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독재 권력에 대한 야유이지만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비단 권력만일까. 다소 길지만 이 책에 인용된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일부를 소개한다.
"다른 권력의 횡포와 마찬가지로 다수의 횡포도 주로 공권력 행사를 통해 그 해악이 처음 목격되었으며, 지금도 다르지 않다. (…) 사회는 스스로 뜻을 관철할 수도 있고 실제로도 그렇게 한다. (…) 그러므로 정치 권력자들의 횡포를 방지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널리 통용되는 의견이나 감정이 부리는 횡포 그리고 사회가 통설과 다른 생각과 습관을 가진 이견 제시자들에게 법률적 제재 이외의 방법으로 윽박지르면서 통설을 행동지침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경향에 대해서도 대비해야 한다."
맞는 말 아닌가. 예를 들어 10주기를 맞은 '미선·효순 양 사건'과 관련해 "단순 사고사였다. 촛불 집회와 같은 사회적으로 들고 일어설 만한 사안이 아니었다"라고 공공연히 말하려면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한다. 그 반대로 "북한인권법은 내정 간섭이자 외교 관례에 어긋난 게 맞다. 실효성도 의심스럽다"고 공언하려면 상당한 역풍을 맞을 각오를 해야만 하는 것이 현실 아닌가.
소수 의견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회는 건강하지 못하다. 그러니 사실 책 제목-원제를 그대로 옮겼다-에 대한 답은 자명한 셈이다. 하버드 대학 로스쿨 교수인 이 책의 지은이는 이를 이른바 '대세'와 '통설'에 맞서는 이견은 실수와 불의의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필요하다고 한다. 그래선지 책은 이견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보다 사회적 압력을 행사하는 '통념'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분석하는 데 비중을 두었다.
▲ <왜 사회에는 이견이 필요한가>(카스 선스타인 지음, 송호창·박지우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 ⓒ후마니타스 |
지은이는 그 원인으로 몇 가지를 드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정보의 부족 또는 왜곡과 평판의 압력이다. 그는 2001년 수백 명의 미국 법학 대학 교수들이 헌법에 근거해, 테러리스트로 의심받는 사람들을 군사재판에 회부하도록 한 부시 대통령의 결정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던 예를 든다. 법학 교수라 해서 모두 헌법 전문가는 아니다. 그에 따르면 성명서에 서명한 대부분이 법적 쟁점에 대해 전문 지식을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라 단지 피상적으로 믿을 만하지만 실제로는 별다른 정보가 없는 다른 사람들-동료 교수일 가능성이 크다-의 판단에 따랐던 것이다. 이는 어쨌든 성명서가 보기만큼의 무게를 지니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지은이는 의사들의 처방, 판례 등을 예로 들며 동조와 사회적 쏠림은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듯, 앞선 사람들의 결정도 결국 다른 사람들의 결정을 따랐을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좋은 평판을 얻고자 하는 욕망은 집단 편향성의 주요 요인이다. 극단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자신이 옳다는 확신을 강하게 갖는 경우가 많은 반면 확신이 약한 이들은 중도적인 의견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좋은 게 좋으니까'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까봐' 다수라고 여겨지는 이들의 의견에 동조하게 되어 진보적인 이들이 모이면 더욱 진보적인 의견이, 보수적인 집단에선 더욱 보수적 의견이 득세를 하게 된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지은이는 미국의 정책 결정 과정을 분석한 어빙 야니스가 제시한 집단 사고의 몇 가지 증후를 소개한다. 야니스에 따르면 집단적 자기 합리화를 통해 한 번 내려진 결정을 돌아보게끔 하는 경고 혹은 정보를 무시하는 폐쇄적 사고, 적들이 너무 사악해서 협상이 불가능하다거나, 적들이 너무 약하고 멍청하다는 등의 판에 박힌 생각이 이 같은 집단 사고의 특징이다. 또한 야니스는 집단 결속력이 강한 경우, 집단의 정책 결정에 전문가의 자문이나 외부 평가를 받을 수 없는 경우, 지도자들이 열린 토론과 비판적 평가를 장려하지 않을 경우, 구성원들의 사회적 배경과 정치적 신념이 서로 비슷한 경우 잘못된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이런 경향은 정파를 가리지 않아 '정치적 올바름'이 대세를 이뤘던 1980년대 미국 대학에서 공화당 지지나 동성애자 권익 반대 입장을 취했던 한 학생은 "보수주의자라고 말하는 것은 다양성을 포용하지 않는다고 책망하는 바로 그 사람들의 악의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기를 선택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고 기억했다.
지은이는 일반적으로 동조하는 사람들은 집단의 이익을 위해 침묵하는 것이며 이견 제시자는 자신의 생각대로만 행동하는 이기적인 개인으로 해석되지만 실은 그 반대라고 지적한다. 동조자들은 그 자신에게만 이익이 되지만 잘못된 관행이나 집단적 합의의 모순점을 지적하는 이들은 처벌, 따돌림 등 불이익을 무릅쓰고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는 것이란 설명이다.
책은 2009년에 번역판이 나왔으니 사실 좀 묵은 것이다. 또 다원적 무지, 자기 검열, 침묵의 비용 등 다양한 개념과 사례를 제시하지만 우리가 아는 것을 학술적으로 설명하는 '정교한 장치'에 불과하다고 볼 수도 있다. 또한 조직이나 국가는 이견을 환영하고 개방성을 응원할 때 가장 번영할 확률이 높다는 당연한 주장 말고는 이견을 허용하고 장려하는 제도에 대한 제안은 뚜렷이 보이지 않는다. 건강한 이견 제시자와 '청개구리'를 구분하는 방법도 명시되지 않은 점도 아쉽다. 하지만 '진영 논리'가 판치는 요즘 우리 사회에서 꼭 들춰볼 만한 책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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