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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아 살해자'에서 '미녀의 남편'으로…오타쿠의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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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여아 살해자'에서 '미녀의 남편'으로…오타쿠의 변신!

[안은별의 '만화경'] <오타쿠의 비디오>, <감독 부적격>

오타쿠란 누구, 혹은 무엇인가? '턴에이 건담'과 '건담 Ez-8'의 디자인적 공통점과 차이점을 읊을 수 있는 사람? 흠칫, 당황, 삐질, 울먹울먹. 만화에 나오는 효과음이나 의태어를 중얼거리는 사람? 큰 눈을 가진 오타쿠풍 그림을, 정치 인생을 건 후보 명함에 넣었던 '황제' 차명진은? (참고로 낙선했다.) 고교 시절 코스프레 사진은 없앴지만, 여전히 '일반인 코스프레' 중인 나는? 뭐라고 정의해도 좋다. 원래는 '당신(お宅)'이었으니까.

'당신', '댁'이라는 뜻을 지닌 이인칭 대명사였던 이 말은, 현재 게임·애니메이션·만화·특촬물·PC, 그밖에 연관 서브컬처에 광적으로 탐닉하는 일군의 무리와 그 문화를 통칭한다. 그러나 일본에서도 각 세대마다 다르게 정의되어 왔고, 일반 명사 '오타쿠'와 앞에 '철도'나 '밀리터리'가 붙어 'XX오타쿠'(한국에서는 O덕)라 불리는 영역이 차별되며, 한국의 그것은 본래와 상당히 다른 함의를 지닌다.

이 글의 목적이 각각의 부위를 낱낱이 해체하고 모든 단면을 모아 보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단어가 혓속에서, 종이와 화면 위에서 뒹굴러온 여행의 중요한 순간들을 포착해 보려 한다. 오타쿠가 비사교적이고 애니메이션에 집착하는 신 인종만을 지칭하던 시기로부터, '오타쿠적인' 상황까지 아우르게 된 지금까지 무슨 일들이 일어났을까? 이 글은 두 번으로 나눠 떠날 여행의 첫 번째에 해당한다.

▲ 만화 <현시연> 1권의 한 장면. 오타쿠가 아닌 가스카베 사키가 남자친구를 만나기 위해 '코믹 마켓'이 열리는 도쿄 빅사이트 역에 도착해, 엄청난 오타쿠 '포스'에 당황하는 모습이다. ⓒ북박스

<오타쿠의 비디오>

"뭐, 학교 다닐 때 어떤 반에서든 있지 않았나? 운동은 전혀 못하고, 쉬는 시간에도 교실에 틀어 박혀서, 컴컴한 곳에서 우물쭈물 장기나 두고 있는 녀석들이. (…) 보통 한 반의 구석에서 눈에 띄지 않게 어두운 눈을 하고, 친구도 한 명 없는 녀석." (나카모리 아키오, '오타쿠 연구', 1983년)

현재의 대략적인 정의에 부합하는 일군의 무리들은 1960~70년대부터 존재했으며, 그들이 행사 따위에서 서로를 '오타쿠'라 부르면서 이 말이 전파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처음 공식적으로 쓰인 건 1983년, 위에 인용한 잡지 <망가브릿코>의 한 비하적인 칼럼에서였다.

무엇보다 오타쿠가 대중적으로 알려진 데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은 1989년 전모가 드러난 '유아 연쇄 살인 사건'이었다. 범인의 이름인 '미야자키 쓰토무'로 더 잘 알려진 이 사건은 후에 언론이 6000여 개의 비디오테이프와 만화 잡지로 가득 찬 이 청년의 방을 공개하면서 오타쿠의 이미지에 쐐기를 박는 역할을 했다. "어두운 눈을 한 녀석"에서, 잠재적인 범죄자나 정신이상자 혹은 사회적 병리 현상으로 더 나빠지기만 한 것이 40년 오타쿠 사의 좋지 않은 시초였다.

