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학이 살기 위하여는 그의 대상이 죽어야 한다. 대상은 발견된 데 대한 복수를 죽음으로서 하고, 이로서 그를 파악하고자 하는 과학에 도전한다." (<시뮬라시옹>(장 보드리야르 지음, 하태완 옮김, 민음사 펴냄), 29쪽)
애초에 인류학은 제국주의를 위한 학문이었다. 새로이 발견된 암흑과 원시의 땅으로 간 인류학자들은 거기에 보존되어있던 인류의 기원을 탐구하는 한편, 그들이 지배해야할 것들에 대한 정보를 본국으로 전달했다. 인류학자들이 인종주의적인 편견을 버리고 이들을 인간으로 존중하기 시작했을 때에는 이미 수많은 부족 사회들이 변형되거나 파괴된 이후였다. 물론 그 와중에도 "이슬람의 문화가 호전적인 이유는 중동의 척박한 기후의 영향이다"(이것은 나의 중학교 사회 교과서에 분명히 나와 있었던 내용이다)같은 종류의 편향된 지식은 여전히 생산되는 중이긴 했지만 말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보드리야르는 1971년에 내려진 어떤 결정을 보며 인류학을 조소한다. 필리핀에서 8세기 동안 외부와 만나지 않고 보존되어왔던 테이세이데이인들을 다름 아닌 인류학자들의 주도로 '보존'하기로 결정했던 사건이었다. 보드리야르는 이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상은 과학에게는 상실되었지만, 그러나 '처녀성'에는 손상이 가지 않아 앞으로는 안전할 것이다. 희생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과학은 결코 자신을 희생하지 않는다. 과학은 언제나 살해적이다), 자신의 사실성의 원칙을 살리기 위하여 자기 대상을 위장 희생시키는 문제이다. 그 자연적 본질로 응결된 테이세이데이는 인종학에게 완전한 알리바이, 영원한 보증으로 사용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끝나버리지 않을 반-인종학이 여기서 시작되는 것이다." (<시뮬라시옹>, 29쪽)
그는 인류학이 역설 때문에 사망 선고를 받았음에도 그 역설을 역이용하여 살아남는 아이러니를 본다. 요컨대 인류학은 아직도 자신이 대상으로 삼을 "원시"가 남아 있음을 확인하고, 곧바로 그것을 봉인함으로써 그것을 자신의 존속의 이유로 삼았다는 것이다.
더 이상의 탐험하고 발견해야할 원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인류학에게 분명한 위협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류학은 그 시선을 외부가 아니라 내부로 돌림으로써 어떤 전환을 맞이했다. 참여 관찰이나 민속지와 같은 인류학적 방법론들은 하위문화 그룹, 계급과 계층, 지역 등 현대적인 집단들에 적용되기 시작했다. 홈리스들의 생활 양태, 히피들의 삶, 비행 청소년, 퇴락한 탄광촌 같은 곳들이 인류학자들의 새로운 '필드'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냉전 이후 도래한 '이슬람'이나 '중국' 같은 거대한 타자들 역시 인류학의 훌륭한 연구 대상이었다. 오늘 우리는 디스커버리와 내셔널 지오그래픽 같은 채널들을 통해 흥미로운 인류학을 만날 수 있다.
어쨌거나 인류학은 이전과는 다르게 겸손해졌고, 조심스러워졌다. 인류학자들은 대상의 죽음을 면하면서도 대상을 연구하는 섬세한 방법론적 테크닉들을 발전시켜왔다. 몇 겹이나 되는 안전장치와 수많은 우회로들이 마련되었고, 인류학의 윤리에 대한 수많은 규칙들이 등장했다. 문화적 상대주의와 다원주의가 공식적인 입장으로 채택되었고, 편견과 주관적인 가치 판단을 막기 위한 과학적 태도가 중시되었다. 물론 이것으로 모든 딜레마가 해결된 것은 아니겠지만, 제국주의 시기의 과오를 반성하기라도 하듯, 인류학은 소수자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고 애썼다.
