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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후' '라퓨타' 없는 <걸리버>, "우리는 '애'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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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후' '라퓨타' 없는 <걸리버>, "우리는 '애' 됐어!"

[한만수의 '백 년 동안의 검열'] 어린이를 위한 검열?

아직 미성숙한 인격을 지닌 어린이나 청소년에게 바람직하지 않은 정보들은 어떤 사회에건 있게 마련이다. 이를 적절히 차단하는 일도 불가피하다. 하지만 어느 정도까지를 금지할 것인가는 늘 논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으며, 대부분의 경우 금지는 과잉되게 마련이다. 한번 금지를 시작하면 가속도가 붙게 되는 것이다. 법조문이 끝없이 복잡해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검열이란, 그것이 사회적 합의에 의한 것이라 하더라도, 항상 최소화의 법칙에 따라야 한다.

어린이에 대한 정보의 과잉 금지는 동화라는 이름의 장르가 만들어질 때부터 드러났다. 대표적 보기로 그림 형제의 동화, 즉 <그림 동화>는 설화를 자신들의 잣대로 걸러버린 결과이다. 잔인하거나 성적이거나 사회 비판적이라고 판단한 대목들은 모두 잘라버렸다. 설화 자체가 당대의 사회 상황을 문학적 우회기법에 의해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인데, 동화로 만들어지면서 다시 한 번 간접화되고 삭제되어버린 것이다. 세계적 베스트셀러인 <그림 동화>는 수천 년 동안 인류가 만들고 향유해 온 위대한 유산으로서의 설화를, 단 두 사람이 멋대로 재단해 버린 결과이다.

하지만 그들의 삭제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삶은 여전히 잔인하며, 사회 모순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성적인 표현은 동화가 아니라도 도처에 난무하며, 성이 없이는 인간은 생식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동화 속에서는 여전히 세상은 아름답고 순수하기만 할 뿐이다. 과잉 금지에 의해 삶과 문학의 괴리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오덕이 "동심 천사주의"라는 용어로 비판했던 핵심도 바로 여기에 있다. 어린이는, 그들도 이 세속 사회의 일원임에도 불구하고, 천사처럼 간주된다는 것. 동심이란 어린이들이 실제로 가지고 있는 마음자리라기보다는, 어른들이 갖고 싶은(그러나 더 이상 가질 수 없는) 순수의 관념을 어린이에 투사한 결과에 불과하다.

오히려 아이들은 이 '거대한 위험의 세상'에서 살아갈 준비를 해야 한다. 게다가 아이들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세상 물정을 잘 알고 있다. 착한 어린이들로만 가득 찬 '동심 천사주의 동화'는 어린이들에게 문학이란 현실과는 거리가 먼, 한낱 거짓말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갖도록 만든다.

아동용 <걸리버 여행기>에는 원작의 사회 비판적 내용들이 완전히 사라졌다. 조너선 스위프트는 이 작품을 심프슨이라는 가명으로 출판했다. 선동죄와 명예 훼손죄를 걱정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인쇄업자가 감옥에 갇히는 것을 각오할 용기를 갖게 되면 출판해볼 생각"이었던 그는, 출판업자에게 먼저 변호사와 상의하라고 충고했다. 그럼에도 영국에서 발간된 이후 스위프트는 원문이 심하게 난도질당하고 덧붙여지거나 삭제되었다고 비판했다. 각오했던 것보다 너무 심하게 가위질된 것이다.

<걸리버 여행기>는 여행과 이국 취미를 빌려와서 당대 영국의 사회상을 비판하고 있다. 소위 '문학 당의정설'에 따르면, 사회 비판을 위해서 여행기라는 눈요깃거리를 일종의 설탕 옷(당의) 삼아 입힌 셈이다. 그런데 당신이 읽은 <걸리버 여행기>는 어떤가. 사회 비판이 한 줄이라도 남아있던가. 그저 소인국과 거인국을 여행한 신기한 이야기 뿐 아니던가. '당의정' 중에서 '약'은 사라지고 '설탕 옷'만 남아있는 꼴이다.