▲ <오타쿠의 비디오> OVA 표지. ⓒGainax
원래 정체성이란 뚜렷한 외부가 존재할 때, 가장 나쁜 순간에 발끈하면서 생겨나는 법이다. 오타쿠에게서 반발이 나오지 않을 리 없었다. 그 선봉에 선 이 중 하나가 프로듀서이자 평론가 오카다 도시오(岡田斗司夫)였다. 오타쿠 양산의 핵심, 게임·애니메이션 기획 회사 가이낙스의 설립자이기도 한 그는, 책이나 강연을 통해 오타쿠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전파하려 애썼다.

그가 보인 한계는 후에 간략히 기술하기로 하고, 먼저 그가 기획에 참여한 가이낙스의 1991년 작품 <오타쿠의 비디오(おたくのビデオ)>를 통해 당시 세대의 오타쿠가 품었던 기대와 요구를 읽어보도록 하겠다.

<1982 오타쿠의 비디오>, <1985 속 오타쿠의 비디오> 두 편의 OVA(Original Video Animation)로 발표된 이 작품은 대학에 갓 입학한 평범한 청년 구보가 오타킹(오타쿠의 왕)이 되는 과정을 그린 2D 애니메이션과 주로 1960년대 생인 실제 오타쿠들을 인터뷰한 다큐멘터리 '오타쿠의 초상'이 교차되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 오타킹이 되기로 결심하는 구보와 다나카. ⓒGainax
건강하게 테니스나 치며 살던 구보는 어느 날 고교 동창인 다나카를 만나 오타쿠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고, 다나카 무리의 영도에 따라 그들이 열광하는 문화를 학습하게 된다. 그러나 평범한 세계의 여자 친구 요시코는 애니메이션 관람을 위해 극장 앞 노숙도 개의치 않게 되어버린 그를 대차게 차버린다.

구보는 '오타쿠가 무슨 범죄자야? 왜 차별 받아야 해!'라 울분을 토하며 오타쿠로서 성공하여 그녀를 후회하게 만들겠노라고 다짐한다. 그리고 동료들의 배신 등 우여곡절 끝에 대망의 테마파크 '오타쿠 랜드'를 설립하기에 이르는 대성공을 거둔다.

<오타쿠의 비디오>는 2035년 잠수복을 입고 물에 잠긴 도쿄를 방문한 구보와 다나카가, 오타쿠 랜드 입구에서 <우주전함 야마토>를 닮은 우주선에 탑승, 과거의 동료들과 함께 우주로 떠나는 장면으로 끝난다. 이런 황당한 극 전개와 이야기가 주인공의 망상일지도 모른다고 암시하는 첫 장면, 무엇보다 오타쿠들의 실제 모습이 드러난 다큐멘터리 영상에서, 이 애니메이션이 단순히 1차원적인 오타쿠 옹호만은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오타쿠들 사이에서는 오타쿠 관련 사업으로 돈을 버는 가이낙스가 왜 자꾸 '오타쿠를 까는' 작품을 만드는 건지 모르겠다는 불만의 목소리도 터져 나왔다.

▲ '오타쿠의 초상' 중. ⓒGainax
삽입된 인터뷰엔 오타쿠들이 열광하는 애니 원화를 훔쳐다 파는 오타쿠, 화면 속 2차원 캐릭터가 귀엽지 않느냐는 말만 반복하는 에로 게임 오타쿠, 코스프레건 뭐건 모두 과거의 추억이라며 오타쿠 경력을 부끄러워하는 컴퓨터 프로그래머 등 다양한 인물이 가명과 음성 변조된 모습으로 등장한다. "친구는 있나요", "실제 여자와 섹스하고 싶지 않나요" 등, 카메라 밖의 제작자는 의도적으로 당시 널리 퍼져 있던 스테레오타입에 근거한 질문을 던지는데, 그들은 화를 내기도 하지만 답을 회피하거나 일정 부분 긍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오타쿠들이 부끄러워할 만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오타쿠를 비난하기 위해서라기보다, 그들에게 어떤 요구를 전하기 위해서인 것으로 보인다. 잡지와 비디오가 가득 쌓인 작은 방 속 오타쿠의 '초상'과 고층 빌딩 사장실에서 산업을 진두지휘하는 오타킹의 망상을 극단적으로 배치하면서 작품은 오타쿠들에게 '밖으로 나와 오타쿠로서 야망을 펼칠 것'을 요구한다.

