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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남성 세계에 대항하는 목소리! "똥오줌은 마렵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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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남성 세계에 대항하는 목소리! "똥오줌은 마렵구요!"

[한만수의 '백 년 동안의 검열'] 플롯의 완결성과 이중 검열

플롯이란, 완결성의 미학을 상찬한다. 작품의 전개와 관련 없는 것들은 한 가지도 끼어들지 않아야 하며, 반대로 작품에서 한 구절만 빼내더라도 그 작품 전체가 무너질 수밖에 없어야 한다는 것. 작품의 마지막 대목에서는, 앞서 제시되었던 얽히고설킨 모든 문제들이 말끔하게 해결되어야 좋은 플롯이라는 것이다. 마치 문갑을 닫을 때 나는 '딸깍' 소리처럼. 그래서 작품이란 유기적인 구조이며 '잘 빚어진 항아리'처럼 미적 쾌감을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완결성의 플롯을 상찬하는 일은 물론 오래된 전통이며 그런 만큼 많은 사람이 동의하고 있다. 하지만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그 주장을 비판한다. 우리의 삶이란 도대체 플롯이 제시하는 것처럼 수미일관하지도 않고 단일 요인이 단일 결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며, 한 가지 주제에 집중되어있지도 않다는 인식에서 그 비판은 시작한다(리타 펠스키, <페미니즘 이후의 문학>). 특히 여성들이 주로 맡아온 '살림', 즉 가사노동의 영역은 그런 특성을 지닌다. 잠깐 장사익의 노래 '삼식이' 가사 일부를 보자.

"소낙비는 내리구요 / 업은 애기 보채구요 / 허리띠는 풀렸구요 / 광우리는 이었구요 / 소코팽이(소 굴레에 매어 끄는 줄-인용자) 놓치구요 / 논의 둑은 터지구요 / 치마폭은 밟히구요/ 시어머니 부르구요 / 똥오줌은 마렵구요 / 어떤 날 엄마 / 어떤 날 엄마"

정말 그렇지 싶다. '어떤 날 엄마'의 모습은 이렇게 다양한 일상사들이 얽힌 복잡계였다. 살림살이란 그런 것이다. 삶이란, 플롯과는 달리, 잘 짜인 일관적 논리구조와 단일한 인과관계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바람 난 남편 때문에 머리 싸매고 누워 있다가도 소나기가 내리면 장독 뚜껑을 덮어야 한다. 아이는 울어대고 논둑은 터지고 시어머니는 불러 댄다.

난봉꾼 남편 때문에, 실연 때문에 식음을 전폐하고 앓는 여주인공이라는 플롯은 인공적이고 가상적인 것이다. 우리의 일상적 삶은 매우 복잡한 요인들이 얽히고설켜서 하나로 귀결되지 않는 복잡계이다. 그것은 결코 삶의 다른 영역과 분리된 채 독립되어 있지 않다. 우리 삶은 멸균된 시험관도, 진공상태도 아니다.

그럼에도 완결성의 플롯만을 강조하는 것은 문제가 없지 않다. 원론적으로 말해서 삶의 체험과 예술적 체험의 차이와 분리를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예술적 체험을 우위에 놓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적 미학을 비판했던 브레히트의 소격(疏隔) 효과 이론 역시 이런 맥락에 놓여있다.

특히 페미니즘에서는 일관성의 플롯에 대한 일방적 예찬이란, 남성적 영역으로 간주되는 이성의 중심성에 대한 숭배를 미적 영역에서 다시 반복하도록 요구한다고 비판한다. 주로 여성이 맡아온 '살림'의 영역은 복잡계인데, 플롯은 단일성의 미학을 요구한다. 당연히 여성이 잘해내기 어려운 게임의 룰인 셈이다. 문학사에 이름 남긴 인물은 하나같이 남성들일 수밖에 없게 되는 원인 중 하나이다. 이토록 위대한 일들은 거의 남성들이 해왔다는 진술 앞에서 여성들은 열등감을 대대로 상속받게 된다. 이런 면에서 '완결성의 플롯'이라는 관념 역시 여성의 정신세계와 생활세계, 그리고 여성적 예술 행위에 대한 폄하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여성에 대한 내면적 검열로 작동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앞서 <소금>의 붓질복자 복원 과정에서 우리는 강경애가 검열을 의식해서 창작하였음을 확인했다. (☞관련 기사 바로 가기 : 기적적인 문학 작품 복원! 그런데 착잡하다!) 두 번의 물음과 마지막 대목의 대답을 배치함으로써, 설혹 대답이 삭제되더라도 물음만은 살아남을 수 있도록 얽어 짰다. '달걀을 한데 담지 않는다'는 격언 그대로였다.