부족의 재발견
▲ <우리는 디씨>(이길호 지음, 이매진 펴냄). ⓒ이매진 |
그는 지인을 통해 처음 접해본 디씨, 즉 디시인사이드(☞바로 가기)에서 두 가지 의문을 느꼈는데, "도대체 이 사람들은 무엇인가?"와 "왜 이곳에서 이 사람들은 이런 행동들을 하는가?"(31쪽)라는 질문이었다. 그는 의문에 답하기 위해 2007년 말부터 약 2년간 디씨에서의 참여 관찰을 행한다.
먼저 살펴볼 것은 저자가 사이버스페이스에 대해서 내리는 정의다.
"나의 사이버스페이스에 관한 기본적인 인식은 다음과 같다. 그것은 누군가의 무언가에 대한 어떤 매개물도 아니다." (22쪽) "왜냐하면 사이버 스페이스 속의 가상적인 존재는 그것이 가상화한 현실적인 대상에 관해서는 가상적이지만, 대상에게 단순한 가상성만을 남긴 채 그 현실적 대상을 화면 밖으로 밀쳐버리는 사이버스페이스 속에서는 그 가상적인 것 자체가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24쪽, 강조는 저자)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저자가 디씨에서 활약하는 갤러들의 행동을 분석하는 데에 가장 핵심적인 근거가 된다. 즉, 그들의 행동이 현실에서의 어떤 조건들에 의한 재현이나 그것의 반영이 아니라, 사이버스페이스가 가지고 있는 자체적이고 자기 발생적인 문법에 의해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저자는 '증여'와 '전쟁'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디씨인들의 행동을 설명한다. 돈 한 푼 받지 못하는 '재능 낭비'를 통해 동영상, 음악, 합성 이미지, 그림 등을 끊임없이 생산해내고, 그것을 유포하는 행위는 자본주의적 교환의 논리에 의해서는 설명될 수 없다. 이에 대해 저자는 "사람들은 차라리 도래한 사건의 한복판에서 그 격렬한 감각을 공유하고 싶어 한다"고 말하며, "그리고 이제 그렇게 생산돼 나온 결과물들을, 그 언제 다시 올지 모를 떡밥의 현실화된 파생물들을 아직 '세례 받지' 못한 다른 갤러리의 사람들에게, 또한 디시 외부의 장소들에 전해줘야 한다. 이것이 디시에서 우리가 실제로 맞닥뜨리게 되는 증여의 논리다"(116쪽)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제작자의 명성, 나아가 디씨의 명성을 이 행위의 목적이라고 주장한다.
또 그는 '전쟁'에 대해서 말한다. 전쟁은 디씨 내부의 갤러리 간에도, 디씨와 다른 커뮤니티 간에도, 심지어는 디씨로 대표되는 한국과 투챤넬(2ch, 디씨와 유사한 성격의 일본 커뮤니티 사이트)로 대표되는 일본 간에도 발발한다. 이 전쟁의 역할은 누가 '우리'에 속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모종의 의례와 같은 것이다.
"그 지속적인 전쟁 수행자들은 이제 진정으로 '디시인'이 돼간다. 또는 우리는 차라리 이렇게 말해야 하는데, 그들은 '디시인'이기 때문에 싸우며, 싸우기 때문에 '디시인'이다." (197~198쪽)
또한 저자는 "디시인들은 이미 하나의 동성(同姓)을 가진 형제의식을 보유하고 있다. '우리는 디氏'다. 다시 말해 '우리는 형제'다"라고 주장하며 "더욱이 그 '밖'의 장소들에서 맺는 관계가 형제 집단으로서의 '우리'의 정체성과 정면으로 대응하는 '적대 관계'일 경우 우리의 문제는 더욱 확연하게 드러난다. 즉 우리는, 우리 형제들은, 타자, 즉 다른 형제 집단들과 서로 '적'이 되는 것이다."(143쪽)고 진술한다.