의미심장한 이종(異種) 배치는 하나 더 있다. 나 같은 '하수'는 검색해야만 파악할 수 있는 오타쿠 문화 내부의 다양한 인용과 패러디, 그리고 록히드 사건, 쇼와 천황의 죽음 등 1980년대 일본 사회를 뒤흔든 굵직한 사건을 설명하는 자막의 교차가 그것이다. 이 역시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오타쿠들에게 던지는, 시대를 읽으라는 각성의 요구가 아니었을까?

단순하게 생각해 보면, 미야자키 쓰토무 사건으로 사회적으로 완전히 바닥에 내쳐진 오타쿠를 옹호하기 위해선 최대한 긍정적인 면만을 비추어주는 게 좋았을 것이다. 아니면 매스컴이여 계속 떠들어 대라, 우리들은 우리만의 취미를 계속할게, 라는 입장을 취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향후 이미지와 장사를 위해서 좋을지를 잘 알고 있었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일본은 "도쿄의 대학생들이 점심으로 게가 먹고 싶어져 비행기를 타고 홋카이도에 다녀왔다"는 전설이 전해질 정도로 버블 경제의 극단에 서 있었다. 그런데 1980년대 말 버블이 소멸되며 큰 타격을 입었고, 처음으로 소비세가 도입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막대한 경제적 우위를 바탕으로 가능했던 '소비자본주의=포스트모던적인 것'이라는 전제가 위기에 놓였고, 그 아래 용인되던 1980년대 특유의 특성들을 "입에 담는 것이 부끄러운 시대가 와 버렸다."(오쓰카 에이지)

여기서 "사회적으로 현실과 허구의 관계를 재설정할 필요가 있었고, 이 과정에서 허구를 허구 그 자체로 긍정했던 1980년대적 감수성이 오타쿠 세대의 특수성으로 치부되면서 부정된 것이고, 그게 오타쿠 차별로 표면화되었다."(김태용)는 것이다. 결국 오타쿠 옹호론자들은 허구에 빠져 현실을 보지 못하는 것이 윤리적 열세에 처하게 된 상황에 입각해 오타쿠 차별에 대한 대응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던 것이다.

<감독부적격>

오카다 도시오는 수권에 이르는 저서와 강의 등으로 오타쿠를 담론적 영역에서 확대 조명한 데 기여하긴 했으나, 논리가 부족한 사례의 나열과 과도한 긍정적 묘사, 종국엔 '오타쿠는 일본의 전통 문화에 그 연원을 두며, 21세기 일본 문화의 선두다'는 식의 문화 제국주의적 관점으로 수렴되는 주장 등으로 비판도 많이 받았다.

참고로 그가 2008년 낸 책 제목이 <오타쿠는 이미 죽었다(オタクはすでに死んでいる)>라고 한다. 자기부정에 이른 이유에 대해 그는 "(과거 오타쿠는) 세상의 다수파와는 다른 '좋아하는 일'을 스스로 발굴, 세상의 이목에 대항한다는 지성과 정신력, (…) 강한 자부심과 사회성을 가진 '귀족'이었"으나 최근의 오타쿠는 "소비할 뿐인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마치 386 세대가 지금의 20대를 겨냥하는 언사와 그 구조가 비슷하다.

