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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의 작가는 정말로 세르반테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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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의 작가는 정말로 세르반테스인가?

[한만수의 '백 년 동안의 검열'] 루쉰의 이름은 200개

<돈키호테>의 저자 세르반테스가 살던 시기 스페인은 세계 제국의 지위에서 밀려난 직후였다. 자랑하던 무적함대가 영국에게 격파된 이후 쇠퇴 일로에 놓였지만 여전히 왕년의 스페인에 대한 향수에 젖어 있었다. 유럽의 많은 나라들은 과학 기술의 발전, 신교의 흥륭, 출판물을 통한 대중 계몽 등을 통해 근대 사회로 급격히 이동해 가고 있었지만 스페인은 그저 가톨릭을 수호하고 사치스러운 바로크 예술에 몰두했다.

그들이 몰두했던 것이 또 하나 있으니 바로 검열이었다. 다른 나라들의 새로운 근대적 분위기가 스페인에 '감염'되지 않도록 출판물에 대해 엄혹한 검열을 해댔다. 악명 높은 스페인 황금 세기(제국의 쇠락기였지만 예술은 황금기였다. 왕과 귀족들은 왕년의 부를 사치에 쏟아 부었으니 화려한 바로크 예술이 꽃 피었다) 검열이다.

이러한 스페인의 "아 옛날이여" 분위기에, 세르반테스는 "꿈 깨"라고 말하는 셈이다. <돈키호테>는 잘 알려졌듯이 사라져 버린 중세적 세계에의 집착에 대한 조롱인 바, 종교 검열에서 통과되기 어려웠다. 그러니 돈키호테는 미친 사람으로 설정되어야 했고, 작품의 앞부분에는 주로 소화(笑話)들로 채워 넣어야 했다. 검열관들도 사람이니, 열심히 웃다 보면 검열은 느슨해지게 마련이니까. 검열관들도 격무에 시달리는 사람들이니, 앞부분을 열심히 읽다가 뒷부분은 별 것 없겠지, 도장 찍어버릴 수 있으니까.

대부분의 경우 이런 정도면 된다. 검열관의 눈만 피하면 된다. 대중들에게 외면당하면 나중에 문제가 될 계기가 거의 없고,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면 그것 또한 좋은 일이었다. 너무 저명한 책을 금서로 묶기는 정치적으로 부담스럽기도 할 것이고(조정래의 <태백산맥>이 국가보안법으로 고소당했다가 기소 유예 처분을 받은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미 거의 전 국민이 읽어버린 뒤라는 점 때문이었으니까), 그래 봐야 별 효과도 없었다(많은 경우 "금서 목록은 곧 베스트셀러 목록"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시기는 좀 달랐다. 검열에 저촉되면 목숨을 잃는 일도 비일비재했고 아무리 영향력이 큰 책이라도 가톨릭과 왕권이 한통속이 된 현실의 검열 권력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세르반테스는 또 다른 방어막을 쳐야 했다. 어떤 아랍인이 쓴 "돈키호테 데 라만차 이야기"라는 책을 우연히 주웠고, 그를 번역하여 소설로 만들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세르반테스는 미리부터 "이 건 내가 쓴 게 아니야"라고 전제한다. 물론 검열에 걸렸을 경우에는 '세 번을 부인하는 베드로' 정도가 아니라 세 번씩 삼십 번이라도 '나는 절대로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맹세했을 것이다. 갈릴레이의 자기부정을 선제적으로 해버린 셈이다.

▲ 루쉰. ⓒbooks.sina.com
<아큐정전>과 <광인일기>의 작가 루쉰(魯迅)의 필명은 무려 200여 개였다. '루쉰'이라는 이름으로 검열 신청을 하면 읽어보지도 않은 채로 불가 판정을 내렸기 때문에 나온 자구책이다. 소위 블랙리스트에 오른 작가였으니까. 그래서 검열 때마다 다른 이름으로 신청했으니 밝혀진 것만 200여 개가 된 것이다.

