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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김영하·김연수의 '리스트'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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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황석영·김영하·김연수의 '리스트'는 무엇인가?

[프레시안 books] 밀란 쿤데라의 <만남>

최근 번역된 밀란 쿤데라의 에세이집 <만남>(한용택 옮김, 민음사 펴냄)은 <소설의 기술>(1986년), <배반된 유언>(1992년), <커튼>(2005년)에 이은 네 번째 에세이집이다.

우리가 쿤데라라는 이름을 입에 올릴 때 우선적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1990년대라는 정치 사회적·문화적 변환기(주지하다시피 국외적으로는 사회주의권이 몰락하고, 국내적으로는 정치 투쟁의 장이 소멸되어 갔던)에 무라카미 하루키와 더불어 한국의 문학인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작가였다는 점이다. 즉, 결과론적으로 볼 때, 이 두 작가는 당시 문학인들에게 참여 문학(민중·민족 문학)과 깨끗이 결별할 수 있는 훌륭한 알리바이를 제공했다 하겠다.

그런데 그것도 벌써 20여 년 전 일이다. 이 사실을 통감한 것은 모 대학 문예창작학과 대학원에서 20여 명의 수강생 중 쿤데라를 읽은 이가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이다. 내가 이 사실을 굳이 이야기하는 것은 소설 창작을 지망한다면서 쿤데라'조차도' 읽지 않았다는 사실을 책망하기 위함이 아니다. 물론 1990년대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1990년대에 등장한 작가들, 그러니까 지금 40대 전후의 작가들에게 있어 쿤데라의 작품을 읽는 행위는 뭐랄까 통과의례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얼마나 많은 작가들이 새로 등장하고 또 잊어져 가는가? 또 잘 쓰인 작품(걸작)은 얼마나 많은가? 모든 걸작들이 모든 시대에 걸쳐 비슷한 정도로 읽히는 게 아니라면, 그것들은 필연적으로 '찬사-망각-재발견'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 아닐까 한다. 확실히 오늘날 젊은 작가가 쿤데라를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로 손꼽는 행위는 시대에 뒤처져 있다는 사실을 공표하는 것과 다름없다(쿤데라는 우리로 하여금 1990년대를 환기시킨다). 그래서 센스가 있다면, 쿤데라 대신에 미셸 우엘벡이나 빈프리트 게오르그 제발트나 코맥 매카시 등을 입에 올릴 것이다.

그렇다. 쿤데라 자신도 어느새 '골드리스트'가 아닌 '블랙리스트'에 등재된 작가가 된 것이다. 여기서 블랙리스트, 골드리스트라는 말은 쿤데라가 특정 시대에 형성되어 유포되는 지적 유행을 비판하기 위해 사용하는 표현이다. 예컨대 그런 다음과 같은 경험을 덧붙이고 있다.

10여 년 후, 프랑스에 갓 이민 온 나는 한 젊은이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이 친구가 불쑥 "바르트를 좋아하시나요?"라고 내게 물었다. 그 시절에 나는 이미 순진한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테스트를 받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때 롤랑 바르트가 모든 골드리스트의 꼭대기에 이름을 올린 것도 나는 알고 있었다. "물론 좋아하죠.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어요! 칼 바르트를 말씀하시는 것이잖아요! 부정 신학의 창시자 말이에요! 천재예요! 바르트가 없었다면 카프카의 작품은 상상할 수도 없었을걸요." 나를 테스트하던 사람은 한 번도 칼 바르트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지만, 내가 그를 너무나 독보적인 카프카와 연결하는 것을 보고 더 이상 군말을 하지 않았다. 토론은 곧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그리고 나는 내 대답에 만족했다. (<만남>, 69쪽)

▲ <만남>(밀란 쿤데라 지음, 한용택 옮김, 민음사 펴냄). ⓒ민음사
주지하다시피 한때 롤랑 바르트가 수많은 문학 연구자들의 아이돌로 간주되던 시기가 있었다. 문학청년이라면 한동안 절판이 되기도 했던 <사랑의 단상>을 소장하고 있다는 것을 남모를 자랑으로 여기기도 했다. 그렇다. 1990년대에 바르트는 한국에서 첨단, 가장 현대적인 것을 의미했다. 바르트와 미하일 미하일로비치 바흐친이 죄르지 루카치를 대체했고, 미셸 푸코, 질 들뢰즈, 자크 데리다를 모르면 어디 가서 말도 섞지 못했다. 작품, 작가, 주체, 세계관이라는 단어는 블랙리스트에 등록이 되었고, 그 대신에 기호, 탈주, 해체, 시뮬라크르라는 말이 골드리스트에 등록이 되었다.

