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검열 권력은 '나쁜 놈'임에 분명하지만, 세상 모든 일의 이치가 그렇듯이, 권력을 가진 자가 기획한 대로의 결과만을 가져오는 게 아니다. '나쁜 놈'이 '나쁜' 목적으로 기획한 일이 뜻밖에 '자살 골'이 되어버려 결과적으로 '착한 일'이 되기도 하며, 그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상정할 수 있다. 또 선악이 뒤섞여 분간하기 어려운 다양한 결과들이 산출된다.
유사 이래로 어떤 형태로건 검열이 존재하지 않은 시대는 없다. 검열이 극심할 때 언론은 질식한다. 한국 역사상 가장 극심한 검열에 시달려야 했던 식민지 시기 모든 언론과 예술은 검열을 거쳐야 발표될 수 있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노예의 언어'로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물론 비유적 표현이었지만, 니체에 따라 판단하면 이 비유는 완전히 뒤집힌다. 자기 자신을 긍정하고 스스로 가치를 창조해나가는 자야말로 주인이며, 노예는 반대로 자기 자신의 가치를 긍정하지 못해서 다른 존재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자를 말한다(<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본다면 이 시기의 피검열자들야말로 주인이다. 그들은 하고 싶은 말이 분명하며, 그 말을 독자에게 전달하기 위해 갖가지 꾀를 내고 때로는 처벌까지도 감수한다. 반면에 검열관은 노예이다. 그들은 이미 주어진 검열 기준대로 기계적으로 검열만 해댄다. 검열관이란 자신의 주인인 권력에 의존해서만 판단하고 존재할 수 있는 자들이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파업에 나선 방송 3사 노조원들을 해고하고 입을 틀어막으려고 하는, 언뜻 보아 강력한 힘을 가진 사장들, 김재철, 김인규, 배석규야말로 노예일 뿐이다. 그들은 그저 자기 주인이 하라는 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그분이 보시기에 심히 좋더라'를 위해서 움직인다. '자기 자신이 보기에 좋은 것'은 없다. 그러니 노예다.
파업에 나선 방송인들이야말로 삶의 주인이다. 그들은 결단과 행동에 힘입어 스스로의 삶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자신의 노동의 의미와 가치를 스스로 만들어 나가고자 한다. '나 자신이 보기에 좋은 일'을 해내고 있다.
하지만 매일 파업 기록을 갱신하면서도 유감스럽게도 방송사 파업은 성과를 얻어내지 못하고 있다. 총선에서도, 그 이후 통합진보당 사태에서도 실망스러운 일들이 지속되고 있다. 진실로 힘들고 맥 빠질 것이다. 만에 하나, 그들이 적당한 선에서 행동을 중단할 지도 모르지 않는가.
니체는 계속해서 말한다. 우리는 한때 주인으로서 지니고 살아갔다고 하더라도 어느덧 그런 삶에 만족하고 더 이상 아무것도 원하지 않을 때 우리는 즉시 노예가 되어 버린다고. 검열 권력의 허가를 받아야 발화할 수 있었다고 해서 모든 예술가와 언론인들이 저절로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더 이상 자신의 믿음에 충실하지 않을 때, 검열에 저항하지 않을 때, 검열을 우회하기 위한 노력조차 포기할 때, 대중들과 소통하기를 포기할 때, 그때에야 그들은 노예가 된다.
언론의 경우는 이렇다. 절대적인 자유가 보장되지 않으면 언론은 제 구실을 할 수 없다. 검열은 언론의 최대 적일 뿐이다. 그런데 예술의 경우에는 좀 사정이 복잡하다. 언론과는 달리 검열이 있다고 해서 저절로 질식되지는 않는다. 노예의 언어와 주인의 언어가 뒤섞이는 방식도 언론과는 다르다. 예술은 직접화법보다는 간접화법을 본령으로 삼는 바, 검열이 강요하는 금지와 권장이란 결국 간접화법이라는 예술의 본령을 추동하는 셈이니까 말이다. 언론이란 "해야 할 말을 제대로 할 수 있을 때"에만 제대로 기능한다면, 예술은 할 말을 하되 어차피 "돌려 말하기"의 방식을 택한 분야이니까 사정이 좀 다른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엄혹한 검열이 자행된 시기라고 해서 예술이 저절로 형편없기만 한 것은 아니며, 창작의 자유를 구가하는 시기에도 태작은 어김없이 나타난다. 같은 상황에서도 어떤 작품은 걸작으로 태어나고 어떤 작품은 그렇지 못하다. 작가의 능력과 개성의 차이 때문일 터이다.
