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간기 방식은 일제 식민지 시기에 생겨났다. 그 때 검열은 사전 검열과 사후 검열로 나뉘어졌다. 잡지의 대부분과 모든 단행본은 원고로 검열 받은 뒤에 인쇄해야 했고, 신문은 아무래도 속보성 때문에 원고 검열이 어려우니 '인쇄와 동시에' 검열 받도록 했다. 사전 검열이라고는 하지만 원고 검열로만 끝나는 게 아니라 인쇄 후에는 다시 검열을 받아야 했다. 검열 지시가 이행되었는지도 확인하고 또 그 사이에 시국이 바뀌었으면 추가로 검열해야 할 필요도 있었으니까. 그뿐 아니라 단행본의 재판이나 삼판을 찍을 때도 다시 검열했다.
이렇게 철저하게 검열하고자 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이중 삼중의 검열 때문에 우리는 검열 당국이 어떤 것을 삭제하고자 했는지를 확인할 수도 있다. 초판에 있다가 재판에서는 사라진 내용도 확인할 수 있고, 드물게는 원고 검열의 흔적을 확인할 수도 있다. 일간 신문의 경우는 지방판(초판)과 서울판이 다른 경우도 자주 있으니 더욱 그렇다.
▲ <일제시대 식민지 압수 기사 모음>(정진석 엮음, LG상남언론재단 펴냄). ⓒLG상남언론재단 |
일제 후기로 가면서 신문들은 친일적 지면으로 바뀌지만 적어도 1920년대 중반까지는 이런 식의 反(반) 검열 의지가 충만했다. <조선일보>, <동아일보>에도 이런 시절이 있었던가 싶겠지만 사실이 그렇다. 물론 두 언론의 사주들의 의지 덕분은 아니고, 일장기 말소 사건이 그랬듯이, 몸담았던 기자들의 저항 의지에 힘입은 것이었다. 편집권 독립이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지는 여기서도 확인된다.
잡지에서도 비슷한 노력이 적지 않았다. 천도교 잡지였던 <개벽>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널리 알려진 이상화의 저항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개벽>에 실렸다가 통째로 압수된 작품이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오늘날까지 남아있는가? 잡지를 검열 받지 않은 채로 미리 우송한 덕분이다. 물론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일이니까, 천도교 간부 등 믿을 만한 독자들에게만 보냈다. <개벽> 편집진은 '인쇄일'을 곧 '발행일'로 만들어버린 셈이다.
해방 이후라고 사정이 바뀐 것은 물론 아니다. 2판 이후 신문 지면이 바뀌는 일은 흔했다. 예컨대 윤영옥 화백의 만화 <까투리>(1972년 6월 19일)는 1판에서 문제가 되자 2판 이후 다른 것으로 교체되었다. 애당초 "(망하지 않으려면) 농림부에서 권장한 사업만 안 하면 되요"라고 되어있던 대사를, 내부 검열을 거치면서 농림부 눈치를 보느라 '관계 당국'으로 바꾸었는데, 그게 오히려 화를 불렀다. '관계 당국'이라니 새마을운동에 트집을 잡는 것 아냐? 이렇게 되어 윤화백은 해직되고 말았다.
갑자기 무슨 원고가 있어서 대체하느냐고? 그런 걱정은 할 필요 없다. 유사시에 대비해서 만평을 미리 준비해놓는 것은 만화가들의 생존 전략이었다. 예비 만화는 풍자 대신에 누구도 비판하지 않는 유머 만화, 또는 만만한 사람만 비판하는 것이었다. 이날 2판에서 대체된 만화는 버스 안내양의 불친절을 풍자하는 것이었다. 버스 안내양은 '관계 당국' 대신에 한밤중에 불려 나와서 엉덩이를 걷어차인 셈이다.
정부 기관 뿐만 아니라 각 기업에서도 1판에 주목하는 건 마찬가지이다. 회사나 사주의 이미지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은 없나 검토하는 것은 홍보부 직원들의 주된 업무 중 하나였다 (오죽하면 1판을 없애자는 논의가 제기되었을 정도이다). 문제가 될 기사를 발견하면 백방으로 그것을 수정하고자 노력했다. 물론 광고와 연계한 압력이 주종을 이루었다. 광고를 주지 않겠다는 협박, 내일 당장 얼마어치 광고를 주겠다는 회유 등 다양했다. 특정 기업에 불리한 기사가 1판에 실렸다가 2판에서 누락된 자료들과 그 후에 해당 기업의 광고가 실린 상황을 조사하면 이런 영향 관계를 실증할 수 있을 터이니 신문학도의 좋은 연구 과제가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관계 당국'이나 기업의 요구와 절충하려는 중간 간부들(또한 광고국)과 자신의 기사를 살리려는 일선 기자 사이의 갈등은 고조될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고성이 오가는 일까지 없지 않았다. 2판에서 사라지거나 바뀐 것은 잘 찾아보면 눈에 보이지만, 바뀌지 않고 남아있는 것은 이런 투쟁 끝에 살아남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다. 사정이 이러하니,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노력이 필요하고, 그것들을 소중한 것으로 기억해야 마땅하다.
이렇게 우리의 선배들은 자신의 '혀'를 지키기 위해 교묘한 방식의 반(反) 검열 행동을 지속했으며 그 흔적은 아직도 생생히 남아있다. 물론 발각되면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 했음에도 그리했다. 승진 등에서 각종 불이익을 받을 것이 눈에 뻔히 보임에도 그 길을 선택했다. 곳곳에서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압박당하고 있는 오늘, 그분들이 왜 그렇게 했던가 새삼 되새기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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