1990년대에 쓰인 문학 평론들을 살펴보면, 낯 뜨거울 정도로 푸코, 데리다, 들뢰즈, 보드리야르와 같은 이름들이 본문과 각주에 수시로 등장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최근 평론들에서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이들의 이름이 깔끔히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말 그대로 배니싱.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문학 평론이 쓸데없이 철학 담론을 끌어들이는 것을 이제 포기라도 한 것일까? 설마, 그럴 리가. 문학 잡지를 조금이라도 살펴본 사람들이라면 알겠지만, 그들의 이름이 다른 이름, 예컨대 알렝 바디우, 조르조 아감벤, 자크 랑시에르, 슬라보예 지젝으로 대체되었을 뿐이다. 즉, 리스트가 바뀐 것이다.

앞서 내가 쿤데라의 영향력을 과거형으로 표현한 것은 이런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물론 그의 대표작 한두 권은 스테디셀러로 꾸준히 읽히고 있지만, 이전과 같은 영향력을 갖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이는 같은 시기 비슷한 역할을 했던 하루키와 비교하면 더욱 그러하다. 하루키는 문학인들은 물론 독자에게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끼쳤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최근까지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 작가였던 데에 반해(즉 대중 작가로 분류되었다), 쿤데라는 국내에 처음 소개되었을 때부터 노벨문학상급으로 소개되었고, 지금은 여러 권이 당당히 '세계 문학 전집'에 편입되어 있다. 하지만 지금의 관점에서 영향력은 하루키 쪽이 크다 하겠다.

그렇다면, 지난 20년 동안 이 두 작가를 둘러싸고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두 작가의 서로 다른 수용사와 관련해서는 적잖은 지면이 필요하기 때문에 다음 기회로 미루고 여기서는 공통점에 주목하기로 한다. 앞서 간단히 언급한 것처럼 두 작가가 한국에서 주목을 받은 것은 무엇보다도 '정치에 대한 냉소적 태도' 때문이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 이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는 문학 집단(예컨대, 창비 진영)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많은 문학가들을 매혹시킨 게 사실이다. 둘 모두 형태는 다르지만 '정치의 계절'을 몸소 체험한 작가들이었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당시 한국의 작가들이 느끼고 있던 '환멸'을 비출 수 있는 일종의 거울 역할을 했다 하겠다.

조금 과장하자면, '문학가의 사회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한국의 작가들이 자유로워질 수 있었던 것은 이 두 작가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우리는 그들 덕분에 작가로서 사회에 대해 취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태도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가라타니 고진이 지적한 것처럼 '사회적 책임'을 방기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사회적 영향력'도 잃는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바로 이 점이 한국 작가들의 입장에서 이 두 작가에게 애매한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문학적으로 성공을 한다는 것은 입신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사회적 명예를 경멸하고 경제적 궁핍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의 예술적(문학적) 성취를 고수하는 전통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많은 작가들이 기회가 되면, 대학으로 갔다. 따라서 한국 문학에 엄밀한 의미에서 문학주의(유미주의)라는 것이 존재한 적이 있었는지도 의심스럽다. 예컨대 백낙청이 스스로를 문학주의자라고 말할 때도, 그것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영향력을 담보한 문학을 전제로 한다.

한국에서 이루어지는 '문학과 정치'를 둘러싼 논의들은 궁극적으로 문학의 사회적 영향력이라는 문제에 도달하는데, 솔직히 이런 입장에서 보면 쿤데라나 하루키만큼 껄끄러운 존재도 없다. 왜냐하면 이들의 정치에 대한 불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근본적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선거를 통해 무언가가 바뀔 것이라는 생각 따위는 할 리가 없다. 따라서 이런 한국적 상황은 그들이 공식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언급된 적이 예상 외로 드물게 만들었고, 기껏해야 작가 지망생이라면 한 번은 읽어야 할 작품(쿤데라) 내지 대학 시절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소설(하루키) 정도의 취급을 받았다.

물론 이런 홀대는 다른 의미에서 비단 쿤데라와 하루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 외국 작가는 대부분 비슷한 대우를 받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니 한국은 그동안 그렇게 많은 작가들이 번역되었지만, 제대로 수용된 적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쿤데라는 차치하더라도 무려 20여 년 동안 널리 읽히고 잊을 만한 하면 뜨거운 감자로 등장한 하루키마저도 제대로 된 연구서 한 권, 비평 한 편이 없는 형편이다.

