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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탄십용사, '날조'로 탄생한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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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탄십용사, '날조'로 탄생한 신화!

[한만수의 '백 년 동안의 검열'] 전시 검열과 기자의 '소설' 쓰기

1931년 일본 수상 하마구치(濱口)는 한 우익 청년의 총탄에 쓰러진다. 배후에는 일본 군부가 있었다. 하마구치는 만주 침공(흔히 만주사변이라는, 침략성을 완화하기 위한 모호한 이름으로 불린다)에 소극적이었으며 군부는 그게 문민 정권의 무기력이라고 판단하였다. 하마구치가 쓰러지자 군부는 마음 놓고 전쟁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 총성은 만주 침공과 일본의 군국화를 알리는 '신호탄'인 셈이었다(요즘도 우리는 달리기를 할 때 '총성'과 함께 시작한다. 왜 하필 그래야 할까).

다 알다시피 1930년대는 세계 대공황의 시기였다. 세계 곳곳에서 공장은 문을 닫고 끼니를 구하려는 실업자의 줄이 길게 늘어섰다. 제국의 대열에 맨 마지막으로 합류한 일본은 아직 체력이 미약했으니 더 일찍 공황이 시작되었고 더 심각하게 공황을 거쳤다. 소위 쇼와(昭和) 공황.

그 공황을 타개하기 위해 일본은 만주를 침공했다. 공장은 군수품 생산을 위해 다시 힘차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군인으로 전장에 나가고 군수품 공장에 취직할 수 있었으니 실업자가 생길 리 없었다. 이 침략 전쟁에 힘입어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빨리 공황 탈출에 성공했다.

일본 경제는 이제 소위 '전쟁 고원 경기'에 접어들었다. 경기란 늘 상승과 하강의 곡선을 그리게 마련이지만 전쟁 때는 활황 국면만이 지속되니 경기 그래프가 마치 개마고원처럼 최절정에서 지속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자, 상품 광고 역시 크게 늘어났다. 그 광고 수익을 빨아들이면서 언론 자본들 역시 살판이 났다. 어디 광고뿐인가. 전황 보도는 수지맞는 뉴스 상품이었으니 신문 구독률과 라디오 청취율도 극대화되었다.

문제는 검열이었다. 전시 검열은 평시 검열보다 대폭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 적군에 이로울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전황 보도는 극도로 통제되었다. 군부에서 공식적으로 제공하는 정보 말고는 보도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언론은 다른 모든 상품과 마찬가지로 차별성을 지녀야 했다. 군에서 제공하는 똑같은 자료를 토대로 다른 신문들과 차별화된 기사를 만드는 유력한 방식은 소위 연성화(軟性化), 즉 기사의 소설화였다.

군 당국에서 제공하는 전황 정보를 토대로 삼되 기자들은 작문을 시작했다. 물론 전시 검열을 통과해야 하므로, 군부의 입맛에 맞는 작문이어야 했다. '총후 미담'들이 쏟아져 나오고, 소설인지 기사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기사들이 급증하게 된다. 일본 초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되었던, 러일 전쟁에 출정하는 병사를 늙은 어미가 배웅하는 '이타로야'같은 것은, 좀 더 이른 시기의 것이긴 하지만, 대표적인 보기이다. "이타로야, 그 배에 타고 있으면 총을 위로 들어 올려 봐라." 총을 올리는 병사가 있자 노모는 말한다. "집안일은 아무 걱정 말아라. 너는 천황께만 충성하면 된다. 알아들었으면 다시 총을 들어 올려라." 남루한 행색의 노모는 50리 길을 걸어온 판이었다, 이 장면을 보는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운운.

'이타로야'는 거의 작문이었다. 이 시기 러일 전쟁에서 일본군은 고전을 면치 못해 5만여 명 중에서 1만6000명의 사상자를 낼 정도였고, 이타로가 타고 간 배에도 많은 부상병들이 실려 왔었다. 하지만 부상병이 돌아왔다는 내용의 기사는 아예 본사에까지 전달조차 되지 않았다. 기자는 전보로 보냈지만, 우체국의 전보 검열에서 차단되어 버린 것이다(이 사실은 우연히 헌책방에서 발견된, 미처 없애지 못한 <전보 검열> 대장을 통해 확인되었다. 증거가 없는 무수한 검열들은 도대체 무엇을 만들어 낸 것일까).

이런 식으로 소설 쓰기 식 전쟁 보도를 통해 전쟁과 군국주의를 미화하는 경향은 특파원을 직접 전쟁터에 보내, 올림픽 보도하듯 전황을 중계했던 일본 언론에서 두드러진 현상이었다. 종군 기자 대부분은 전쟁터로부터 몇 십 킬로미터 떨어진 안전한 참모부에 앉아서 군인들이 전달해주는 소스를 토대로 기사를 작성하였지만, 손에 잡히는 듯 눈으로 본 듯 묘사했다. 물론 애국정신으로 불타서 죽음의 두려움도 초월해내는 병사들을 그리는 군국주의의 고양이었다. 기사는 상상력과 창작적 소양에 달려있었다. 소설의 얼개는 군부에서 제공하고, 살을 붙이는 것은 기자들의 몫이었다.