여기에서도 기본적으로 오타쿠적인 속성을 긍정적인 데 두면서, 그것은 온존시키되 다만 '자기만의 세계에 틀어박히는 게 문제'라 지적하는 초기의 문제의식을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오타쿠의 비디오>가 다소 과장되게 요구한 대로, 오타쿠적 속성을 간직한 채 오타쿠로서 성공할 수 있을까? 게임한다고 누구나 임요환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임요환은 존재하듯이 이쪽에서도 마찬가지로 드물게 성공 케이스가 존재한다.

▲ <감독부적격>(안노 모요코 지음, 김영종 옮김, 대원시아이 펴냄). ⓒ대원씨아이
한 권짜리 만화책 <감독부적격(원제 '監督不行届'>(김영종 옮김, 대원씨아이 펴냄)의 주인공은 20대 후반인 기자의 또래나 바로 윗세대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감독한 안노 히데아키(庵野秀明)다.

<건버스터 톱을 노려라> <이상한 바다의 나디아> 등 OVA와 TV 애니메이션으로 시작해 에반게리온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둔 뒤 극영화 연출·연기 등으로 활약 범위를 넓힌 안노는, '일본 오타쿠 4대왕' 중 한 명이라 불릴 정도로 유명한 오타쿠다. 1960년생인 그는 위에서 설명한 오카다(1958년생)와 마찬가지로 1970년대 애니 붐과 특촬물의 세례를 받은 '1세대 오타쿠'에 속한다.

그 거장을 3등신 캐릭터 '감독군'으로 만들어버린 작가는 안노 모요코(安野モヨコ)다. <해피 마니아> <꽃과 꿀벌> 등 성인 여성 취향의 개그 만화로 20년 가까이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만화가로, 2002년 안노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 <감독부적격>은 그의 커리어 가운데서도 아주 작고 예외적인 소품으로, 화제를 모은 인기 커플인 만큼 일종의 팬 서비스 차원에서 그린 짤막한 연재물을 모은 것이다.

이 만화의 핵심이자 개그 소재는 언제나 레퍼런스에 둘러싸여 있고, 그것을 흉내 내거나 패러디하는 '오타쿠의 삶'이다. 에피소드를 나열하는 식이라 커다란 줄거리는 없고, 다만 "옷을 입어볼 때마다 각종 울트라맨 포즈를 취하는 남편" 때문에 "왠지 점점 위험해지는 것 같아"라 불안해하던 작가가 어느새 "왠지 최근엔 어지간한 일로는 놀라지 않게 됐어"라며 오타쿠의 아내로 동화되어 간다는 설정이다.

▲ <감독부적격> 중. ⓒ대원씨아이
작중 직접 '롬퍼스'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모요코는 만화가이긴 해도 전통적 정의로 봤을 때 오타쿠 계열은 아니다. 패션 잡지를 방불케 하는 의상·패션계 묘사나 <뷰티 마니아> 등 뷰티 관련 에세이 출간 등에서 드러나듯 오히려 대극점에 서 있다. 앞서 언급한, 오타쿠가 비하적인 의미로 쓰인 1983년 <망가브릿코>의 칼럼에서 오타쿠의 외모를 "머리 모양은 7대 3 장발에 부스스하거나, 공포스런 도련님 스타일의 깍두기 머리" 등으로 특정지은 것처럼 오랫동안 오타쿠는 그 외모적 스테레오타입이라는 굴레에도 갇혀 있었다. 그렇기에 '패션에 민감한', '현실 세계의 부인'은 오타쿠를 재위치시키에 적합한 존재다.

따라서 ①일반인과 다른 생활 패턴과 취향, 열정 포인트를 가진 감독군이 오타쿠적인 행동을 한다. ②아내 롬퍼스는 당황하는 한편 자신도 하나로 묶이게 될까봐 전전긍긍한다. ③결국엔 즐거운 감독군의 세계에 동화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는 구도에서 오타쿠는 정체성의 우위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반대로 과자를 주식으로 삼던 체지방 40퍼센트의 감독 군을 스포츠 자전거를 태우는 등 "건전한 생활"로 이끌어보려는 필사의 노력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결국에 내 안의 오타쿠 성을 발견하게 만드는 오타쿠의 생활의 매력과 특수함을 그리고 있다.