검열관들도 바보가 아니다. 이제는 루쉰의 필체까지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이름이 달라도 루쉰의 필체면 무조건 불가. 다시 루쉰도 꾀를 냈다.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서 베껴 적은 뒤에 가명으로 검열 신청을 했다. 이제 검열관들은 '블랙리스트'라는, 그들의 '노동' 시간을 덜어주는 효율적인 검열 제도를 활용할 수 없었다. 루쉰의 것으로 의심되는 글들에 대해 괘씸죄로 엄격한 검열을 해댔지만, 여하간 루쉰은 검열의 컨베이어 시스템적 작동을 교란하는 데는 성공했다.

한국에도 그런 작가들은 물론 많다. "내 작품의 3분지 1은 검열로 잃어버렸다"(김동인)라거나, "내 작품의 독자는 작가 자신 조판공, 교정자, 검열관 이렇게 도합 네 사람에 불과하다"(채만식)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식민지 검열은 철저했지만, 그 빈틈을 노리는 방법 역시 교묘했다.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은 원작자를 일본인 津守(쓰모리)의 조선 이름(김창선)으로 했기 때문에 무사히 통과되었다. <백조> 등 초창기 잡지들도 외국인 선교사들의 이름을 빌려 형식적인 발행인으로 했다. 외국인이 내는 출판물은 사후 검열을 적용 받은데다가 아무래도 검열 또한 느슨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총독부에서는 이름을 빌려주지 말라고 선교사들을 협박했으니, 잡지 발행 때마다 발행인 이름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아동 문학가 윤석중에 의하면 군더더기를 일부러 넣었다가 나중에 빼어버리는 수법도 있었다.

"검열을 들여보낼 때, 삭제를 당할 위험이 있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군소리를 더 집어넣었다가 '검열필(畢)' 도장이 찍혀 나온 다음에 그 대목을 박박 지워 버려 원 글만을 도로 살렸다. 가령 '황국 신민인 우리는 조국과 야마토 민족에 충성을 다할 것이며……'라고 해 놓고는 검열이 나온 다음에 '황국신민'과 '야마토'를 덜어내는 식으로……."

결국 나중에 출판된 지면의 내용은 검열관이 읽은 것과는 거의 정반대의 뜻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런 수법이 발각되자 또 다른 지침이 만들어졌다. 검열을 받은 뒤에는 어떤 글자도 넣지도 빼지도 말 것.

서항석에 따르면 유치진의 희곡 <소>는 공연 불허 판정을 받았다가 검열관과 협의를 거쳐 <풍년기>로 개작했다. 원래의 작품에서 문제가 되었던 지주와 소작인의 갈등을 소작인과 마름 사이의 문제로 바꿔치기하고, 풍년이 들어도 마름의 농간 때문에 소작농은 가난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바꾼 것이다. 서항석이 가운데 들어서 검열관의 집으로 찾아가 절충안을 만들어 유치진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무엇이 문제인지, 어떻게 고치면 될지를 미리 검열관과 상의했다는 것이니, 이렇게 되면 누가 작가인지 모를 지경이 된다. 당장 유치진의 <소>만 해도 서항석, 검열관과의 '공동 저작' 아닌가. 이제부터는 '유치진 서항석 검열관 공저 <풍년기>'라고 불러야 할 판이다.

이렇게 검열의 암흑 시대에 창작된 작품들은, 한 개인의 자유로운 창작이라는 우리의 일반적 관념을 파괴한다. 여러 사람이 함께 쓴 작품이라는 관념, '쓸 수 있었던 것'으로서의 문학이라는 관념을 새롭게 요구하는 것이다. 국가 검열이, 물론 이 정권은 빼고 말하자면, 점차 약화되어 가고 있는(아, '사라진' 이라고 결코 표현할 수 없음이여) 추세 속의 요즘 독자들이 이해하기는 매우 어려운 상황인 것이다.

문학뿐만 아니라 검열이 자행되던 시대의 모든 텍스트들은 이런 골치 아픈 독법을 요구한다. 내가 읽고 있는 이 텍스트는 정말 그 사람 혼자서 쓴 것인가. 그가 쓰고자 했던 것과 일치하는가. 누가 왜 무엇을 쓰지 못하도록 강제했던가. 그는 어떤 지점에서 타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그 타협의 결과, 어떤 작품으로 변모해버린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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