한편, 그가 이러한 증여와 전쟁의 반복 속에서 발견한 또 다른 진실은 디씨가 갖고 있는 '극단적 평등주의'다. 디씨의 갤러들은 '친목 행위'와 '여갤러'에 대한 극단적으로 보이는 공격성들을 드러낸다. 그는 이를 '재생산'에 대한 고려라는 측면에서 바라본다. 갤러리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뉴비'들의 유입이 중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기존의 구성원들에게 친교와 권력이 쌓여 '장벽'이 형성되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욕설과 여성 혐오적 언사들은 그 자체를 지시한다기보다는 이 평등주의를 위한 '제의'의 성격을 띤다. 또 이 평등주의는 디씨인들이 지켜왔던 '민주주의적 혼돈'과도 연관되어 있다.
"이른바 반국가적 양식 속에서 디시인들은 자신의 '대표자(representative)'를 거부한다. 따라서 그들이 진정으로 거부하는 것은 일종의 '의회 민주주의'다. 즉, 디시인들은 이른바 민주주의라는 하나의 제도화된 정치 체계를 거부한다. 디시에서 사람들은 어떤 형태의 '재현(representation)'의 형상이 출현하는 것에도 반대할 것이다. 사람들은 차라리 반 재현으로서 혼돈 그 자체를 지지한다. 디시인들은 '반국가적 혼돈'의 옹호자들이다. 이 맥락에서 그들은 진정으로 '민주주의적'이라 할 만한 어떤 속성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단순히 어떤 '민주적 양식'(대표 또는 재현에 따른)하고는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다. 그들은 민주주의적 혼돈(Democratic Chaos : DC)의 수호자들이다." (311쪽)
결론적으로 디씨는 증여와 전쟁, 그리고 극단적인 평등주의와 민주주의적 혼돈을 통해 자신들을 '디氏인'으로 선언하는 하나의 유사 부족이다. "우리는 디씨"라는 책의 제목은 그래서 이 책의 결론이기도 하다. 디씨인들은 어떤 반영도 재현도 위계도 거부하면서 자신들을 형제로, 그리고 디氏인으로 선언한다.
"흔한 샤느님의 시간 낭비.jpg"
3일 만난 이 씨는 "디시의 공격성과 폭력성에 대해 한쪽에서는 심리적인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소외된 사람들이 불만을 표출한다는 논리를 펴는데 두 가지 모두에 불만이 있었다"고 말했다. (…) "옹호나 비판에 앞서, 우선 그 사람들의 목소리와 내부 논리를 살펴보자는 것이었죠." (<경향신문> 2012년 4월 3일자, '사이버 언어의 위계화 거부는 존재의 함성')
디씨를 비롯하여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인터넷상의 커뮤니티들에서 나타나는 언어와 표현들을 사회적이고 일반적인 언어로 번역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대부분의 경우 그 표현들은 거칠고, 과장되어 있으며, 맥락을 모르면 의미를 발생시키지 않는 것들이다. 그래서 인터넷상의 말과 표현들은 이른바 공론장에 끼어들지 못하고 언제나 주변화되어 있다.
이 목소리들은 특정 집단의 행태를 문제 삼기 위한 근거로, 혹은 자신의 의견을 강화하기 위한 여론으로 취사선택되어 인용되는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아무런 발언권도 얻지 못한다. 때문에 이 책은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말하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게 하기 위한 어렵고 험난한 하나의 시도라는 점에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그 가치만큼이나 많은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 가령 디씨인들은 이 책에 대체적으로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물론 이것은 모든 분석과 재현의 언어들이 갖게 되는 숙명과도 같은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부 사용자들의 댓글에서 저자는 "샤느님"(서울대생을 뜻하는 말)이 되어 있었다. 디씨에는 수능 갤러리와 몇몇 대학교들의 갤러리가 존재하고, "서연고서성한중경외시"로 대표되는 현실의 학벌 권력에 대한 수많은 표현들이 존재한다. "지잡대"라는 말이 등장한 것도 디씨였고, 어느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토로하는 갤러들을 목격하게 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막장"이나 "잉여"라는 단어는 자조적으로 남발되지만 어느 순간 이 언어들은 서늘한 현실로 나타난다.