이는 쿤데라와 하루키가 소설가이기 이전에 뛰어난 문학 비평가 내지 문학 연구가인 것과는 대조적이다. 주지하다시피 하루키는 50여 권(레이먼드 카버의 경우 전집을 번역했다)의 미국 현대 소설을 옮긴 번역가이자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랄드 등에 대한 저서까지 낸 미국 문학 연구가이기도 하다. 참고로 오늘날 한국에서 피츠제랄드와 카버가 읽히는 것은 순전히 하루키 때문이다.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면서, 그리고 이후 문학 비평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깨달은 놀라운 사실 중 하나는 대부분의 문학 연구가들(이들 중 일부가 문학 평론을 한다)이 갖고 있는 외국 문학에 대한 지식이 일천하다는 사실이었다. 예컨대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의 주요 작품을 읽은 사람조차도 매우 드물었다. 물론 그들도 바흐친의 <도스토예프스키의 시학> 정도는 열심히 읽었을 것이다. 하지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읽지 않았다. 아니 딱히 읽을 필요성조차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왜일까? 그것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어디까지나 한국 작품을 분석하는 데에 필요한 이론이었지 그 이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론서를 열심히 읽되 그 이론서를 가능하게 한 작품은 읽지 않기. 물론 언급되는 작품을 다 찾아보면서 문학 이론서를 읽는 것은 정말이지 견적이 많이 나오는 일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최소한 그 책에서 언급되는 주요 작품들을 읽지 않고서, 즉 오로지 이론서만으로 이해하려 하고 또 이해했다고 주장하는 그들의 문학적 능력이 그저 경탄스러울 뿐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그들이 하는 연구나 비평이 많은 경우 외국의 이론이나 개념을 몇 개 가져와 우리나라 작품에 처바르는 것에 그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하겠다. 이런 수준이니 어떤 형편없는 작품이 갑자기 스피노자의 철학에 정통한 소설이 되고, 또 어떤 작품은 니체의 계보학적 작업을 구현한 작품이 되고, 또 어떤 작품은 유래가 없는 형식 실험을 감행한 전위적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이런 평가들은 이론적 절취와 우물 안의 상대평가라는 기준이 제시될 때만 의미가 있는 것에 지나지 않다.

얼마 전, 황석영의 <강남몽>(창비 펴냄)이 표절 혐의를 받은 적이 있다. 작가는 참조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예술적으로 변용되었느니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가 나중에는 출처를 밝히는 것으로 정리된 것으로 안다. 이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느낀 것이지만, 한국의 작가들은 자신의 작업이 어디까지나 '창조적인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즉, 어떤 책을 읽고 또 누구의 영향을 받았는지를 밝히는 것을 자신의 창조성(독창성)에 대해 훼손으로 간주한다.

그런 점에서 최근에 나온 김훈의 <흑산>(학고재 펴냄)의 매우 예외적인데, 따지고 보면 이는 비단 문학 창작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번역서가 나올 때, 이미 누군가에 의한 번역된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애써 모른 척하면서 '초역'이니 뭐니 하며 내세우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출판사가 제공하는 보도 자료에 기반을 두고 쓰이는 신문 기사는 그것을 명백한 사실로서 확인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앞선 작업을 인정하는 것, 그것은 어쩌면 문학과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게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적어도 이 분야에서는 '진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의 개념이 예술에 적용되면 진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것은 완성, 개선, 향상을 함축하지 않으며, 미지의 땅을 탐험하고 그것을 지도에 그려 넣으려고 시도하는 어떤 여행에 가깝다. 소설가의 야심은 이전 선배들보다 나아지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보지 않았던 것을 보고 그들이 말하지 않았던 것을 말하는 데에 있다. (<커튼>(박성창 옮김, 민음사 펴냄, 2008년), 29~30쪽)

이는 한편으로 엄밀한 의미에서 '새로운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자, 다른 한편으로 모든 예술가는 이전 선배들로부터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쿤데라만큼 그것을 솔직히 말하는 작가도 없다. 그의 네 권의 에세이의 주제는 하나같이 누가 자신에게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가에 대한 고백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쿤데라'라는 이름을 들으면 일련의 이름을 상기하게 된다. 라블레, 세르반테스, 스턴,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토마스 만, 하세크, 카프카, 블로흐, 무질, 베케트, 비톨트 곰브로비치 등등. <만남>을 읽는다면, 우리는 이에 몇 명을 더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푸엔테스, 셀린, 로스, 비엔치크, 고이티솔로, 마르케스, 그리고 프랑스와 말라파르테까지.

이는 우리로 하여금 미소를 짓게 만드는데, 왜냐하면 리스트를 비판하는 그야말로 어떻게 보면 지독한 리스트 작성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리스트는 앞서 그가 비판한 리스트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첫째 쿤데라의 리스트는 지적 유행과는 무관하게, 즉 평생에 걸친 그의 창작과 독서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고, 둘째 그것을 통해 소설가로서의 부채감을 솔직히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는 자신의 지적 취향을 과시하거나 상대방을 지적 취향을 시험하기 위해 리스트를 만든 것이 아니다.

방금 나는 부채감이라는 표현을 썼다. 말 그대로 쿤데라의 소설은 수많은 선배 소설가들의 영향 하에서 씌어졌고, 그 점에 대해 그는 지나칠 정도로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작가들은 어떨까? 최인훈이든 황석영이든 김연수든 김영하든, 그들의 이름을 들을 때 우리는 어떤 리스트를 떠올리는가? 아마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최인훈으로서, 황석영으로서, 김연수로서, 김영하로서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작가들은 쿤데라보다 독창적인 것인 것일까?