▲ <걸리버 여행기> 제4부 '말(휴이넘)들의 나라'의 삽화. '야후', 즉 비열한 '인간 족'들이 걸리버의 주위에 몰려오는 장면이다. 휴이넘의 언어에는 권력 정부 전쟁 법률 처벌 등의 많은 것을 설명할 단어가 없었다고 걸리버는 전해준다. ⓒ문학수첩
<걸리버 여행기>에서 풍자의 백미는 소인국 거인국 이야기가 아니라 말(馬) 나라, 즉 휴이넘의 나라 이야기이다. 이곳에서 인간은 '야후'라고 불리는 야만적이고 흉측한 존재에 불과하다. 휴이넘, 즉 말 종족에게 사육당하고 있다. 그 휴이넘에게 자신의 고국 영국을 소개할 때 걸리버는 이렇게 말한다. 영국에서 군인이란 "자신을 결코 공격한 적이 없는 동족을 가능한 많이 죽이도록 고용된 야후"이다. 영국의 변호사들은, "하얀 것을 검다고, 검은 것을 하얗다고 증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전문 용어를 사용하는 기술을, 돈을 벌기 위해 배운 사람들"에 불과하다.

또한 영국에서 "병약한 육체와 여윈 얼굴, 누렇게 뜬 피부색이 귀족의 혈통이라는 표시다. 귀족이 건강하고 훌륭한 외모를 지니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진짜 아버지가 시종이거나 마부였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기 때문이다"라고 야유한다. "장관이 될 수 있는 방법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은 공공 집회에서 궁중의 비리에 대해 열성적으로 반대하는 것이다. (…) 현명한 국왕은 그런 사람을 고용한다. 그런 정열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국왕의 생각에 가장 잘 순종하니까"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걸리버 여행기>를 출간하려면 콩밥 먹을 준비가 되어야 한다고 스위프트가 말했던 까닭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한국에 이 걸작을 처음 번역한 것은 최남선이다. 그의 번역에서 걸리버는 거인국 소인국만 여행했을 뿐이다. 그 이후 한국의 걸리버는 '말들의 나라 휴이넘'이나 '하늘을 나는 섬 라퓨타'는 가본 적이 없는 것으로 되었다. 휴이넘이나 라퓨타로 여행하기 전에, 즉 거인국과 소인국 기행에서도 스위프트는 정치적 비판을 제법 섞어두었지만 그것들도 말끔히 사라졌다. 예컨대, 거인국 왕의 이름을 빌린, 오늘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 이런 구절.

"그들은 국회의원의 자격을 갖추는 데 있어 무지와 태만, 부도덕이 적절한 요소라는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그리고 그대의 나라(걸리버의 나라, 즉 영국)에서는 온통 법을 악용하고 왜곡하며 회피하는 일에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는 자들이 있으며, 이들에 의해 법이 가장 잘 설명되거나 해석되고 있으며 적용된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잘 알려주었습니다."

다들 잘 아는 대로 최남선이 삭제한 두 나라, '라퓨타'(미야자키 하야오의 명작 <천공의 성 라퓨타>의 모티프가 되었다)와 '야후'는 오늘날 <걸리버 여행기> 만큼이나 유명한 문화적 아이콘이다. 우리나라에는 1992년에 와서야 제대로 완역되었지만(신현철 옮김, 문학수첩 펴냄), 아직도 많은 한국인들은 라퓨타와 야후가 <걸리버 여행기>와 관련된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어린 시절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임에도 그러하다. 검열은 스위프트가 남긴 걸출한 인류적 유산의 상당부분을 제거해버렸으며, 불완전한 자신의 지식을 완전한 것으로 착각하도록 만드는 집단적 기억착오를 만들었다.

이 모두를 최남선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공정치 못할 것이다. 그는 이와야 사자나미(巖谷小波)의 아동용 문고본 <소인도(小人島)>와 <대인국(大人國)>(1899년)을 재번역했을 따름이다(물론 이 작품의 비판성을 삭제하여 아동용으로 출판하는 작업은 서구에서 이미 시작되었으니 이와야의 판본 역시 그것을 번역했을 터이다). 소위 중역(重譯)이다. 정보도 시간도 자원도 충분치 못했던 최남선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그는 순 한글문체를 채택하는 등 당시로서는 결코 쉽지 않았던 노력을 기울여 번역했다. 예컨대 '소인국'은 '알사람 이야기', '대인국'을 '왕사람 이야기'로 옮겼다. 요즘 감각으로도 쉽지 않은 번역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더 큰 잘못은 그 이후에도 오랫동안 최남선의 번역에만 기대어 '검열된 걸리버'를 재생산한 육당의 못난 후예들에게 있지 않을까.

새로 완역된 <걸리버 여행기>는 제법 팔리고 있긴 하지만, 기대했던 것만큼은 아닌 듯하다. 이미 읽은 것(읽었다고 생각하는 것)을 무슨 맛으로 다시 읽겠느냐는 생각들인 모양이다. 어린이를 위한 검열이었다지만, 현실 속에서 검열의 효과는 성인들에게도 그대로 작동되는 것이다. 정치적 검열은 모든 인간을 '아동'으로 만들어버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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