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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적인 문학 작품 복원! 그런데 착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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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적인 문학 작품 복원! 그런데 착잡하다!

[한만수의 '백 년 동안의 검열'] 80년 만에 부활한 <소금> ③

☞관련 기사 : 80년 만에 부활한 <소금> ① 일제가 난도질한 소설, CSI의 눈으로 복원?! / ② 잡지사 직원의 태업이 낳은 보석 같은 순간!

달걀은 한 군데에 담지 않는다는 격언이 있다. 이와 비슷하게 식민지 시기 문인들은 검열을 의식하여 여기저기에 하고픈 말들을 나눠 쓰는 기법도 구사했다. 어떤 것이 검열에 삭제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하고 싶은 말을 여러 군데에 나눠 써놓고서 그 중에서 한두 개라도 살아남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나는 이를 '나눠 쓰기'라고 명명했다.

나눠 쓴 것들은 모두 살아남기도 하고 어떤 것만 살아남기도 했으니, 그 결과로 작품의 미학적 효과가 어찌될 것인지는 작가도 잘 알 수 없었다. 상당 부분 우연에 좌우되었던 것이다. 자신의 작품을 온전히 통어할 수 없었던, '노예의 언어'를 구사해야 했던 시대의 비극이다. 그분들은 자신이 비판하는 대상으로부터 허가를 받아야 작품을 발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강경애의 <소금>에서 삭제되었다가 이번에 복원한 구절도 역시 나눠 쓰기의 한 부분이었다고 추정한다. 이미 두 차례에 걸쳐서 "우리는 왜 이렇게 가난하게 사는가" 하는 물음이 제기되고, 답변은 유예되다가 맨 마지막에야 제시되는 것이다. 물음만이라도 살아남으려면, 검열관의 비위를 정면으로 거스르게 될 답변 대목은 맨 마지막에 제시하는 게 낫다는 판단. 그러니 검열 제도는 작품의 플롯마저 좌우한 셈이 된다. 검열관은 맨 마지막 구절만을 삭제하였다. 내 짐작이 옳다면 강경애가 예상한 그대로였다.

아니 내친 김에 한걸음 더 나아가자면, 강경애는 이 결말 부분을 검열관을 위한 '먹이'로 던져주었을 지도 모른다. 이 대목은 강경애의 다른 소설들에 비해 검열에 저촉될 가능성이 훨씬 크다. 앞부분에서는 분위기는 뭔가 불온하지만 꼭 집어 삭제할 대목은 마땅치 않다. 어떤 처분을 내릴까 망설이던 검열관에게 적절한 '먹이'를 던져줌으로써 이것만 삭제하고 나머지는 통과되기를 기대했을 수도 있다. 물론 이제 와서 아무도 증거를 댈 수는 없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 <신가정>(1934.8)에 실린 <소금>의 삽화. ⓒ한만수

여하간 <소금>의 복원된 결말은 다음과 같다.

"밤 산마루에서 무심히 아니 얄밉게 들었던 그들의 말이 ○○떠오른다. '당신네들은 우리의 동무입니다! 언제나 우리와 당신네들이 합심하는 데서만이 우리들의 적인 돈 많은 놈들을 대○할수 있읍니다!' ○○한 어둠 속에서 ○어지던 이 말! 그는 가슴이 으적하였다. 소금 자루를 뺐지 않던 그들 ○○ 그들이 지금 곁에 있으면 자기를 도와 싸울 것 같다. 아니 꼭 싸워줄 것이고 ○○○(3~4자 불명) 내 소금을 빼앗은 것은 돈 많은 놈이었구나! 그는 부지중에 이렇게 고○○○(3~4자 불명) 이때까지 참고 눌렀던 불평이 불길 같이 솟아올랐다. 그는 벌떡 일어났다." (<신생활>, 1934년 10월호, 고려대 소장본 207쪽 복원 결과)

이 대목은 강경애가 제기한 두 차례에 걸친 물음의 '정답'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설명적이고 교훈적이다. 혹시 삭제되었을 때, 즉 물음만 있고 답변이 없어 독자들이 궁금해졌을 때, 독자 스스로 만들어내려는 노력을 하도록 되어 있을 때, 오히려 더 문학적 가치는 높아지는 것이 아닐까. 답변이 되살아남으로써 이 작품은 너무 정치로 가버린 것은 아닌가. 공산당과 힘을 합쳐 싸우자는 빤한 교훈을 표면에 내세우는 일은 과연 긍정적이기만 할까.

<소금>을 70여 년 만에 드디어 복원해냈다는 감격에서 벗어날 만한 시간이 흐르자, 이런 생각이 시작되었다. 가렸다가 나타나는 것은 더 신비하게 마련이고(마치 베일 속의 여인처럼), 어렵게 성취한 것은 더 가치 있어 보이게 마련이다(국립과학수사연구원을 동원하고 남의 대학 도서관의 협조를 얻어내느라 고생 좀 했으니). 게다가 남들은 못하고 나만 해낼 수 있었던 일은 더 가치 있어야 마땅하다(70여년 만에 내가 주도해서 해냈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소금>의 삭제된 부분에 너무 의미를 많이 부여한 것은 아닐까. 물론 <소금>의 결말이 이처럼 미학적 성취와는 거리가 있게 된 것은, 강경애의 정치적 신념 때문이었을 터이다. 그는 미학보다 정치를 중요하게 여긴 작가였으며, 그의 선택은 마땅히 존중되어야 한다. 더욱이 그 시기는 문학이 정치의 대리 보충물 같은 구실을 하던 시기였다. 정치가 검열에 의해 금지되었던 시기였으니까. 당연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현상이다.

▲ 강경애가 직접 그린 자신의 얼굴. (<여성> 1939년 11월 호). ⓒ한만수
또한 강경애는 이 대목은 필연코 삭제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니 신경을 좀 덜 썼을 수도 있고, 검열관을 위한 '먹이'로 설정되었을지도 모른다. 80년 뒤에 어떤 엉뚱한 사람이 나타날 것인지, 그동안 과학기술의 발전이 얼마나 눈부신 것일지 강경애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을 터이다. 만일 그렇다면 나는 강경애가 굳이 밝히고 싶지 않은 것을 밝혀낸 셈인지도 모르지 않을까.

어쨌건 텍스트는 복원되었고, 오늘 여기에서의 잣대로 본다면 <소금>의 결말 부분은 미학적으로 훌륭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검열로 삭제되었다가 복원되었다는 드라마틱한 과정이 이 작품을 과대평가하게 만들게 되는 효과는 없을까. 이 작품에 정당한 수준 이상으로 관심을 집중시키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지 않을까.

검열은 예술 작품의 어느 부분까지 관계되는 것일까. 과연 검열로 인해서 예술 작품은 손상받기만 하는가. 검열을 통과한 작품들은 '노예의 언어'이기만 할 것인가. 검열 연구란 무엇을 추구해야 할 것인가. 착잡해졌고 생각이 복잡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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