▲ <감독부적격>의 한 장면. ⓒ대원씨아이
아주 가볍게 그린 이 작품을 굳이 인용한 이유는, 이것이 오타쿠의 변화된 위상, 그 가운데서도 최고급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한국 오타쿠의 성지 엔하위키 <감독부적격> 항목에 "상위 1퍼센트가 아니고 일본 내에서 '원 앤 온리 위치'에 있는 덕후 부부 얘기라 국내의 덕후들이 보면 헛된 환상에 빠지거나 열폭(열등감 폭발)하게 될 수 있다"라고 쓰여 있는 만큼, 오타쿠에겐 '현실'을 바탕으로 최고의 '환상'을 이뤄내고 있다는 점이다.

<감독부적격>의 맨 마지막엔 이 작품에 대한 안노의 감상평이 쓰여 있는데 그는 <에반게리온> 이후로 애니메이션 팬과 업계의 지나친 폐쇄성에 염증을 느껴 한 때 탈 오타쿠를 의식한 적이 있었다고 고백하며 "하지만 최근엔 조금 변했다. 탈 오타쿠로서 그 핵심 부분이 흐려지는 것이 아니라 비 오타쿠적인 요소가 추가되었다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오타쿠라는 특성을 버린 것이 아니라 오타쿠라는 특성에 사회화라는 무엇을 추가했다는 것이다.

오타쿠적인 것

처음에는 잠재적 살인자 취급을 받았던 오타쿠가 이렇게 매력적이고 사회화된 존재가 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한 가장 쉬운 설명은 '시간이 흘렀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신세대든 처음에 등장하면 만악의 근원으로 지목되다가, 서서히 위화감이 옅어지곤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 설명은 무책임하다. 오타쿠만이 갖고 있는 특별한 진화 조건은 없었을까?

연구자들은 오타쿠의 재현 체계가 바뀐 변곡점으로, 안노 히데아키가 만든 <신세기 에반게리온> TV판 애니메이션의 등장(1995년)을 꼽는다. 작품은 방영 당시 엄청난 시청률로 인기를 그러모으더니 1997년엔 극장용 애니메이션이 두 편 제작되어 25억 엔에 달하는 성적을 올렸다. 작품은 단순히 흥행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갈증을 느껴 온 오타쿠들의 정보 욕구를 강하게 자극했을 뿐 아니라 예전에는 애니메이션에 관심이 없던 이들도 포섭하면서 '에바 붐'을 일으켰다.

한편, 때는 마침 서양, 특히 미국 쪽에서 일본의 애니메이션에 주목하면서 그 긍정적 평가가 일본으로 역수입된 때이기도 했다. 다른 비서구 국가들도 마찬가지지만, 일본은 특기해도 좋을 정도로 서구 사회의 시선을 반영하고 의식하면서 문화 산업의 내용과 구조를 바꿔왔다. 따라서 1990년대 이후 지속적인 침체 기미인 일본 국내의 시장이 서구 시장에 팔 수 있는 일본적인 상품으로서의 소프트웨어 산업에 주목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소비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업적인 성공, 시장의 경제적 가치의 재평가는 발언권, 아니 조명권의 획득을 의미한다. '재현'과 관련된 변화는 21세기부터 눈에 띄게 늘어난다. 관련 서적들의 출판이 늘었고 학술적인 영역에서도 보다 자주 다뤄지게 되었다. 그간 드러나지 않던 여자 오타쿠(후죠시, 腐女子)도 하나의 목소리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투 챤넬(2ch)'로 대표되는 인터넷 커뮤니티의 발달로 그들 스스로의 목소리가 커지게 된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따라서 인간 유형을 가장 일차원적으로 다루는 대중매체에서도 좀 더 '3D'형 인간에 가깝게 이들을 그리게 되었고, 오타쿠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전차남> <현시연> <망상소녀 오타쿠걸> <섹시 보이스 앤 로보> <사랑의 문> 등)이 수적으로 증가했다. 그리고 이 작품들에선 오타쿠 역시 사회적인 존재라는 점이 부각되게 된 것이다.