특히 중요한 것은, 강경애가 자신이 검열을 의식해서 짠 플롯이 최종적으로 독자들에게 전달될 때 어떤 모습일지 예상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강경애만이 아니다. 검열 체제 속의 모든 작가들은 검열을 우회하기 위해 플롯 자체를 이리저리 조정하였는데, 그 중에서 어떤 것이 삭제될지는 알 수 없었다. 언제 불려갈 지, 언제 블랙리스트에 올라 발표 기회를 차단당할 지조차 모르는데, 플롯이 온전히 살아남을 지를 어찌 장담하겠는가. 모든 세부들이 전체를 위해 조화롭게 통합되는 일은 작가 혼자만의 힘으로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식민지시기 한국 문학의 특성 중 하나는 플롯의 불안정성에 있는 셈이다.

한국뿐만 아니라 표현 자유가 매우 제한적이었던 시간과 공간, 대표적으로 식민지 상황에서라면 비슷한 문제는 생겨난다. 플롯의 완결성이란 작가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검열관이 결재 도장을 찍어 주어야 도달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단일한 인과관계에 의한 플롯의 완결성이란, 삶의 복잡계로부터의 의도적이고 가상적인 일탈이었는데, 식민지 작가들에게는 그 가상적 완결성마저 추구하기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인식해야 할 것인가.

서구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듯이 플롯의 완결성 상찬이 여성의 열패감을 자아내는 일종의 검열기제로 작동했다면, 식민지 지역에서는 '이중의 검열'로 작동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식민지 문학(특히 정치적 성향이 강한 문학)에서 플롯의 불안정성이란 기실은 검열 때문에 생겨난 것이지만, 또다시 '식민지/근대 미달'의 불완전성으로 인식되어버렸다는 점이다. 반면에 플롯의 완결성이란 '성취되어야 하지만 자국의 전통에서는 충분히 달성하지 못한, 서구에서는 이미 이룩한 모범항'으로 인식된다. 식민지 지역의 문학의 수준이 '근대에 미달'한다는 인식은 자기 것에 대한 열패감을 만들어낸다는 의미에서 또 다른 검열이다. 즉 행정적, 정치적 검열과 내면적, 미학적 검열이 이중적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병 주고, 또 다시 병 주고"가 아닐 수 없다.

사정이 이러하고 보니, 완결성이 떨어지는 플롯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에 대한 평가를 온전히 서구 미학에 의존하는 일에 찬성할 수 없다. 플롯의 완결성이란 미적 쾌감을 주며 무엇보다도 소중한 예술의 가치라는 관념은, 표현 자유가 보장된 영역(주로 '제국')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 또한 주로 중산층 남성에 대해서만 진리치를 주장할 수 있다.

▲ 강경애가 직접 그린 자신의 얼굴. (<여성> 1939년 11월 호). ⓒ한만수
필자는 앞서 강경애의 <소금>에서 복원된 결말은 그리 훌륭한 미적 성취에 도달하지 못한 듯하다고 말한 바 있다. 검열로 삭제되었다가 복원되었다는 드라마틱한 과정이 이 작품을 과대평가하게 만들게 되는 효과는 없을까 걱정하기도 했다. <소금>의 경우처럼 검열에 의해 붓질되어버린 판본에 대해 우리는 플롯의 완결성이라는 단어조차 꺼내기 어렵다. 누더기 같은 작품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결말을 읽을 수 없는, 작가조차 플롯을 완결 지을 수 없는 소설이라니….

그렇다면 어찌되는가. 누더기 플롯은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예찬해야 하는 대상인가. 그렇지는 않다. 이 문제는 오늘 우리의 시각에서가 아니라 그때 그들의 시각에서 설명해야 마땅하다. 그때 작가들은 플롯을 완결 지을 수 없었지만 그때 독자들은 적극적이고 참여적인 독서를 통해 작품을 능동적으로 해석했다는 점이야말로 중요하다.

<소금>만 해도 이 작품의 결말은 거의 가려져 있었지만, 그때 독자들은 이 결말을 스스로, 나름대로 추정하고 복원하면서 읽었을 것이다. 이런 독서 상황에서 미적 쾌감과 정치적 의식은 종합된다. 또한 독자는 더 이상 수동적 수용자가 아니라 적극적 해석자로 자리매김 된다.

