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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빛 잔혹사, 그 쥐는 결국 어떻게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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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빛 잔혹사, 그 쥐는 결국 어떻게 되었나?

[프레시안 books] 데이비드 스즈키의 <마지막 강의>

한참 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 실험실에서 흰쥐를 키웠었다. 명목상 실험용 쥐였지만, 한 후배와 함께 애완동물처럼 꽤 공들여서 키웠다. 유당 분해 효소가 없다는 핑계로 매일 오전에 내 앞으로 나오는 급식 우유는 대개 흰쥐들 몫이었다. 암컷 두 마리, 수컷 한 마리.

그러던 어느 날, 동물 사랑이 남달랐던 후배가 사색이 되어서 나를 찾았다. "쥐가 세 마리에서 두 마리로 줄었어요!" 한 마리가 자유를 찾아서 탈출이라도 감행한 것일까? 그런 낭만적인 일이 있을 리 없었다. 세 마리 쥐가 살던 실험용 우리를 자세히 살펴보니, 핏자국이 낭자했다. 그리고 한쪽에 쌓아놓은 톱밥 사이로 쥐의 머리가 보였다. 몸통은 없었다.

암컷, 수컷이 합심해서 쥐 한 마리를 공격해 물어뜯고, 심지어 포식한 것이다. 포만감에 행동이 둔해진 쥐 두 마리는 살육의 현장에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웅크리고 있었다. 살육의 과정에서 정분이라도 났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암컷의 배가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20일쯤 후에 새끼 여섯 마리가 태어났다.

일찌감치 수컷은 따로 격리를 시켰다. 암컷과 새끼를 위협할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상황은 또 엉뚱하게 전개되었다. 새끼가 태어난 지 며칠 지나지 않아서 암컷과 있어야 할 새끼들이 모조리 사라진 것이다. 그들은 모두 다 어미의 뱃속에서 소화되는 중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암컷이 새끼에게 위해를 가하는 일은 자연 생태계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니까.

이 '쥐들의 잔혹사'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어느 날, 우리에 쥐가 한 마리밖에 없었다. 수컷이 암컷을 공격해서 역시 잡아먹어버린 것이다. 처음에는 한 마리가 정말로 도망간 줄 알았다. 이번에는 머리, 몸통을 통째로 먹은 통에 생긴 오해였다. 우리 구석에서 쥐꼬리를 발견하고 나서야 오해가 풀렸다.

진절머리가 났다. 결국 최후에 생존한 그 쥐는 학교 옆의 밭에 풀어줬다. 소심한 복수였다. 쥐 세 마리로 이뤄진 우리 생태계에서는 강자일지라도, 자연 생태계에서는 약자일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 쥐가 단번에 뱀과 같은 포식자의 먹이가 되었을지, 남다른 기지로 살아남아 생태계를 교란했을지는 알 수 없다.

'바이오필리아'는 없다!

▲ <마지막 강의>(데이비드 스즈키 지음, 오강남 옮김, 서해문집 펴냄). ⓒ서해문집
평생을 생명 과학과 환경 운동에 바친 데이비드 스즈키는 <마지막 강의>(오강남 옮김, 서해문집 펴냄)에서 캐나다로 이주한 일본인 3세대인 자신의 삶을 날실로, 평생 동안 축적한 사유를 씨실로 인류가 미래에도 생존하려면 자연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절절히 들려준다.

특히 인류의 생존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불, 물, 흙, 땅, 공기 등 자연의 기본 요소에 대한 스즈키의 성찰은 마치 한 편의 시를 읽는 것처럼 마음을 울린다. 생명의 비밀을 파헤치고자 노력했던 과학자의 목소리로 듣는, 과학의 환원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도 과학기술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를 일깨우는 죽비 구실을 한다.

150쪽 분량의 문고판은 읽기에 부담스럽지 않고, 애초 다큐멘터리()를 책으로 재가공한 것이라서 눈높이가 낮다. 세계적인 명성에 비해서 유독 한국의 독자에게 외면을 받았던 스즈키의 깊고 넓은 사유를 확인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이어서 박원순 서울 시장이 호평한 <굿 뉴스>(조응주 옮김, 샨티 펴냄) 등을 찾아서 읽으면 금상첨화다.

그렇다고, 인류의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스즈키의 고언에 모두 동의한 것은 아니다. 적어도 나에게는 불편한 대목이 몇 대목이 있었다. 특히 스즈키의 자연에 대한 낭만적 이해가 불편했다. 그의 <마지막 강의>를 읽으면서, 뜬금없이 앞에서 소개한 '쥐들의 잔혹사'를 떠올렸던 것도 이 때문이다.

