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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 총선 결과에 '멘붕'한 사람에게 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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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 총선 결과에 '멘붕'한 사람에게 고함!

[철학자의 서재] 안토니오 그람시의 <옥중수고>

<옥중수고>와 현재

우선 <옥중수고>에 관해 간단히 안내부터 해야 할 것 같다. 약간씩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국내에 나와 있는 <옥중수고 1 : 정치편>, <옥중수고 2 : 철학·역사·문화편>은 옥중수고 전부가 아니라 선집(selections from the prison notebook)을 번역한 책이다.

<옥중수고> 전체는 노트 2848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따라서 이 책을 읽을 때에는 글을 고르고 모은 편집자들의 의도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그리고 '수고'의 영어 표기는 notebook이다. 논문 형태로 쓴 글이 아니라서 완성도가 그리 높지 않다는 뜻도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람시는 이탈리아 사람이다. 당연히 이탈리아어로 글을 썼다. 그런데 국내 번역본은 영역한 것을 번역한 것이기 때문에 그람시의 생각을 온전하게 드러내는 데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을 수 있다. 더욱이 이 선집의 편집자들이 서설을 쓰면서 번역상의 어려움을 말하고 있는 부분을 보면 책을 내려놓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편집자들은 지루할 정도로 긴 서설 외에도 많은 권위 있는 각주를 달고 있어 그람시의 생각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기도 한다.

번역은 창작보다 어려울 수 있다. 어떤 번역어를 선택하는 순간, 나머지 다른 의미들은 제대로 드러나지 않거나 사라지기 때문이다. "원전을 보라"는 말은 본래의 의미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학자적 양심이자 학문적 자존심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람시의 옥중수고 1 : 정치편>의 첫 출간이 1986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당시의 척박한 환경에서 꽃피운 번역자의 혜안을 높이 사지 않을 수 없다.

▲ <그람시의 옥중수고 1 : 정치편>(안토니오 그람시 지음, 이상훈 옮김, 거름 펴냄). ⓒ거름
1990년을 전후로 하여 수많은 사회주의 국가가 몰락의 길에 접어들었을 때, 한국의 좌파들은 적지 않게 당황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자본주의는 왜 이렇게 힘이 센가. 과연 혁명은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어떤 방법이 적절한가. 그때 집어 들었던 책이 <그람시의 옥중수고 1 : 정치편>이었다. 마침 1991년은 그람시 탄생 100주년이기도 하여 한국에서는 이른바 '그람시 붐'이 일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좋은 사회로 가는 길'은 불투명해 보인다. 명료하지도 않은, 그래서 곱씹어야 뜻을 알 수 있을 것 같은 이 책을 놓지 못하는 이유다. 에릭 홉스봄은 그람시를 두고 "무솔리니가 감옥에 가두는 바람에 스탈린으로부터 구출된 그람시"라고 표현했다. 무솔리니는 물론이고 스탈린으로부터도 배척당했다는 뜻이다.

그람시의 생애를 이보다 더 적절하게 말할 수 있을까. 한때는 이탈리아 공산당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던 그람시가 무솔리니에 의해 감옥에 갇힌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지만 스탈린과 뜻을 같이 하지 않은 것은 '목숨을 걸 정도'로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그람시가 감옥에 갇혀 있던 기간은 스탈린이 본격적으로 자기의 길을 가면서 수많은 정적들을 제거해 나갔던 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비록 마흔여섯 살의 나이로 짧은 인생을 마쳤지만 그람시의 삶과 사상에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주목할 만한 것이 있다.

잊기 쉬운 정치 요소

그람시는 '정치의 요소'라는 글에서 가장 잊기 쉬운 정치 요소로서 지배자와 피지배자, 지도자와 피지도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옥중수고 1>, 158쪽)

그람시의 생각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면서 오늘날의 정치를 이해하려면 지배/피지배, 지도/피지도 관계가 있다는 사실보다 '이 관계를 가장 잊기 쉽다는 것'에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만큼 지배가 세련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지배가 지도로 가장(假裝)될 뿐만 아니라 피지배자로 하여금 자신이 지배받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하게 하고, 지배하더라도 동의를 얻으면서 지배하기 때문이다.

