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는 지난 15일 발효된 한미 FTA를 놓고 "이미 국회 비준까지 간 조약을 폐기하는 건 말이 안 된다"며 이에 대한 대안으로 복지 국가라는 '일괄 타결안'을 제시했다.
19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장하준·정승일·이종태 지음, 부키 펴냄)의 출간 기념 간담회에서 그는 "한미 FTA는 우리나라가 1등 국가가 되는 것을 포기한 조약"이라 강하게 비판하면서도 '폐기' 구호를 외치기보다 복지로 눈을 돌려야 한다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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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장하준·정승일·이종태 지음, 부키 펴냄). ⓒ부키 |
7년간 상황은 바뀌었다. 2008년 세계 금융 위기로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중의 맹신이 다소 꺾였고, 노무현 정부가 이명박 정부로 바뀌었다. 그러나 '원조 우파 신자유주의' 이명박 정부가 좀 더 적극적으로 규제 완화 정책을 펼치긴 했지만 '좌파 신자유주의' 노무현 정부 역시 정부 산업 정책을 축소하고 공기업 민영화에 찬성하는 등 시장주의에 경도되어 있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저자들은 닮은꼴인 두 정부 정책을 김대중 정부 당시 외환 위기 이후부터 진행된 거센 신자유주의화의 흐름 속에서 파악한다.
한편, 극적인 변화도 있었다. 7년 전엔 전무했던 복지 국가 담론이 여야를 막론하고 중심 의제가 된 것이다. 오랜만에 한국을 찾은 장하준 교수가 "복지를 가장 앞에 내세운 새누리당의 선거용 현수막을 보고 심장마비에 걸릴 뻔했다"고 말할 정도다. 장하준 교수는 "정치인들이 인기를 얻기 위해 억지로 복지를 내세웠다 하더라도, 대체 왜 그게 인기를 끌게 되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
▲ 이종태 <시사IN> 기자(왼쪽), 장하준 케임브리지 대학교 교수, 정승일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 ⓒ부키 |
복지가 곧 경제 민주화
그러나 저자들은 현재 한국의 복지 국가를 바라보는 관점에 큰 왜곡이 있다고 지적한다. 하나는 복지와 경제 민주화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경향이다. 특히 "복지도 중요하지만 재벌을 개혁하고 시장의 공정성을 다진 뒤에 생각하자"는 진보 진영의 경제 민주화론자들에 대해, 이들은 "진보의 착각"이라며 강하게 경계한다.
저자들에 따르면, 한국 경제 문제의 원인을 신자유주의보다는 관치, 재벌, 토건 경제 등 박정희의 유산에서 찾는 한국의 진보 자유주의자들은, 경제 민주화라는 명분 하에 노무현 정부의 '좌파 신자유주의 노선'을 집행하게 만들었다. 이 책에서도 전체 7개 장 가운데 두 장을 박정희와 재벌 문제에 할애하며 진보 진영 내 경제 민주화론자들에게 비판의 날을 세웠다.
저자들은 경제 민주화라는 대의 자체엔 공감하지만 재벌 해체를 외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내 경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글로벌 기업, 금융 자본의 침투에 맞서 국가가 적극적으로 산업 정책과 금융 규제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말한다. 정승일 정책위원은 재벌 해체론자들이 "마치 금융 시장이 없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게 문제"라며, 섣불리 칼을 집어들 경우 국내 대기업이 해외 대기업에 매각되어 시장이 월가 모델과 닮아가는 최악의 경우를 낳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 경제 민주화에서 강조되는 '공정성'에 대해서는 "재벌을 키운 박정희 식 경제 모델이 국내적으로는 중소기업에는 불공정하지만 다국적 기업과의 경쟁에선 공정할 수 있는 것처럼 상대적인 개념이다"라고 말했다.
정 위원은 "우리의 복지 국가 모델은 단순히 복지 정책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 기업의 하청 단가를 규제하는 동시에 하청 단가를 깎게 만드는 상위 시장을 규제하며 거기서 부족한 부분은 국가가 복지 예산을 늘려서 해결하게 만드는, 경제 민주화를 포함한 총체적인 구상이다"라고 덧붙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저자들은 "복지가 곧 경제 민주화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무상' 급식은 없다
ⓒ부키 |
여기서 장 교수가 제시하는 개념은 '공동 구매'다. 복지 예산의 증가는 증세 없이 불가능한데, 세금을 '빼앗기는 돈'이 아니라 '같이 쓰는 돈'으로 보고 복지 지출을 공짜가 아닌 공동 구매로 보는 인식 전환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다니는 길과 학교, 병원이 곧 세금의 사용처"라며 "'세금 오르는 건 싫지만 어려운 사람이 많다니까 할 수 없이 더 낸다'는 인식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뿐 아니라 복지가 분배의 문제일 뿐이라는 편견도 폐기해야 한다는 게 저자들의 주장이다. 우리 대부분이 시혜주의에 착안한 미국식 복지밖에 몰라 오해하곤 하지만, 스웨덴·핀란드 등의 보편적 복지 모델은 복지가 경제 구조 변화를 도우며 "생산적 선순환"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장하준 교수는 "전 국민이 의료보험을 받지 못하는 미국의 경우 사원 구조 조정은 목숨이 걸린 문제지만, 스웨덴에선 높은 실업 급여와 주거 및 재교육이 보장되어 있어 실업 사태가 벌어져도 저항이 적다"며 노동과 생산이 복지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예를 들었다.
장하준 "20대에게 미안하다"
'북유럽식 복지 국가'가 한국의 현실과는 너무 먼 이상이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서 정승일 위원은 "과거 1980~90년대에 사회엔 이상이란 게 있었지만 지금은 없지 않나"라며 "복지 국가가 2000년대에 있어 국가 전체를 꿰뚫는 유력한 이상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스웨덴의 경우 1932년까지 소득세조차 없었고, 현재의 복지 국가 모델을 만드는 데 40년이 걸렸다"며 이상을 현실로 바꾸기 위해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에 상응하는 복지 국가 계획과 그 실행을 주문했다. 한국이 이탈리아 수준의 복지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연간 150조 원의 세금을 더 걷어야 할 정도로 갈 길이 멀지만, 경제 개발 계획의 결과가 입증했듯 30년간 노력하면 북유럽 수준도 가능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한편, 수많은 학자들이 정계에 노크하거나 청년들의 '멘토'를 자처하는 세태를 반영하듯 이날 베스트셀러 저자인 장하준 교수에게도 관련 질문이 집중됐다. 그러나 장 교수는 "정치계로부터 러브콜을 받은 적은 없으며, 개인적으로도 책 저술이나 언론을 통해 발언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며 선을 그었다. 또 "나를 포함한 40~50대들이 복 받은 세대인 것에 비해 현재 청년들은 아무리 고생해도 보상을 받기 어려운 상황이라 미안함을 느낀다"면서도 "그런 상황을 바꾸기 위해 복지 강조에 힘을 쓰고 있는 것"이라며 학자적 범위를 넘지 않는 대답을 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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