스즈키의 애틋한 '자연 사랑'은 그 자체로 존경할 만하다. 실제로 그는 물론이고 레이철 카슨을 비롯한 생태주의의 선구자는 모두 이런 유의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감정이 어느 정도는 '전체로서의 자연, 부분으로서의 인간'이라는 우리 위치에 대한 자각으로 이어진 것도 사실이다.

스즈키도 즐겨 인용하는 에드워드 윌슨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연 사랑' 혹은 '생명 사랑'이 인간의 본성이라며 '바이오필리아(Biophilia)'라는 말까지 만들었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고양이, 개 등을 좋아하고 양육하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그런 '바이오필리아'의 경험이 과연 스즈키가 얘기하는 인간과 자연의 다른 관계에 기반을 둔 조화로운 미래로 이어지는데 얼마나 도움이 될까? 20세기 동물을 보호하는 가장 강력한 법이 히틀러의 나치 독일에서 있었다는 역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반대는 어떤가? 여러 가지 이유에서 동물 양육을 반대하지만, 누구보다도 환경 운동에 열성적인 이들이 있다. 환경 문제에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온 나만 해도 그렇다. 나 역시 동물 양육을 반대하고, 특히 고양이는 아예 싫어한다. 고양이는 애완동물 중에서 유일하게 살육을 '오락'으로 즐기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내가 고양이 애호가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생각해봐야 할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자연은 어머니 같은 존재가 아니다. 실제로 자연은 언제든지 날카로운 발톱으로 할퀼 수 있는 야수다. 그곳에서는 지금도 강자가 약자를 포식한다. 온갖 자연재해는 수많은 생명의 존재 조건을 일시에 박탈한다. 앞에서 소개한 '쥐들의 잔혹사'는 실제 자연에서 지금 이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생생히 보여준 축도다.

더구나 자연과 인공의 구분도 사실은 우리 머릿속 관념의 산물일 뿐이다. 예를 들어서, 원시 자연에 가장 가까운 세계 곳곳의 국립공원 같은 '야생 보호 구역'조차도 사실은 인류가 (때로는 피의 학살을 통해서) 만든 것이다. 오늘날 야생 보호 구역의 원형을 만든 미국 국립공원의 역사는 이를 잘 보여준다. 미국 정부는 1872년 세계 최초의 야생 보호 구역으로 지정된 옐로스톤 공원을 만들면서, 그 공원에 사는 쇼쇼니 인디언을 강제 추방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 군대는 추방에 저항하는 약 300명의 원주민을 학살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 스즈키나 윌슨이 얘기한 '생명 사랑' 즉 '바이오필리아'는 인간 본성도 아닐뿐더러, 인간과 자연이 다른 관계를 맺는 데에 필요조건도 아니다. 이런 식의 접근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것을 가로막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미 엉겨 붙어서 자연과 인공의 구분이 불분명한 현실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부추긴다.

이것이 인간인가?

그렇다면, 스즈키의 바람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나는 자연에 대한 경외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존중이야말로 그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서로 물어뜯는 쥐들과 같은 모습으로 전락한 인간의 아귀다툼이야말로 오늘날 인류의 생존뿐만 아니라 지구의 생존을 위협하는 중요한 이유이기 때문이다.

독일 녹색당은 좋은 예이다. 1983년 처음 의회에 진출한 녹색당은 1998년 사회민주당과 연정을 구성해 집권 여당이 되기에 이른다. 이 때 녹색당을 이끌었던 이가 바로 <나는 달린다>(선주성 옮김, 궁리 펴냄) 등으로 국내 독자에게도 친숙한 요스카 피셔다. 하지만 녹색당은 사회민주당이 인간보다는 시장을 존중하는 정책을 펼 때, 그것을 막기는커녕 적극 동조하는 우를 범했다. 심지어 2002년에는 '부득이한' 무력 사용을 승인하기에 이른다.

인간을 외면한 자연에 대한 경외가 낳을 수 있는 또 다른 실패의 모습을 독일 녹색당이 보여준 것이다. 지지자에게 강한 환멸을 남기며 몰락하는 것 같았던 녹색당은 일본의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에 부활했다. 하지만 단언하건대 녹색당이 요스카 피셔의 전철을 밟는다면 그 미래는 결코 밝지 않다.

물론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해야 인간과 자연의 관계도 회복될 수 있다는 발상은 지극히 인간 중심적이다. 하지만 되물어보자. "지구에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 중에서 가장 최근에 생겨난" "가장 어린 종"인 인간이 "신성한 자연"과 균형을 이뤄서 바람직한 미래를 만들어가자는 발상이야말로 얼마나 오만한 일인가?

그저 우리는 인류의 생존을 위해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러다 인류의 깜냥이 안 된다면 도리가 없지 않은가? 쥐 세 마리로 이뤄진 우리 안의 작은 생태계가 자멸했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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