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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의 스타 화백, <중앙일보> 가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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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경향신문>의 스타 화백, <중앙일보> 가서는…

[한만수의 '백 년 동안의 검열'] 돈으로 사람을 사는 검열

<중앙일보>에서 10년 동안 만평을 그렸던 고(故) 김상택 화백은 원래 <경향신문>에서 데뷔했다. 도안을 주로 맡다가 체육 면과 노동조합 회보에 만평을 그리면서 재능을 인정받아 김상택 만평을 시작했는데, 3면에 연재하다가 폭발적 호응에 따라 1면으로 옮겼다. 김상택 만평 보는 맛에 <경향신문> 본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고, 오늘은 김 화백이 무엇을 그렸을까는 기자들 사이에 적지 않은 화제가 되었다. 김상택 만평을 남들보다 먼저 보는 재미도 <경향신문> 다니는 맛 중의 하나였다.

▲ 김상택 화백의 '정동 스포츠 만평' 1988년 4월 1일자. ⓒnaver.com
'경상도 싸나이' 답지 않게 김상택은 말수가 적었으며, 늘 겸손하고 검소했다. 매일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밖에 나가면 1시간은 걸리는데 구내식당에서 먹으면 20분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그 시간도 아껴 만평에 쏟는다는 것. 인기 만평가이니 이런저런 만나자는 사람도 많았지만, 거의 사양했다고 한다. 만나자는 사람은 유력자이기 쉽고, 그 사람을 만나면 아무래도 만평에 영향을 끼칠 테니까. 그의 만평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열정과 정결성 덕분이기도 하리라.

그러던 그가 1998년 <경향신문>을 떠나 <중앙일보>로 갔다. 물론 직업 선택은 자유이다. 하지만 시기가 그리 좋지 않았다. 하필 <경향신문>이 한참 어려울 때였다. 우여곡절 끝에 정부로부터 독립해 한화그룹으로 넘어갔다가 다시 사원 지주회사로 독립하려던 시기, 한화와의 분리 협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이었다. 월급이 제대로 나올지 걱정해야 했으며, 한화와 결별하면 더 악화되리라고 다들 생각하고 있었다. 김상택 화백의 이적은 많은 기자들에게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중앙일보> 고위층의 직접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둥, 거액의 스카우트 비를 받았다는 둥, 갑자기 경쟁사로 옮겨가서 만평을 싣기는 차마 어려울 테니 충분히 쉬고 오라고 했다는 둥(그래서인지 그는 만 1년을 쉬다가 1999년에 <중앙일보> 만평을 시작했다) 이런저런 소문이 돌았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어쩔 수 없었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늘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했던 것은 그래서였던가 싶기도 했다. 성토하는 기자들도 있었지만, 자조하는 기자들도 있었다. "그래 능력 있는 사람은 떠나가는 거지 뭐. 한국에서 무슨 독립 언론이야." 물론 김상택 말고도 많은 기자들이 떠나갔지만 가장 커다란 타격은 김상택이었고, 그래서 다들 아파했다.

그러나 만평이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예술이다. 만화가란 동전만 넣으면 만평을 토해내는 자동 판매기가 아니다. <중앙일보>가 김상택을 스카우트해 간 것은 이를 간과한 것이 아닐까. 이직 이후 그의 만평은 점차 생기를 잃었다. '김상택 표' 풍자의 발랄과 통렬은 아무래도 '독립 경향'이라는 자양분 속에서만 활개 칠 수 있는 것이었다. <경향신문> 시절 그의 만평에 대해 들어오는 모든 압력은 차단되었다. 국가보안법으로 피소되기도 하고 청와대 수석에게 명예 훼손 혐의로 고소당하기도 했지만, 전 편집국이 그를 옹호하고 지지했다. 그는 마음으로부터의 성원을 한껏 받으면서 그릴 수 있었다. <중앙일보>에서도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경향신문> 시절 1면에 연재되던 만평이 3면으로 밀려난 것은, 독자들의 호응이 그만큼 줄어들었다는 증거는 아닐까.

이것저것 눈치 볼 게 많을 때 만평은 숨쉬기 어렵다. 삼성과 재벌의 눈치를 보아야 할 때, 언론 자본을 통해 이리저리 가해졌을 정권의 눈치도 동시에 보아야 할 때, 비판 정신은 질식당한다. 생각해 보라, 한국에서 정권과 재벌을 빼고 무얼 비판한단 말인가. 그야말로 '앙꼬 없는 찐빵'이 될 도리밖에 없지 않은가(<한겨레>의 간판 칼럼니스트였던 정운영도 비슷한 시기에 <중앙일보>로 옮겼는데, 이 분의 칼럼도 영 매가리가 없어져 버렸다).