나라 경제가 어렵다고 아우성일 때면 잘 먹고 잘살게 해주겠다는 자가 지도자로 부상한다. 그리고 그를 선택한 사람은 자신이 그를 선택했다고 생각하지 그를 선택하도록 만들어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욱이 전쟁을 조장하면서 위기를 부추기면 불편함을 감수하고라도 지배자의 정책에 동의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신은 늘 선택의 주체라고 착각한다. 사실 전쟁이란 인권을 무시하는 가장 악랄한 정책이거나, 내부에 문제가 많을 때 시선을 밖으로 돌려 내부 문제를 무마하려는 미봉책일 뿐이다.

보수란 현재의 질서를 가장 안전하고도 유용한 것으로 보고 변화를 두려워하는 태도다. 그래서 대개는 기득권층이 보수주의자가 되기 쉽다. 그런데 하류층 또는 피지배 계급에 속할 뿐인데도 보수층의 정책에 동의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것은 '개뿔'도 없는데도 말이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렇게 해서라도 '나는 그들과 같다'는 심리적 보상을 얻으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피지배 계급에 속하는 사람인데도 선거와 같은 절차적 민주주의의 시행에서 보수층에게 표를 주는 이유는 그들에게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보수층은 자신들에 관한 긍정적 이미지를 보여주는 매체를 잘 활용할 뿐만 아니라 피지배 계급이 좋아할 만한 무상 급식이니, 복지니 하는 구호를 이용하는 데에도 익숙하다. 그래서 결국은 피지배 계급으로 하여금 지배하고 지배받는 관계, 지도하고 지도받는 관계를 잊게 만드는 것이다.

헤게모니 개념의 다의성

지배자와 피지배자, 지도자와 피지도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게 만드는 '세련된' 지배· 지도 방식은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을 통해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에 대한 일반적 이해는 '지배(domination)', '강제(force)'와 대비되는 '동의(consent)', '지도(leadership, direction)'의 개념과 관련이 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헤게모니는 동의에 의한 지배 또는 지도를 의미한다.

러시아 혁명의 성공에 고무되었지만 러시아와는 다른 서구의 조건도 고려하게 된 그람시로서는 러시아와는 다른 혁명 방법론을 생각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러시아에서는 기동전(war of Maneuver)이 적합한 전술이었지만 서구에서는 장기전이기도 한 진지전(war of position)을 펼쳐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러시아는 자본주의의 발전이 더뎠고 전제 군주가 군림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봉건 잔재도 많이 남아있는 상태였고, 동의보다는 강제를 통해 지배하는 체제였다. 반면에 서구는 강제보다는 동의에 의한 지배 또는 지도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기동전이냐 진지전이냐의 문제는 그 사회가 처한 조건과 무관하지 않다. 서구 특히, 이탈리아에서의 혁명을 꿈꿨던 그람시로서는 헤게모니를 '지배'보다는 '지도'에 가까운 개념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헤게모니는 (1) '지배'와 대비되며 (2) '조합주의적인' 또는 '경제적-조합주의적인'이라는 말과 대립된다. 즉, 어떤 집단이 조합적 존재로서의 위치와 자신의 경제적 입장의 방어라는 선을 넘어, 정치·사회적 영역에서 지도(leadership)적 위치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역사적 국면이다. (<옥중수고 1>, 18쪽, '편집자 서설' 中)

피지배 계급은 실질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기 전이든 후든 계속해서 지도적 기능을 발휘하고 있어야 한다.

한 사회 집단은 통치권을 획득하기 전에 이미 '지도력'(leadership)을 발휘할 수 있으며 또 발휘해야 한다(이것은 그러한 권력을 획득하는 데 필요한 중요한 조건들 중 하나다). 그러다가 그 집단이 권력을 행사하게 될 때, 그 집단은 지배적(dominant)으로 된다. 그러나 그 집단은 권력을 확고하게 장악했다 할지라도 계속해서 '지도'(lead)해야 한다. (<옥중수고 2>, 78쪽)

지도적 기능은 경제적, 조합주의적 측면에서는 희생을 감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서 오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헤게모니를 얻을 수 있는 방법론이기도 하다.

