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금지어 목록에 의한 검열은 부분주의 검열이라고 부른다. 작품의 한 부분에만 주목해서 검열한다는 뜻이다. 매우 효율적이지만, 무리한 검열 결과가 나오게 되고, 검열 행정을 저질의 우스갯거리로 전락시킬 가능성이 크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 동원되는 것이 맥락주의 검열이다. 이미 말한 대로 달라이 라마는 금지어이지만, 티베트 독립을 비판하기 위한 글일 경우는 허용하는 식이다.
식민지 시기 검열에서도 이미 부분주의는 맥락주의에 의해 보완되고 있었으며, 맥락주의의 빈틈을 노리는 우회적 글쓰기까지 탄생하였다. 그런데 오로지 부분주의에 기대겠노라는 시대착오적 블랙코미디가 최근 대한민국에서 선보였다. 술, 담배라는 단어만 들어가면 그 노래는 '19금'으로 지정해버리겠노라는 여성가족부의 방침이었다.
여성가족부의 행정적 일관성을 위해서 충고한다면, 송강 정철의 고전 작품들을 모두 교과서에서 삭제하라. <관동별곡>에서는 동해 바다를 '거대한 술동이'라고 은유했으며, <장진주사>에서는 "한 잔 먹세 그려 또 한 잔 먹세 그려"하고 읊지 않았던가. 물론 "하늘이 술을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왜 하늘에 주성(酒星)이 있고, 땅이 술을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왜 땅에 주천(酒泉)이 있겠는가"하고 읊은 <월하독작(月下獨酌)> 등 이태백의 수많은 작품도 19금으로 묶어야 한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도 19금으로 묶어야 할 것이며, 사르트르와 카스트로의 사진에는 담배를 먹칠해야 한다. 아니, 아예 술, 담배라는 단어 자체를 19금 판정내리는 게 좋을 뻔했다. 19세 이하 청소년들에게는 술, 담배라는 단어 자체를 쓰지도 못하게 하고 가르치지도 않는 방식 말이다.
물론 이런 무리한 검열은 여론의 뭇매를 맞았으며 결국 유해 매체 지정을 즉각 취소하라는 법원의 판결로 여성부는 공개 망신을 당한 셈이 되고 말았다. 음반심의위원회 위원장이 대중음악에 대해 비판적인 기독교인이라는 점이 밝혀지자 누리꾼들은 "술(포도주)은 물론 근친상간, 살인, 강간 등이 숱하게 나오는 성서부터 19금 지정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비판하기도 했다. 맥락을 고려하지 않는 부분주의 검열은 역시 이런 위험성을 지닌다.
그럼에도 부분주의는 행정적 효율성 때문에 유구하게 살아남는다. 영화에서 국부를 드러내면 안 된다는 검열 기준 또한 부분주의 검열이다(30년쯤 전에는 키스신조차 금지 대상이었다). 그래서 성인영화라고 하더라도, 특정 부위에 뿌옇게 '안개 처리'하는 작업이 필수적이다. 맥락이 무엇이건 간에 국부를 드러내는 것만은 죽어도 못 봐주겠다는 것이다.
왜 우리는 성기를 남에게 보여주는 일은 절대로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기관총으로 몇십 명을 살해하는 장면은 아무렇지 않게 통과시키면서, '사람을 만들어내는 신체 기관'(생식기)은 '죽어도' 보여주지 못하게 만들겠다고 주장하는 걸까. 과연 성기 노출은 살인보다 심각하게 '현존하고 명백한 사회적 위험'을 불러오는가.