미학과 정치, 작가의 주도성과 독자의 주변성이라는 오래 묵은 이분법들은 이 순간에 해결되는 게 아닐까. 이런 독서의 순간은, 비교적 검열의 사슬에서 일찍 풀려났던 '제국'의 독자들은 매우 드물게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이었으리라. '소금' 복원은 이런 인식의 한 증거가 된다. 그렇다면 '소금'을 복원해낸 일은 '쓸데없는 짓'이 결코 아니었던 셈이다.

완결된 플롯의 미적 쾌감이라는 관념, 우리가 오래 신봉해온 이 관념이란 물론 상당한 타당성을 지니지만 기실 보편적 진리라고는 보기 어렵다. 그렇기는커녕 식민지 시기와 독재를 겪으면서 오랫동안 검열 속에서 예술 행위를 해야 했던 우리에게는 오히려 또 하나의 검열을 덧씌우는 결과를 가져올 우려가 크다. 이미 이뤄진 식민지 시기의 검열이야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오늘 우리 스스로가 지속적으로 수행하는 사후적인 그리고 정신적인 검열은 그만두어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우리의 지식계가 아직도 후기-식민적 상황에서 그리 멀리 벗어나지 못했음을 말해주는 것 아닌가.

이렇게 말하고 나더라도 고민은 완전히 해소되는 게 아니다. 사정이 이렇다고 해도, 내 주장은 어디까지나 '극소수 의견'에 불과하다. 특히 독자 대중들은 이런 복잡한 사정에 대해서, 아니 이런 '기발한' 주장이 있다는 점조차도 알지 못한다. 부뚜막의 '소금'도 넣어야 짜다. 복원된 '소금'의 이런 복잡한 가치도 독자들이 모르면 '싱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제안한다. 앞으로 <소금>이라는 텍스트를 어떤 지면에건 실을 때는 검열로 붓질된 사진과,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복원 결과 이미지를 꼭 곁들여 보자. 식민지 시기의 검열상황에 대해, 완결된 플롯의 다층적 의미에 대해, 당대 독자들의 독서 행위에 대해 간단한 설명도 곁들이면 금상첨화겠지.

플롯의 가치에 대해 이런저런 이의제기를 한 셈이다. 하지만 플롯 자체를 내던져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오히려 여성과 식민지인에게는 정치성이 있을 뿐 예술과 문화를 운위할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는 식의, 또 다른 주변화/타자화의 논법이 되기도 한다.

'유럽/백인/남성 중심주의'에 의해 강화되고 왜곡된 측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플롯이란 그것과 관계없이 매우 소중한 인류의 문화적 자산이다. 게다가 플롯/이야기는 힘이 세다. 이렇게 힘이 센 것을 남의 몫으로 내던져버릴 필요는 전혀 없다.

▲ 예술인 장사익. ⓒ연합뉴스
그러고 보면 장사익의 노래 '삼식이'의 가사 역시, 매우 다양한 요인들이 다양하게 부딪히고 있는 복잡계이지만, 제법 잘 짜여 있다. 여성의 일상사 중에서 다급한 일들을 잘 골라내어 일정한 규칙 아래 배열해두었다. 소낙비가 내리는 자연적 상황에서 돌발적으로 시작해서 가장 인간적인 요구, 즉 배설에의 호소로 끝난다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특히 마지막 대목은 통쾌하다. 아이의 울음도 시어머니의 호출도, 아무리 급한 '정언 명령'들도 내 똥오줌 마려운 것만은 못하다는 것.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엄마'의 존재 선언인 셈이다. "똥오줌은 마렵구요오오"

내가 이 노래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목은 여기이다. 이 대목에서 가사와 곡조와 장사익의 목소리는 결합한다. 경쾌하면서도 나긋나긋 노래해가던 장사익은 이 대목에 이르면 분수처럼 솟구쳐 오른다. 미적 쾌감과 동시에 엄마의 존재 선언을 폭발적인 목소리로 전달해준다. 미학과 정치가 훌륭하게 결합한다.

바로 이 대목에서 확인한다. 플롯이 미학주의에 일방적으로 동원되고 있는 맥락만 잘 교정하면, 플롯이란 역시 훌륭한 쓸모를 지니고 있다는 것. 그냥 논리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내 온 몸으로. 폭발하는 장사익의 목소리, 내 등줄기를 훑어 내리는 전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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