<경향신문> 시절에 김상택은 만평에 영향을 받을까봐 외부 사람과 밥조차 먹기를 꺼려했다. 그 염결성이 신문사의 든든한 방어막과 힘을 합쳤을 때 그의 만평은 독립적이고 창조적이었다. 하지만 <중앙일보>에서의 김상택은, 자신의 염결성을 유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신문사 내부적 검열에 시달려야 하였을 터이다.

자본은 이렇게 사람을 소모시킨다. 일상을, 생활을 통해 영혼을 갉아먹는다. 그래서 김수영은 이렇게 읊었나보다. "이십 원 때문에 일 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일 원 때문에/ 바람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모래야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고궁을 나오면서' 부분)

만화 연구가 김낙호는 <중앙일보> 시절의 김상택 만평은 음모론에 기대면서 정치 혐오를 불러일으킨다고 말한다. 만평의 얼굴 윤곽선이 불분명해지면서 누구인지 몰라볼 정도가 되어 버렸으며, 그래서 얼굴 옆에 이름을 써넣어야 하게 되었다고도 한다(<인물과사상>). 정치인들의 얼굴을 누가 누구인지 모를 정도로 그린다 함은 "정치인들은 다 그놈이 그놈"이라는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그 정치 혐오가 누구의 이익을 부르는지는 더 말할 필요조차 없겠지.

내가 아는 김상택은 세계와 역사에 대한 이론 무장이 썩 잘 되어 있는 분은 아니었다. 미술학과를 졸업해 영화판에 머물다가 '호구지책을 위해' 신문사에 입사했던 경력만 보아도 대체로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경향 시절에는 주위에 사람들이 있었고 신문사의 분위기도 있었다. 특히 매일 열리는 간부회의를 통해 만평가가 제공받는 각종 정보와 그에 대한 해석은 만평의 좋은 소재가 되는 바, 경향 시절에 접할 수 있었던 해석과 <중앙일보>에서 접하게 되는 그것은 꽤 많은 차이가 있었으리라 본다. 그 차이가 그의 만평을 사뭇 다른 질의 것으로 만든 중요한 힘 중 하나였겠지. 김상택은 경향을 떠나면 김상택일 수 없었다.

그렇다면 김상택은 무엇을 얻었던가. 잘 모르겠다. '살림 좀 나아진' 것 말고 다른 무엇을 얻었던 것인지. 한때 호형호제했던, 참 좋아했던 김상택 형의 만평이 힘을 잃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의 어깨를 짓누른 삶의 무게를 떠올리곤 했다. 참으로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자본의 검열이란 이처럼 다양한 면모를 지닌다. 저항하기도 어렵고 비판하기도 만만치 않다.

김상택에 대한 비판은 일방적인 돌팔매질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죄 없는 자가 돌을 던지라 하지 않았던가. 그 가르침은, 돌을 던지지 뜻은 아니로되, 말라는 돌을 던지기 전에 자신의 내면에 죄가 없는지를 먼저 반성하라는 뜻일 터이다. 김상택에 대한 비판은, 기실은 나 자신의 내면을 향한 반성이어야 한다. 우리는 얼마나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우습지 않으냐 일 원 때문에 … /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김상택의 빈자리는 김용민이 대신 채웠다. 대학가에서 만화깨나 그린다는 명성이 자자했다고는 해도, 김상택의 공백을 메울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왕년의 김상택 만평보다 낫다는 평가도 적지 않다. 김용민은 독립 경향과 자신의 세계관이 잘 어울린다. 그처럼 예술가에게 행복한 터전이 또 있을까. 그의 만평이 지니는 힘은 누구에게도 검열당하지 않는, 이웃의 사람들로부터 전적으로 지지받는 예술가만이 누릴 수 있는 힘이다. 그럴 때 예술가는 행복하다.

김용민은 '조중동'으로 떠날 사람이 아니리라 생각한다. 또 만에 하나 그가 떠나더라도 또 다른 젊은이가 그 뒤를 이으리라 믿는다. 역사란 이렇게, 누군가가 지쳐 떠난 자리를 또 다른 누군가가 메워주면서, 조금씩 진전해오지 않았던가.

옛 동료에 대해, 그것도 고인이 되어버린 분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나니 영 씁쓸하다. 언젠가 직접 만날 기회를 만들어 하고 싶던 말인데, 너무 늦게 이런 자리에서 해버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형과 나누고 싶던 이야기는 결국 이런 말이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톨스토이)

김상택 선배, 이제 이승에서 있던 일들일랑 훨훨 떨쳐버리셨겠지요? 언젠가 다시 만나는 날, 쓴 쏘주나 한 잔 하시렵니까. 피차 술은 잘 못하지만, 아주 가끔은 그냥 취하고 싶은 날도 있게 마련 아닙니까. 형, 살아내기가 정말 만만치 않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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