물론 독자라는 요인도 작용한다. 검열 때문에 오히려 대중들은 적극적인 해석적 독서에 나서기도 하며 때로는 원저자의 의도와는 관계없는, 때로는 더 창의적인 해석을 만들기도 한다. 예컨대 얼마 전 인기리에 종영된 텔레비전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의 마지막 회에서 세종 이도가 산책하는 길에는 노란 꽃이 피어있었다. 노란색에 주목한 일부 네티즌들은 이를 노무현에 대한 애도라고 해석하였다. 대본에는 그저 '들꽃을 바라보는 이도' 정도로만 되어있었고 노란 꽃은 그저 우연에 불과했다고 하며, 화면에서 강조되어 있지도 않았다. 한마디로 검열을 의식해서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 그러나 수용자들은 이를 검열 우회로 읽었다.
▲ 한글 창제를 다룬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 세종 이도. 이 인물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모델로 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받았지만 작가들은 의도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SBS |
세종은 애민주의를 통해 노무현과 동일시되었으며, 정기준은 기득권 수호 세력이라는 점에서 이명박 정권으로 독해되었다. 정기준의 '밀본'을 'MB'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이런 식의 독법은 물론 수용자의 적극성과 창의성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를 말해주는 것이지만, 그 적극성은 검열 상황이라는 인식적 지평 속에서 강화된다. 즉,현재 대한민국은 도처에서 검열이 행해지고 있다는 인식, 방송들은 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으며 진실은 늘 숨겨져 있다는 인식이 이런 해석을 만들어 낸 셈이다.
<뿌리 깊은 나무> 작가는 검열 우회를 시도했던 것이 아니지만, 식민지 시기의 작가들 상당수는 다양한 방식의 검열 우회를 시도하였다. 발신자는 말하지 않아도 전달될 수 있는 가능성까지를 염두에 두고 창작했을 것이다. 한편 식민지 시기의 모든 수용자들은 모든 문화예술이 검열 상황에서 만들어졌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 역시 적극적이고 창의적인 수용행위를 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
발신자는 다 말하지 않고(말할 수 없고) 수신자는 발화되지 않은 것까지 헤아려 해석한다. 이러한 이심전심의 전달 체계는 식민지 문화예술의 특성 중 하나이다. 물론 이런 전달과정은 완벽할 수 없고 과잉해석이나 과소해석을 피치 못하게 불러온다. 하지만 어떤가. 모든 예술은 수용자가 수용하는 행위에서만 완성된다고 본다면, '과잉'이니 '과소'니 하는 표현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닐까.
작가와 독자 사이의 역동적 관계, 예술이라는 장르의 속성에 따른 복잡성, 주인의 언어와 노예의 언어의 혼종, 이런 다양한 회색지대의 존재가, 언론검열과는 구분되는 예술검열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검열이 엄혹했던 식민지 시기 한국에서 문학이 정치의 대리보충물로 기능했던 것 역시 이런 회색의 성격 때문이다. 이 회색은 발신자와 검열자 그리고 수신자들이 적절한 수준에서 타협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복잡성을 염두에 넣지 않는다면, 검열 연구는 자칫하면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일차원적인 수준에만 머물게 될 것이다. 검열이라는 외부적 강제는, 미학의 기준으로 판단할 때, 작품을 망가뜨리기도 하고 반대로 '좋은' 작품으로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를 검열의 생산적 효과와 부정적 효과라고 각각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다음 회에선 검열의 생산적 효과를 소재로 삼은 영화 <웃음의 대학>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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