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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이 취직했다 한 달 만에 때려치운 이유는…

[한만수의 '백 년 동안의 검열'] 밀실의 검열관과 광장의 검열관

이효석은 경성제대(현 서울대) 졸업 뒤 취업 자리가 마땅치 않자 은사(이미 검열관 노릇을 하고 있던 구사부카 조오지(草深常治))의 추천에 따라 총독부에 취직한다. 경무국 도서과 촉탁, 즉 검열보조원 자리였다. 소설 <메밀꽃 필 무렵>과 수필 <낙엽을 태우면서>로 널리 알려진, 대표적 문인의 한 사람이 한때 '문학의 학살자'를 직업으로 선택했었던 것이다. 길거리에서 만난 어떤 문인이 일갈했다. "너도 개가 되었구나."

고민하던 이효석은 한 달 만에 검열관 노릇을 그만두고 시골(함북 경성) 영어 교사로 간다. 그만두자마자 바로 교사가 된 것에서 보듯이, 사실 그 시절에 경성제대를 졸업한 이효석만한 재사에게 취직 자리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시골 선생 노릇은 그리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단지 그는 서울을 떠나기는 싫었던 것이다. 검열관보다 못했던 시골 선생. 예나 제나 '서울 공화국'.

대한민국 제2대 국사편찬위원장이던 김성균도 검열관이었다. 오장환의 장시 '전쟁' 검열본에는 김성균의 검열 도장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꽤 길게 검열관 생활을 했지만, 해방 이후 그의 이력서에는 그런 사실은 찾아볼 길 없다. 하긴 한 나라의 국사 편찬을 총책임지는 이가 민족 문화를 가위질하던 검열관 출신이라니 감추고 싶기도 했겠지.

식민지 시기 검열은 대체로 이효석, 김성균 같은 조선인 검열보조원과 일본인 검열관이 짝을 지어 작업하는 방식이었다. 물론 일본인 검열관들도 조선어에 능통했지만, 외국어 검열에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었으니 조선인 보조원이 필요했다. 문제가 될 만한 대목에 보조원들이 붉은 줄을 치면, 일본인들은 붉은 줄을 중심으로 실제로 삭제할 것과 그냥 두어도 좋을 것을 구분하는 식이다.

▲ 채만식의 소설 <과도기> 검열본 원고. 곳곳에 붉은 줄을 긋고 삭제 도장을 찍어놓았다(자료 제공 : 서울대 방민호 교수). ⓒ방민호
조선인들이 그은 붉은 줄 중에서 실제로 삭제되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김동인에 따르면 약 3분의 1정도였다고 하는데, 정확한 통계를 내본 일은 없지만 대체로 그런 정도일 듯하다. 김동인은 이게 불만이었다. 검열에 무슨 불만이 생기면 직접 일본인 주임을 만나서 해결했노라고 자랑스레 회고하고 있다. 수준이 낮은 조선인 보조원들하고 상대하느니, 같은 엘리트인 일본인 주임을 만나야 역시 말이 잘 통한다는 것이다.

원래 조직의 말단에 있는 사람들은 재량권이 없게 마련이다. 게다가 조선인이기 때문에 느슨하게 검열하는 게 아닌가 하는 혐의를 벗기 위해 오히려 적극적으로 검열했다. 검열자 역시 내면적 검열에 시달렸던 것이다. 김동인은 이런 사정을 헤아리지 않고 조선인 보조관들은 수준이 낮아서 검열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판단하면서 자신은 일본인 검열관과 직접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문명인'임을 과시했다. 김동인의 엘리트주의를 엿볼 수 있다.

김동인의 글은 해방 뒤에 쓴 회고였다. 역시 노예는 해방된다고 하더라도 저절로 자유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유리병 속에 갇혔던 벼룩은 그 유리병이 없어진 뒤에도 정확하게 그 유리병 높이만큼만 뛰어오른다고 하지 않던가. '벼룩은 뛰어야 벼룩'.

식민지 시기 검열관 노릇을 했던 조선인들은 해방 이후에는 자신의 이력을 결사적으로 숨겼다. 예외적으로 이명재 교수는 김성균을 인터뷰했지만 논문에서는 익명으로 처리했다. 김성균이 인터뷰에 응하는 전제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인터뷰에 응해준 것만 해도 다행이다. 필자는 1980년대 신군부 검열을 맡았던 사람을 어렵게 찾아내어 인터뷰를 시도한 바 있지만, 그는 완강하게 거부했다.

검열 연구에서 가장 큰 어려움은 자료가 부족하다는 점인데, 특히 검열자 연구가 그렇다. 행위의 주체를 연구하기가 어려우니 검열 연구도 저절로 어려움이 많다. 이에 비해 검열의 피해자들은 특히 해방 이후에는 앞 다투어 자신이 검열의 피해자였노라 때늦은 비명들을 질렀다. 이 또한 골칫거리이다. 한쪽은 너무 말이 많아서 어디까지 믿어야 할 지 판단하기 어렵고, 한쪽은 너무 말을 하지 않아서 기본적 정보조차 얻기 어렵다. 이래저래 검열 연구는 쉽지 않다.