저자가 학벌 권력의 정점에 놓여있기 때문에 이것에 대해 발언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너무나도 간단히 사이버스페이스를 그 자체로 자생적인 것으로 간주할 때 이미 문제는 발생하고 있다. 사이버스페이스는 물론 자체적인 문법을 가지고 있는 공간이지만, 그것이 현실의 물적이고 정세적인 조건과 온전히 떨어져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령 디씨는 촛불 집회를 전후로 진보와 보수 간의 정치적 격랑에 휩싸였으며, 신규 유입 누리꾼들과 자생적인 보수 세력에 의해 우경화의 길을 겪었다. (물론 이는 디씨의 대표인 김유식의 정치 성향 때문이기도 하다.) 최근 디씨에서 지역주의적 언설과 '고인드립'(죽은 자를 모욕하는 표현물, 주로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것들을 지칭한다)이 필수 요소에 등극하게 된 것은 디씨를 하나의 고립된 모나드로 보는 것에 의문을 제기한다.
뿐만 아니라 디씨에서 창궐하는 여성 혐오적 표현들은 단순히 형제애를 위한 의례의 수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가령 저자는 디씨와 아프리카(☞바로 가기) 사이에 있었던 이른바 '별창 사건'('별풍선 창녀'의 약자. 아프리카에서 개인 방송을 하며 일종의 사이버 화폐인 별풍선을 요구하는 여성 BJ들을 일컫는 말)을 아프리카가 가져가는 잉여 수익의 문제라고 얘기했지만, 오히려 이 사태는 여성 혐오 그 자체를 지시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최근 인터넷에서 빈번하게 사용되는 "보슬아치"라는 단어를 만들어낸 것이 이 사태였고, 디씨의 공격자들은 '너무 쉽게 돈을 버는' 여성들에 대한 분명한 분노를 토해냈다. 이는 자신들이 마주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교환 법칙이라는 질서에 무임승차하는 것처럼 보이는 여성에 대한 분노임과 동시에, 얻을 수 없는 사물로서의 예쁜 여자의 몸과 섹스에 대한 박탈감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발언들을 디씨에서 찾는 것은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저자는 "우리는 디씨"라는 선언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그들이 보이는 부족적 행위들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이를 위해 그는 문화인류학적 개념들과 언어들을 도구로 삼아 디씨에서의 여러 행위들을 해석한다. 그러나 이 개념들은 어떤 면에선 디씨라는 새로운 부족의 탄생을 도출해내기 위한 도식이나 알리바이처럼 느껴진다.
혹시 이 책은 비가시성의 가시성이라는 목적을 지나치게 도덕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히려 필요한 것은 그러한 작업이 드러낸 진실이 흑백을 명확하게 가르기는커녕 더 복잡하고 뒤틀린 것을 지시하고 있을 때 그것을 똑바로 마주할 용기는 아닌가? 요컨대 사회 병리로의 환원에 대한 무리한 변론이 아니라 사실 우리 모두가 비슷한 병을 앓고 있다는 진단과 고백이 더 필요한 것은 아닐까? 중요한 것은 그 내부적 논리의 완결성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병리화함으로써 사회와 그들을 분리하려는 것에 맞서고, 우리의 문제와 이들의 문제가 전혀 다르지 않음을 폭로하는 것은 아닐까?
마지막으로, 나에게는 "우리는 디씨"라는 선언이 오히려 무언가를 잊기 위한 강박적인 선언으로 들린다. 디씨에 만연해 있는 자조적이고 냉소적인 정서들은 물론이고, "잉여"라는 단어가 인터넷 문화와 결합해 현재의 의미로 폭발적으로 쓰이게 된 계기(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주인공의 아버지의 대사 중 "너 대학 못가면 뭔 줄 알아? 잉여 인간이야 잉여 인간!")를 떠올려 볼 때도, 이것은 긍정적이고 주체적인 '선언'보다는 차라리 어떤 '강제'라고 보는 것이 좀 더 합당하지 않을까?
덧붙여서 오늘날의 잉여를 하나의 유사전체성을 이룩하고 있는 자본주의적(혹은 신자유주의적) 질서에 대한 고려 없이 설명한다는 것은 과연 가능한가? 이미 자본이 잉여적인 것들을 훌륭한 증식 도구로 활용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가능성과 잠재성들은 무엇일까? 우리는 오히려 "우리는 디씨"라는 선언의 이면에 있는 불안으로부터, 그 연대의 허약함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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