왜 대낮 광장에서 버젓이 '꼬추'를 드러내고 있는 '오줌 싸는 아이' 분수에는 붕대를 감아두지 않는가. 어린아이의 성기는 '성적 수치심'을 자극하지 않는다고? 그러면 몇 살까지 성기를 노출해도 괜찮은가. '오줌 싸는 아이'는 왜 남자아이 뿐인가. 성차별 아닌가. '오줌 싸는 소녀 상'을 만들면 한국의 검열 권력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실제로 브뤼셀에는 오줌 싸는 소녀 상이 있다고 한다). 음란인가 퇴폐인가, 아니면 무방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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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 가보면 숱하게 진열된 나체화들도 물론 안개 처리 없이 멀쩡하다. 왜 그런가. 왜 어떤 사람의 성기 표현은 걸작으로 칭송되고 어떤 사람의 표현은 음란물로 삭제되는가. 방송통신 심의 위원 박경신은 이런 문제를 제기했다가 기소 당했다. 즉 음란물로 판정받은 남성 성기 사진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려놓고 이게 과연 음란한 것인가를 물었다가 음란물 유포죄로 기소된 것이다.
그는 묻는다. 프랑스 오르세 미술관에 버젓이 전시되어 있는, 여성 음부를 극사실적으로 표현한 크루베의 나체화 '세상의 근원'은 세계적인 걸작이고, 이름 없는 사람의 성기 사진은 음란인가. 과연 그렇게 판단하고 검열해도 좋은가.
물론 예술 작품은 예외라고 답변할 것이다. 하지만 그 답변은 충분하지 못하다. 나체화 또한 태초부터 보장되었던 것이 아니라 예술가들의 오랜 투쟁에 의해 얻어낸 표현의 자유에 불과하다. 게다가 무엇이 예술이고 무엇은 예술이 아닌가. 누가 그것을 무슨 근거로 결정하나. <춘향전>은 태곳적부터 예술이고 고전 작품이었나. 10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음란 교과서'라는 비판을 받지 않았던가. 영화는 예술이 아니기 때문에 성기 노출을 '안개 처리'하는가. 심지어는 성인들에게도 절대로 성기는 보여주지 않아야 한다는 것인가. 왜 모든 '인간의 근원'을 금기시하는가.
오랫동안 유교적 가치관에서 살아온 한국인들은 성적 묘사에 대해 대체로 엄격한 경향이 있다. 폭력보다 성에 엄격한 검열 결과는 한국인들, 특히 중년 이상의 남성들에게 상당한 지지를 얻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 한번쯤 심각하게 고민해볼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아무런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성기 노출은 안 된다는 식의 단세포적 검열 원칙을 과연 언제까지 지속해나갈 것인지. 그것이 불러오는 표현 자유와 예술적 상상력의 제한에 대해서 고민해볼 때도 되지 않았을까.
다시 한번 말하거니와, 식민지 시기에도 이미 맥락주의가 활용되었고, 그 맥락주의의 빈틈을 역이용하는 검열 우회도 나타났으며, 이에 대해 경고하는 검열 지침까지 만들어졌다. 표현 자유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던 시절에도 검열이란 이토록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표현의 자유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매우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라면 두말할 것도 없다.
현재 한국 대법원의 판례 역시 음란물 여부는 '해당 표현물을 전체로서 보았을 때'를 기준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하여 맥락주의를 채용하고 있다. 이에 비추어 기소는 매우 무리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법학자 박경신의 블로그 어느 부분에 음란성이 있단 말인가. 변론 요지의 표현 그대로 '성기 자체로서는 음란할 수 없다.'
표현 자유의 보장과 일정한 (최소한의) 규제의 필요라는 모순된 요구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는 결코 단순한 게 아니다. 그럼에도 한국의 요즘 검열관들은 이런 문제에 대한 철학적 문화적 고민 없이 자신의 직무를 기계적으로 이행한다. 박경신에 따르면 실무부서에서 삭제 의견으로 올라온 것들은 거의 100퍼센트 그대로 판정한다는 것이다. 검열 담당자들이 부분주의에 매몰된 단세포적 검열을 해대니, 네티즌들이 "그렇게 하려면 나도 검열관할 수 있다. 나를 시켜 달라"고 나서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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