가령 '현대시각문화연구회'라는 작중 오타쿠계 서클의 줄임말이 그대로 제목이 된 <현시연>(전9권, 기오 시모쿠 지음, 북박스 펴냄)을 보면, 주인공들이 에로 게임이나 프라모델, 코스프레와 같은 오타쿠 문화를 즐긴다는 특징은 있지만 그들의 인간관계나 연애 라인은 그대로 스포츠 서클에 대입해도 크게 상이하지 않을 것이다. 이들이 연 2회 성지 순례처럼 반드시 참여하는 오타쿠의 축제, '코믹 마켓'에 참가하는 일을 대학 스포츠 전국 대회로 바꾸는 변환이 필요한 정도라고 할까.

기본적인 틀은 주인공들이 사람들과의 관계 맺기를 고민하고, 추억이 깃든 서클 활동을 떠나 취직의 길로 나아가는 과정을 그린 성장 만화다. 김태용은 이런 작품들 속에서 오타쿠의 반사회성은 "사소한 결점이나 미숙함으로 표현"되고 "결점은 현실적으로 해결 가능한 범위"라며 "이런 성장이 오타쿠적인 측면을 완전히 부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롤플레잉 게임식으로 말하자면 '오타쿠 님의 사회성이 +10 증가했습니다.' <현시연>에서 유일하게 비 오타쿠 정체성을 주장하는 가스카베 사키는 야오이 만화를 그리는 오기우에 지카가 '화풀이로 창문에서 뛰어내렸다'고 말하자 이렇게 일갈한다. "호모라든지 그런 취미보다, 그런 행동이 오타쿠틱하다는 거야." 이렇게 '오타쿠'에 있어 취미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성격이 문제라는 입장은 위에서 말한 <오타쿠의 비디오>의 주문과도 맞닿는 부분이 있다.

오타쿠의 사회화, 사회의 오타쿠화

오타쿠가 사회적인 존재로 '비추어지기'만 한 건지, 아니면 실제로 대부분이 사회적인 존재로 거듭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전자, 즉 재현은 늘 복잡한 맥락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가시화되었던 처음 순간 반사회적인 위험성이 부각된 가운데, 귀찮음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그것을 수정해 가려는 노력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고, 결국엔 그 문화도 개개인도 안노 히데아키처럼 "비 오타쿠적인 속성을 추가하며" 화해를 이뤄가는 거라고 볼 수 있겠다.

그렇기에 어떤 오타쿠들은 그 안에서 또 정체성 싸움을 할 수밖에 없다. '라이트 오타쿠' 등 특정 대상에 몰두하는 정도로 구별을 짓고, 취향의 위계를 정한다. 한편, 오타쿠들의 내부자적 관점을 비교적 잘 나타내주는 <동인 용어의 기초지식>을 살펴보면, 여전히 에로 게임은 매스컴에게 두들겨 맞는 등 대중들이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이율배반을 보인다며 "오타쿠는 오타쿠끼리, 갇힌 세계에서 조용히 잘 하고 있으니, 무리하게 바깥으로 끌어내거나 필요이상으로 적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오타쿠가 조명되는 것 자체가 불만인 셈이다.