헤게모니가, 헤게모니 안에 포섭되어야 할 집단들의 이해관계와 경향을 고려하여 어떤 타협적인 균형을 형성하는 것-다시 말해 지도적인 집단이 경제적 조합주의적 측면에서는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옥중수고 1>, 180쪽)

진보를 외치고 좌파를 자임하는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남성이 여성을, 다수자가 소수자를, 도시가 농촌을 차별하는 것처럼, 경제적·조합주의적 측면에서는 희생을 감수하지 않으려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로부터 동의를 얻지 못해 지도적 위치에 서지 못하는 사례도 많다. 나아가 만일 자본주의가 발달한 서구형 사회 구조가 일반화되었고 또 일반화될 것이라면 진보적 좌파에게는 피지배 계급뿐만 아니라 지배 계급으로부터도 자신들의 헤게모니와 관련하여 동의를 얻고 지도적 위치에 서야 하는 과제가 있다. 이런 말은 이해하기에 따라서 그람시에 대한 우파적 또는 우경화된 해석으로 특화될 수도 있는데, 어쨌든 지도하지 못하면 지배자가 되기 어렵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일 것이다.

지도한다는 것은 마음을 얻는다는 것이다. 강제는 복종을 낳을 수 있지만 동의를 얻지는 못하기 때문에 언제든지 기동전의 상황을 낳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람시에게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 시대에 맞는 변혁 전술은 진지전뿐인가. 진지전은 기동전을 배제한 전술인가.

문제는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이 그리 단순하지가 않다는 것이다. 헤게모니 개념을 동의에 의한 지배 또는 지도로 본다는 것은 '지배'나 '지도' 중 어느 하나로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기도 한데, 그렇게 된 이유는 그람시의 말 자체에 기인한다. 그람시는 헤게모니를 항상 '지도(direzione)'와 상호 교환적으로 쓴 것이 아니며, '지도'와 '지배(dominazione)'를 합한 뜻으로 사용하기도 했다(<옥중수고 2>, 75쪽, 편집자 각주 참고) 그리고 때로는 헤게모니를 강제와 동의를 결합한 의미로 쓰기도 한다.

이제는 고전적인 것이 된 의회 제도라는 지형 위에서 '정상적인' 헤게모니의 행사는 강제와 동의의 결합을 특징으로 한다. 이 양자는 상호간에 균형을 취하여 강제가 동의의 측면을 과도하게 앞지르는 일이 없게 한다. (<옥중수고 2>, 106쪽, 편집자 각주를 통해 재인용)

혁명 방법론 : 진지전이냐 기동전이냐

바로 앞에서 소개한 문구는 그람시를 개량주의자나 수정주의자로 보기 어렵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 확실히 그람시는 다른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에 비해 동의가 작동하는 지형인 '시민 사회'를 강조하고, 때로는 시민 사회가 모든 것이라 말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강제력이 작동하는 좁은 의미의 국가(또는 정치 사회), 강제, 지배의 계기를 무시했다고 볼 수도 없다.

그람시 전기에는 노동자들의 파업에 군대가 동원되는 장면이 나온다. 절차적 민주주의를 거쳐 권력을 잡은 무솔리니는 동의를 얻은 채로 권력자가 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권력이 위기에 몰릴 수 있다고 판단될 때는 폭력을 사용한다. 폭력적 상황에서는 대화, 타협, 민주적 절차 등이 공허할 뿐이다. 그람시가 보기에 서구, 특히 이탈리아에서는 기동전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현실이 있었다. <옥중수고>의 편집자들이 말하고 있듯이 "역사 발전의 어떤 시점이 오면 진지전이 기동전에 자리를 물려줄 것이고 그렇게 되면 국가에 대해 정면 공격을 하는 것이 다시금 가능하게 될 것이다."(<옥중수고 1>, 240쪽, '개요'에서 인용)

