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 교수가 평생에 걸쳐 쓴 책이니 소위 학계에 있는 사람들은 이 책의 연구 주제와 방법론은 무엇이지? 라는 질문을 던지겠지만 나는 다른 질문으로 이 책을 읽는다. 누구와의 무슨 약속이었을까? 무슨 약속을 지키려고 25년 동안 한 가족과 함께 했을까? 그 약속은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어떤 무게로 다가올까?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지 3년밖에 안 된 여교수가 철거가 예정된 사당동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관심사는 빈곤의 세대 재생산이었다. 그중에서도 가난한 가족이 집을 갖게 되면 빈곤이 어느 정도 완화될까 하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 우리 부모는 가난한데 나는 잘 살 수 있을까? 가난의 덫을 빠져 나올 수 있을까? 대학만 나오면 일단 안심해도 될까? 그런데 잘 산다면 얼마나 잘 살 수 있을까? 재벌만큼은 아니어도 그래도 남들만큼은 살 수 있겠지? 내 집이나 일자리는? 이건 많은 사람들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던져보는 보편적인 질문이다. 그 질문에 상상의 나래를 달고 힘을 내기도 하고 절망하기도 한다. 결코 비웃을 수 없는 그 질문들에 대한 답을 구하려는 듯 밥을 먹고 악착을 떨고 취업 준비를 한다.
나 또한 이 질문에서 출발해서 책을 읽었다. 한번 가난했던 사람들은 가난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그렇게 읽은 <사당동 더하기 25>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책'이다. 이 책갈피 갈피마다 슬픔 가득한 과거가 풀어헤쳐진다. 전쟁 통에 월남한 금선 할머니 3대의 이야기가 주축이지만 처음 조은이 들어간 사당동 주민들의 생애, 그리고 금선 할머니 댁에 새 식구로 들어온 사위나 며느리의 삶도 풍부하게 담겨 있다. 금선 할머니의 아들 수일 아저씨는 건설 노동을 하기도 하고 방범 활동을 하기도 한다. 그새 아내가 바람이 나서 애 셋을 두고 가출한다. 아저씨는 그만 정신이 팔려서 공사장에서 발을 헛디뎌 떨어지고 손자 셋은 서로 손을 잡고 다니며 남이 먹다 버린 사과 등을 집어 먹으며 산다. 아저씨는 임대 아파트에 입주하자 적극적으로 부인 찾는 일에 착수한다.
▲ <사당동 더하기 25>(조은 지음, 또하나의문화 펴냄). ⓒ또하나의문화 |
둘째인 은주는 청각 장애를 인정받아 장애인 임대 아파트에 산다. 그녀는 옷 파는 행상을 하거나 봉투 붙이는 일, 밤이나 은행 까는 일, 미싱 일 등을 한다. 동생 덕주는 중학교를 중퇴했고 가방 공장에 다녔고 탤런트가 되고 싶어 연기 학원을 다녔고 중국집 배달일, 웨이터 일을 했고 그 밖에 안 해 본 일이 없다고 말 할 수 있을 정도다. 덕주 씨는 남의 자전거를 타고 다니다 소년원에 간 일이 있고 지금은 망해버린 헬스 센터를 인수해서 일인 헬스 센터 사장으로 있지만 언제 문을 닫을지 알 수 없다.
이 책의 모든 페이지에는 이런 이야기가 끝없이 나온다. 마치 헤어 나올 수 없는 불행의 덫에 빠진 가족의 소설 이야기 같지만 이것은 소설이 아니라 현실이다. 이것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우리는 노력하면 삶이 바뀔 수 있다는 교훈을 얼마나 철썩 같이 믿고 삶을 살고 있는가? 삶의 어두운 책장 다음에는 밝은 책장이 펼쳐질 것처럼 믿으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 책은 어두운 책장으로만 가득한 책이다.
수많은 가난한 가족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일관된 공통점은 일관된 인생 이야기가 없다는 점이다. 불완전한 고용을 따라 삶이 흔들흔들 움직인다. 그저 끝없는 실패담들뿐이다. 이 실패담의 파편들은 어떤 기승전결 서사로도 연결되지 않는다. "노력의 노력 끝에 밝은 미래가 희미하게나마 보이기 시작했다"라는 전망도 가능하게 하지 않는다. 조은의 사회학적 작업이 그들의 삶을 통해 보여주는 일관성은 오히려 이 사회의 온갖 모순과 문제들이 최빈곤층인 이들의 삶을 예외 없이 관통하고 있다는 점이다.
놀랍게도 철거로부터 시작되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그들의 불행한 삶에는 자본주의와 세계화의 짙은 그늘이 속속들이 드리워져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쌀가게, 구멍가게 연탄가게 미장원 주인이 될 수도 없을뿐더러 된다고 해도 출구가 아니다. 사당동 달동네에 있었던 가게들의 업종은 사라졌다. 이불 가게나 떡집 등은 체인화"되었고 "사회 이동의 출구"는 막혔고 "생계 수단은 점점 맨몸밖에 남지 않는다." 심지어 노점상도 대형 할인점과 싸워야할 이 나라에서 "이들의 가난은 세계화나 금융 자본주의 도시 공간의 자본주의적 재편 같은 구조적 요인과 동떨어진 듯하지만 실제로 이들의 삶은 바로 그러한 구조적 요인의 직접적인 충격에 노출되어 있다." 이 모든 이야기의 지금 현재 결론은 "사당동 때 가난한 사람들의 꿈이었던 가게 주인은 이제 꿈을 꿀 수도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개인의 결심, 단호함, 적극성, 성격, 용기, 이런 내면의 동기는 아무런 의미도 무게도 없다.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구조가 생애를 지배한다면, 그렇게 외부 상황이 결정적이라면 인간에게 남은 가능성은 무엇이란 말인가? 자본의 덫이 되어버린 세계 속에서 인간의 삶은 무엇인가?
다시 한 번 믿음 이야기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세상이 이래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이런 세상을 애써 유지하려 드는 것은 그만 둬야 하는 것 아닌가? 같은 질문에 대답하려면 우선 믿음이 있어야 한다. 세상이 이래서는 안 된다는 믿음. 이런 상황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이 믿음은 내가 노력하면 나아질 거야, 라는 믿음과는 다른 종류의 믿음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기도를 한다면 왜 나를 이 모습으로 여기서 태어나게 했냐고 할 것이다. 이 모습을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이다. 이것이 가난한 사람들의 기도, 가난한 기도다.
<사당동 더하기 25>를 읽으면 가난한 이들의 기도 소리가 생생하게 들린다. 매 페이지마다 들려온다. 사실 이 책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책'이지만 독자들은 눈을 감으면 자신이 방금 본 장면이 기도 소리로 바뀌어 들려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이 책은 정확히 말하면 '눈을 감아도 기도 소리가 들리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가난한 기도 소리에 기울이면 왜 믿음이 단순히 정치적이고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입장이 아니라 한 가난한 가족과의 구체적인 약속이라는 모습으로 다가오는지 알 수 있다.
<사당동 더하기 25>에는 가난한 사람들과 어떻게든 함께 쭉 하겠다는, 그들의 목소리를 날 것으로 생생하게 들려주겠다는 약속을 지킨 책이다. 그 목소리는 우리에게 가난을 직시하라고 한다. 괜히 알코올 중독 때문이라니 정신이 해이해서라니 게을러서라거나 쓸데없는 말 집어치우고.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로운 믿음이 출발한다. 세상이 이래서는 곤란하다는,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는.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