재현의 다양화는 오히려 오타쿠라는 인물상의 또 다른 평면화로 이어졌고, 따라서 오타쿠 정체성을 가진 이들에게는 정체성 위기와 구분 짓기의 필요성이 생겼으리라고 본다. 가령 2005년 노무라종합연구소는 오타쿠를 '소비성 오타쿠' '심리성 오타쿠' 등 다섯 층으로 분류하고 각 타깃에 맞는 마케팅 프레임을 제시하기도 했는데, 이 맥락에서도 오타쿠는 그저 '취미에 열정을 쏟는 사람' 정도의 의미일 뿐 특별한 하위문화적 주체는 아니다. 엔하위키에서도 "2011년 현재 무인 오타쿠와 XX오타쿠를 아우르는 광의의 오타쿠의 의미는, 통념대로 열중하는 사람으로 의미가 단순화되었다 하겠다"고 말한다.

여기서 나오는 외부의 반응을 보면, 하나는 위에서 인용한 오카다 도시오의 <오타쿠는 이미 죽었다>라는 책 제목처럼 '이제 더 이상 오타쿠는 크리에이티브한 존재가 아니고, 상업 시스템에 놀아나는 소비자일 할 뿐이야!'라는 불평이다. 또 하나는 오타쿠 시장이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선택한 확장이 정작 오타쿠를 오타쿠일수 있게 한 외재성을 잃고 '문화적 가치', 따라서 거기에 뒤따르던 '경제적 가치'까지 파괴하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지적이다.

이런 반응은 '원 오타쿠'라는 활력적이고 생산적인 존재를 상정하고 있는 듯하다. 지금은 거대한 대중문화 체제에 포섭된 데 비해, 과거의 오타쿠들은 자신들끼리의 독립된 마켓에서 성장하는 적극적인 하위문화 주체였다는 구도. 하지만 이 개탄의 결론은, 그들은 그들만의 특수한 경제적 가치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결국엔 '얼마나 나은 효율을 갖추느냐'라는 틀에 갇히는 것이 아닐까?

오타쿠가 좀 더 친숙한 존재로 거듭나고 오타쿠적인 것이 범람하는 것을, 차라리 뒤집어 이렇게 보면 어떨까. '오타쿠가 점점 사회화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점점 오타쿠화되는 것'이라고. 가령 예전엔 오타쿠가 몰두하는 '분야'(애니메이션, 게임 등)가 굉장히 중요시되었지만, 지금은 '정덕(정치 덕후)', '잉덕(인문학 덕후)'처럼 분야와 상관없이 어떻게 접근하는가를 기반으로 포섭되고 있다.

사실 오타쿠를 구분하는 핵심은 그들이 좋아하는 분야가 아니라 그들의 소비 방식에 있다는 지적은 예전부터 있어 왔다. 그 방식이란 텍스트를 둘러싼 언뜻 보면 쓸데없는 모든 정보들을 수집·축적해 그것으로 하나의 인격을 형성하고, 나아가 적극적인 2차 창작을 하는 행위이다. 이러한 방식에서 작품 혹은 소비 대상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그와 관련된 역사적, 사회적 맥락이 아니라 '개인적 취향'과 그것을 과시할 수 있는 스타일적인 측면이라는 것이다. 가령 "좌파적 색채를 담은 아마추어 만화와 대중지에 연재되는 인기 만화가 단순한 차이로 환원될 수 있는 동질의 정보"인 것처럼.

또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이은미 옮김, 문학동네 펴냄)에서 아즈마 히로키가 지적했듯, 이제는 실종된 거대 담론을 대체하던 '이야기 소비'마저 사라지고 그저 캐릭터를 매개로 한 데이터베이스의 조합만을 소비하는 행위로 옮겨가고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오타쿠를 3개의 세대로 나누면서 '이야기 소비'와 '비(非) 이야기 소비'를 좀 더 세밀하게 구분하고 있는데, 여기서 3세대 오타쿠들의 특징으로 거론되는 것이 '모에(萌え)'라는 감정 혹은 행위의 매개체이다. 다음 호에선 사회가 오타쿠틱해진다는 의미는 무엇인지, 이 '모에'라는 열쇠말과 함께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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