그람시가 기동전을 강하게 강조하지 않는 이유는 검열을 피하면서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의도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진지전 없는 기동전은 성공하기 어렵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war of position'을 '진지전'이라 번역한 것은 매우 적절해 보인다. 왜냐하면 진지의 뜻이 '언제든지 적과 싸울 수 있도록 설비 또는 장비를 갖추고 부대를 배치하여 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람시의 사상에서 얻어야 하는 교훈은 기동전을 강조한다고 해서 기동전을 펼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무솔리니나 히틀러의 폭력 정치는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 기반 위에서 성립한 것이다. 수많은 대중들이 그들의 정치에 열광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무솔리니나 히틀러는 원래 폭력적인 인간이었다'는 말은 공허하다. 실은 이들조차도 진지전을 펼치면서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지적, 도덕적 지도자로 행세하면서 동의에 의한 지배 및 지도를 행하는 헤게모니를 행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중들로부터 지지를 얻지 못하면 폭력적 정치도 기동전도 이미 불가능하다. 위기에 몰린 적(敵)은 사력을 다해 저항할 것이고 언제든 폭력을 사용할 준비를 할 것이다. 진지전이 기동전으로 전환된다면 성공 여부 역시 대중들로부터, 나아가서는 지배 계급으로부터도 동의를 얻느냐 얻지 못하느냐에 달려있다. 그렇기 때문에 혁명을 꿈꾸는 자들은 지배 계급이 되기 전이든 후든 늘 지도할 수 있어야 한다. 지도한다는 것은 마음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람시는 상부구조를 토대의 부수 현상처럼 보는 경제주의 또는 경제결정론과 늘 대결했다. 세상을 바꿔야겠다는 마음을 먹지 않으면, 그리고 세상을 바꿔야겠다고 마음먹은 자가 다른 인간들로부터 동의를 얻지 못하면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그람시가 생각하는 관념의 힘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오늘날의 지배 계급은 대중들로 하여금 현실에 안주하게 하고 세상을 바꿔야겠다는 마음까지도 사라지게 하는 데 능하다. 그리고 몇 년에 한 번씩 있는 선거에서는 투표를 독려하면서 대중들을 주체로 호명한다. 그러나 지배 계급이 늘 권력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의 발전은 주기적 공황을 해소하는 것이기도 하고 자기 소멸을 준비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나 2010년부터 시작된 '그리스 국가 파산 사태' 등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전조(前兆)이기도 하다. 혁명은 어느 날 갑자기 도둑처럼 찾아온다. 무심코 있다가 이때부터 마음을 먹는다면 이미 늦다. 그람시가 말하는 진지전이란 기동전을 배제한 진지전이 아니라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헤게모니를 얻을 수 없다고 하는 일종의 경고이기도 하다. 다만,

정치 투쟁에서 또 하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 곧 지배 계급의 방식은 흉내 내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흉내를 내다가는 쉽게 복병을 만나기 때문이다. (<옥중수고 1>, 273쪽)

진보 세력이 선거를 전술로 활용할 수는 있다. 그러나 선거를 넘어선 전술, 전략을 갖고 있지 않으면 '그들만의 리그'에 휩쓸려 곤경에 처할 수도 있다. 근대적 의미의 선거 민주주의는 이미 부르주아들의 것이다. 직접 민주주의가 불가능해지면서 벌어진 현상 중 하나는 자신의 손으로 자신이 복종할 대상을 뽑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복종 대상은 따로 있다. 부시(공화당)에서 오바마(민주당)로 대통령이 바뀐 미국, 보수 여당에서 보수 야당으로 정권이 넘어갔던 적이 있는 한국, 대내외적으로 미국이나 한국에서는 질적으로 달라진 것이 거의 없다. 세상의 주인은 정치권력을 쥔 자가 아니라 경제 권력을 쥔 자이기 때문이다.

정치를 넘어서 자본으로 시선을 돌린다면 4·11 선거 결과를 두고 패배니, '멘탈 붕괴'니 하는 말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보수 여당에 반대하는 세력이 표를 더 얻었다면 그것을 '승리'라고 부를 것인가. 진정한 복종 대상을 깨닫지 못한다면 복종하는지도 모른 채 복종하는 것이며 동의하는지도 모른 채 동의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이야말로 지배 계급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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