그 일본 언론의 '총후 미담'의 기사화 모델은 한국의 언론에도 점차 수입되었다. 한국 전쟁을 무대로 하는 전쟁 미담 '육탄십용사'의 경우는 그 좋은 보기이다. 기억하는가. 비 오듯 쏟아지는 적탄, 굳건한 토치카, 자살 특공대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판단하여 자신을 보내달라고 요구하는 병사, 인간적 고민에 빠진 지휘관, 끝내 토치카와 함께 산화한 열 명의 용사들. 교과서에도 실렸고 군가로도 만들어지고 곳곳에 동상이 섰던 열 명의 젊은이들.

▲ 파주 통일공원에 있는 육탄십용사 동상. ⓒdoopedia.co.kr

육탄십용사는 날조였다고 한다. 십용사는 '산화'한 게 아니라 길을 잃어 포로로 잡혔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석원 장군이 지휘 책임을 물어 소대장을 사형시키라고 격분하자, 중간 지휘관이 허위 보고를 통해 자발적 전사로 처리하기로 결정한 데서 그 '미담'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물론 그 이후에는 '글쟁이'들이 나서서 살을 붙이고 생생하게 묘사해냈다.

대한민국 국방부 장관을 지낸 박병권의 증언으로, 대한민국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6·25 참전자 증언록>(2003년)에 실린 내용에 따르면 그렇다. 그러나 이런 증언들은 당시에는 어떤 국민에게도 전달되지 않았으며 1964년에야 나온 박병권의 증언 역시 별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국방부는 나중에 공식적인 한국전사를 편찬하면서 이 회고는 묵살해버렸다.

포로가 된 것이 아니라 자살 특공대로 산화했다고 미화함으로써 현장 지휘관은 총살을 면했으며, 일본육사 출신 김석원은 이승만의 신임을 샀다. '십용사'의 가족들도 불이익보다는 이익이 더 많았겠지. 하지만 국민들은 어찌되는가. 몇 십 년을 속고 살아야 하는 국민들은 무엇이 되는가.

육탄십용사 미담은 그 후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박병권의 증언과 학자들의 이의 제기는 찻잔 속의 태풍에 머물렀고 교과서는 무소불위의 힘으로 국민들의 내면을 조정했다. 일제 시기의 총력전이라는 파시즘 체제를 만들어낸 힘 중 하나가 총후(銃後) 미담과 그를 만들어낸 총후(銃後) 검열이었다면, 독재 시기 대한민국의 그것은 전쟁 검열과 전쟁미담으로 이름만 바꾼 셈이다. 이승복 신화는 또 어땠던가. 누가 그 '소설'의 원저자일까.

육탄십용사 신화 자체부터가 일본 모델을 이름만 바꾼 결과였다. '육탄삼용사'. 그러나 이 신화 또한 나중에 그 전말이 밝혀진 바 있다. 사실은 여기저기서 전쟁과는 별 관련 없는 사고 따위로 숨진 병사들의 이름을 빌려 일본 정보부가 쓴 '차명(借名) 소설'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삼용사 신화도 신문에 대서특필되었고 가부키의 소재가 되었으며 일본 교과서에 실리는 등 광란적 열기를 불러왔다.

전쟁을 원하는 국민은 없다. 전쟁을 해야 공황에서 벗어나고 일자리를 얻을 수 있게 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전쟁을 통해서 자신의 부와 권력을 확대 재생산할 수 있는 전쟁 상인과 모리배 정치인들이 전쟁을 만든다. 그들을 전쟁으로 몰고 가기 위해서는 교묘한 상징 조작이 필요하다. 검열만으로는 불충분하니까 조작과 선전에 나서야 하는 것이다.

물론 전쟁은 모든 물자를 급격한 속도로 소비한다. 한국 전쟁의 배후 군수 기지 노릇을 했던 일본이 그 덕분에 패전의 폐허에서 벗어났다고 하지 않던가. 그래서 공황 탈출책으로 유력하게 동원되어 오기도 했다. 그렇지만 전쟁은 언젠가 끝나게 마련이고 그러면 다시 소비는 줄어들며 다시 공황을 맞는다. 그때쯤 정치가와 기업인은 다시 전쟁 카드를 만지작거린다. 일본제국은 끝없이 침략 전쟁을 벌여야 하지 않았던가. 미국 경제가 침체에 빠지면 세계 어느 곳에선가 전쟁이 일어날 징후라고들 하지 않던가. 한반도는 앞으로도 안녕할 것인가.

불황-전쟁-불황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끊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악순환 없이도, 아니 악순환을 끊어내야만, 우리는 '잘 살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 등 계기가 있을 때마다 무수히 볼 수 있는 "그래 한번 붙어보자. 평양을 불바다로 만들어 줄 테다" 식의 댓글은 불길하다. 전쟁을 무슨 게임인 듯 착각하는 게 아닌가 싶다.

'침몰하는 제국' 미국과 '떠오르는 제국' 중국 사이에 한반도는 놓여있다. 세계 제국의 교체기에는 항상 전쟁이 있어왔다. 가뜩이나 불안한 국제 정세 속에서 국민들의 대북 적대감까지 증폭된다면 어찌될 것인가. 이런 즉자적 반응과 적대적 의식을 만들어낸 주요한 힘 중 하나가 육탄십용사 등 '전쟁미담', 아니 '전쟁 괴담'에 있을 터이다. 전쟁 과정에서 날조된 군국주의 미화의 괴담들이 다시 전쟁이라는 현실을 만들어낸다. 오싹해지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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