검열관들은 어둠 속에서 움직인다. 한국에서 근대 검열은 식민지 시기에 출발되었으므로 특히 그러하다. 식민지 시기 검열 자료는 거의 대부분 극비나 비밀로 분류되었고, 해방 직전에 대량 폐기되었다. 해방 이후에도 사정은 비슷하다. 독재정권 시기 안기부, 검찰, 경찰, 문공부등 다양한 검열 기구들이 어떤 기준에 의해 어떻게 검열했는지를 알려주는 자료는 거의 없다. 검열자는 늘 '검은 선글라스'를 낀 사내였다.

스스로의 검열 행위를 공개하는 예외적인 검열자가 나타났다. 방송통신심의위원으로 활동 중인 고려대 박경신 교수. 그는 검열기구에서 있던 일들을 활발하게 공표한다. 그의 블로그(☞바로 가기)에 연재되는 '검열자 일기'. 이미 20회 넘는 '일기'를 올려두었는데, 검열 현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2010년대의 국가 검열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들이라면, 박경신이라는 검열자의 증언 덕분에, 내가 식민지 시기 검열을 연구하면서 겪어야 했던 자료적 어려움을 상당부분 덜 수 있으리라.

최근 그가 곤경에 처했다. 성기 사진은 무조건 음란물로 간주하여 삭제해도 좋은가를 묻기 위해 검열당한 성기 사진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다가 음란물 유포혐의로 기소되었다. (☞관련 연재기사 바로 가기 : '술' 들어가면 '19금'? 이태백 시도 검열하시지!) 사실 박경신이 아니라면 기소까지 가지는 않았을 지도 모른다. 예술이나 학문적 행위에 대해서는 검열당국은 매우 유연하게 대응해왔음에도, 유독 박경신만은 예외로 취급한 것이다. 그동안 미네르바 사건, PD수첩 광우병 기소사건 등에서 검찰에 맞서는 행보를 해왔던 박경신이니 '괘씸죄'가 적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 박경신 고려대학교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기소당한 박경신은 법정에서 자신을 방어해야 한다. 검찰은 기소유지가 직업이지만, 교수인 박경신은 강의와 연구를 해가면서 따로 시간을 내어 자신을 변호해야 한다. 이렇게 고달픈 신세가 되면 방심위원 활동 등에 쏟을 힘은 자연히 약화되다. 무죄 판결이 나더라도 검찰은 손해 볼 게 없는 장사라고 판단한 게 아닐까. 또 다른 방식의 교묘한 검열 행위이다.

검열자이면서도, 시키는 일이나 '국으로' 잘하고 있기를 감히 거부한 박경신. 검열관이 어둠에 머물기를 거부했다가 검열 대상이 되어버리는 아이러니는 이 정권에서 표현 자유가 얼마나 상시적으로 짓밟히고 있는 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러나 박경신이 있기에 검열 행정은 밀실에서 광장으로 한 걸음쯤은 빠져나올 수 있었다.

사전 검열은 이미 우리 헌법에서 부정되었지만 최소한의 사후적 점검은, 그것을 검열이라 부르건 심의라 부르건 간에, 어떤 사회이건 간에 이뤄질 수밖에 없다. 무제한의 자유는 불가능하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무슨 기준으로 어떤 방식으로 사후 심의를 시행해야 할 것인가. 이 쉽지 않은 문제를 대화와 토론을 통해 합의해가는 것이 민주주의적 거버넌스일 터이다. 그러기 위해 중요한 요구 중 하나는 바로 검열자가 양지로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어두운 밀실 밖으로 나온다면 검열자들은 일방적으로 우월한 권력일 수 없다. 그들의 검열행위는 다시 대중들에게 감시당한다. 그렇게 된다면 그들이 무소불위로 휘두르고 있는 검열의 칼날은 좀 더 신중하고 현명한 것이 될 터이다.

이효석 이후 검열관들은 자신의 직업을 부끄럽게 생각해왔다. 인터뷰는커녕 자신의 경력조차 숨기고자 했다. 권력의 일방적 필요에 의해 이뤄지는 암흑 속의 검열에 대해서, 검열관 스스로가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박경신은 양지로 나오고자 하는 첫 검열자이다. 시민의 합의에 근거하여 이뤄지는 최소한의 검열은 광장에서 이뤄질 것이며 그때라면 검열관은 현명한 자의 명예로운 직책이 될 수 있다. 박경신의 존재는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 그의 '검열자 일기'가 빨리 속개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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