신이 겪는 고통'을 '극복'하려고 할 때 나처럼 고통을 받고 있는 타인을 위한 이타심이 생긴다. 고통 때문에 좌절, 안주하지 않고, 고통을 넘어서려고 하는 가운데서 이타심으로서 봉사, 사랑, 의미, 용서가 생겨난다. 이 모든 것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겨나기 때문에, "사람은 다른 사람에 의해서만 사람이다."(213쪽)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파타코스는 의미의 구체성을 보여주기 위해 책 전체를 실천적 사례로 도배한다. 프랭클도 로고테라피 이론뿐만 아니라 이론의 실천도 동시에 중시한다. 둘 다 임상 경험이 풍부하다. 그러나 파타코스는 철저히 프랭클 이론을 전제하고서 시작하기 때문에, 굳이 자신만의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낼 이유가 없다. 그래서 이론의 직접적 적용, 실천 지침 터득, 개념 적용 시 생겨나는 문제에 더 초점을 맞춘다. 전체 논의보다는 각론을 충실하게 보여주는데 주력하며, 그래서 마음 편하게 글을 읽어내려 갈 수 있다.
파타코스는 평생 동안 했던 실험, 치료와 인간관계를 예로 들면서 '태도와 의식 변화'가 공동체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실증한다. 많은 방법과 구체적 사례를 제시한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독자에게 권하고 싶은 것이 있다. 책을 읽는데 그치지 말고, 파타코스가 제시한 방법을 옆 사람과 실제로 사용해보는 것이다. 그러면 파타코스가 지닌 강점을 체화할 수 있다.
반문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느끼는 고통의 정도는 사건의 크기에 정비례하지 않는다. 프랭클이 겪은 사건은 역사적으로 전무후무한 것이지만, 그것과 비교하여 내가 느끼는 고통이 작은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사건의 크기보다는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가 중요하며, 사소한 사건도 엄청난 고통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고통을 이겨내는 자는 누구나 위대하다. 슈퍼맨으로 유명한 미국 영화배우 크리스토퍼 리브는 말을 타다가 떨어져서 전신이 마비된다. 그 뒤에 깨닫는다.
"나는 심각한 장애에도 불구하고 인내하고 견디는 힘을 발견한 평범한 사람들이야말로 영웅이라고 생각한다." (61쪽)
이렇듯 시련을 이겨내는 것만으로도 위대하다. 고통, 그로 인한 죽음 충동을 이겨낸 평범한 나 자신을 스스로 영웅이라고 생각하자. 이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존재인 나, 그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고통을 견뎌낸 나, 이런 내가 사라진다면, 한 명의 영웅이 사라지는 것이다. 시련을 이겨낸 내가 영웅이라고 생각한다면 '고통에 대한 회복 탄력성'도 증폭된다.
글을 진지하게 읽다 보면 가끔 드는 의문이 있기는 하다. 프랭클이나 파타코스는 나쁜 일도 정당화하며, 때로는 무기력한 이론가처럼 느껴진다. 이에 대해 파타코스는 분명하게 대답한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우리의 현재 생활 방식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보완하는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255쪽) 그가 꿈꾸는 것은 '구조 변화'보다는 '의식 전환'이다. '의식 전환'을 통해 '의미를 발견'하고 자신의 관점을 바꿔나가는 것이다. 의미가 바뀌면, 비록 시간이 걸리기는 해도 궁극적으로 '구조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설령 구조 변화가 뒤따르지 않는다 해도, 삶의 가치를 증가시키고, 더 행복해지고, 타인과의 관계가 돈독해지고, 유대성이 두터워지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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