이 물음에 자신 있게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면, 우리는 한국 문학이 빈곤한 것은 '리스트의 부재' 때문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쿤데라는 <커튼>(2005년)에서 '사건의 역사'(일반 역사)와 '가치의 역사'(문학사 내지 예술사)를 구분하고 예술 작품은 '가치의 역사'에서만 의미를 가진다고 주장하고 한 바 있다. 즉, 한 작가나 작품은 무엇보다도 동시대 다른 작가의 작품이나 이전 작품과의 관계에서 봐야지 그 작품이 나온 역사적 배경이나 조건으로 치환시켜서는 심히 곤란하다는 것이다. 이를 우리 식으로 말하면, 하나의 문학 작품은 오로지 '리스트 속'에서만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의미라 하겠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리스트가 부재하는' 한국 소설사란 대부분 시대적 환경과 관련하여 일차적으로 해석된 작품들의 집합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주지하다시피 하나의 작품을 역사적 맥락에서만 파악하는 것은 매우 쉬우며, 누가 해석하든 동일한 결론만을 도출할 뿐이다. 최근까지도 한국 근대 문학 연구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풍속사연구가 잘 보여주고 있듯이 말이다. 사실 문학 연구자들의 서구 사상(이론서)에 대한 집착은 이런 무차별화를 회피하기 위한 작업인지도 모른다(물론, 그것은 또 다른 무차별화를 낳게 되지만 말이다). 즉, 역사적 반영론과 최근 서구 이론이 뒤섞여 개별 문학 작품을 감싸고 있는 모습, 이것은 오늘날 한국 문학 연구·비평의 현주소가 아닌가 한다.

<만남>을 읽기 시작하면서 가진 처음 가진 생각은 이전 에세이집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가벼운(짧은 에세이들이 많다) 책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중반을 넘어서서는 뜻밖에도 견적이 많이 나오는 책이라는 느낌을 받았고(잘 모르는 작가의 이름들이 연이어 튀어나왔다), 책을 덮을 즈음에는 "역시 쿤데라!" 하고 중얼거렸다. 확실히 이번 책은 이전 에세이집과 비교해 가벼운 게 사실이다. 그리고 주장하는 내용 역시 딱히 새로운 것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쿤데라가 썼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우리는 한 권을 책을 읽을 때, 도대체 무엇을 기대하는 것일까? 어떤 이는 새로운 개념이나 이념, 또는 세계관을 기대할 것이고, 어떤 이는 흥미로운 이야기나 뒤통수를 때리는 반전을 기대할지 모른다. 이런 독자들에게 쿤데라의 책들은 그리 추천할 만한 대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쿤데라는 새로운 이야기를 전혀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그가 단지 쿤데라표 리스트만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솔직히 말해, 쿤데라가 아니었다면 한국의 누가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이나 <몽유병자들>에 관심을 가졌을 것인가? 물론 여전히 이 책들은 읽히는 작품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런 작품이 존재한다는 것 정도는 소설가들에게 상식이 되었다.

앞서의 인용문에 이어서 덧붙이자면, 소설에서 발전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혹 그런 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연구자나 비평가가 있다면, 그것은 그에게 어떤 리스트가 없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즉, 어떤 소설이든 그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 한국의 작가들은 이를 명심할 필요가 있다. 뛰어넘어야 할 자국의 작가가 없다는 안타까운 현실로 인해, 주로 외국 작가들에게 얻은 독서 경험으로 소설을 쓰면서도 '나름대로의 독창성'을 내세우기 위해 리스트를 애써 지우는(많은 경우 비평이란 이 리스트를 확인하는 수준에서 머문다) 태도는 이제 그만 두는 게 좋다.

도리어 자국의 문학이 빈곤할수록(그렇다. 쿤데라는 체코 출신이다) 국적에 상관없이 자신만의 리스트를 구체적으로 작성하고 적극적으로 부채감을 강조하는 게 좋다. 왜냐하면 그럴 때만 우물 안에서만 통용되는 창작과 비평의 짜고 치는 고스톱을 그만 두고 자신이 무엇을 쓰고 있는지 명확히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에는 요행의 시적인 표현인 영감이 머물 장소 따위는 없다.

즉, 소설이란 결국 리스트 싸움이다. 이는 비평에도 그대로 해당된다. 블랙리스트나 골드리스트 사이에서 '멍청한 우아함'(쿤데라의 표현)을 과시하는 대신, 외국 문학에 대한 연구서 한두 권 정도는 비평가도 자신의 저서 목록에 집어넣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는 물론 스스로에게 던지는 다그침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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