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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는 왜 이 책을 외면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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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는 왜 이 책을 외면했을까?

[편집자, 내 책을 말하다] 김병준의 <99%를 위한 대통령은 없다>

편집자로서 가장 뿌듯할 때는 만든 책이 독자에게 온전하게 읽힐 때이다. 그 책이 필요한 독자가, 그 책을 제대로 읽어서 도움을 얻을 때, 편집 일을 헛되이 하지 않았다고 느낀다. 그럴 때야 책이 인쇄된 종이와 그 종이를 만드느라 희생된 나무에 부끄럽지도 않고 말이다.

편집자로서 가장 안타까울 때는 그 반대다. 공들여 만든 책이 기대하는 대상 독자에게 제대로 읽히지 않고 조용히 묻혀버리거나, 전혀 의도와는 다르게 엉뚱하게 읽히는 경우다. 독자에 대한 겨냥이 한참 빗나가고 오해까지 받게 되면, 책을 잘못 만들었다는 자괴감이 든다. 책의 가치를 온전하게 살리고 알리는 것이 편집자의 일일 텐데 그렇게 되지 않았으니, 저자와 책에 죄송한 마음이 가득하다.

▲ <99%를 위한 대통령은 없다>(김병준 지음, 개마고원 펴냄). ⓒ개마고원
최근에 나온 <99%를 위한 대통령은 없다>(개마고원 펴냄)에 대해서도 비슷한 심정을 느끼고 있다.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정책실장과 부총리를 지낸 김병준의 책이다. 애초에 이 책이 대상으로 한 것은 진보·개혁 성향을 가진 독자들이었다. 제목부터가 그러지 않은가? 말하자면 지금 한국 사회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1퍼센트'와 '99퍼센트'로 상징되는 불평등한 구조가 잘못됐다고 여기는 사람들, 정치를 통해 뭔가 변화를 일으키고자 하는 사람들을 예상 독자로 삼았다.

이 책은 그런 독자들에게 오늘날 한국 정치·사회의 숙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생각해봐야 하는지, 질문을 던지고 있다. 1.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2. 성장 담론 없이 집권을 한다? 3. 국가 위의 기업, 무엇이 신자유주의를 불렀나? 4. 집권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5. 양극화를 복지로 푼다? 6. 욕심을 버리고 상생을 하라? 7. 아직도 메시아를 기다리는가? 이렇게 7가지 테마로 성장과 분배, 신자유주의, 정치 개혁, 복지, 상생 발전 등 진보 진영에서 주로 고민하는 문제들을 담았다.

그런데 웬걸? 막상 책이 나오고 나서 이 책을 주목한 것은 거의 다 보수 진영이었다! 심지어 우리 개마고원은 원래 보수 언론의 대명사인 <조선일보>에는 책도 보내지 않는데, 책 나온 건 어떻게 알았는지 발간 3일 만에 저자 인터뷰를 대문짝만하게 실기까지 했다. 출판사엔 가타부타 연락도 없이 말이다. 그 외에도 경제 신문을 포함한 각종 보수 언론과 보수 인사가 이 책을 소개하고 인용한 것을 확인했다. 본래 책이 많이 노출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이번 경우에는 조금 떨떠름한 기분이다. 정작 기대했던 진보 진영의 반응은 없이, 엉뚱하게 책이 이용되고 있으니 말이다.

사실, 저자의 주장에는 현재의 진보·개혁 진영이 받아들이기 거북스러운 부분이, 반대로 말하면 보수 진영이 좋아할 만한 부분이 있다. 예컨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한 태도에서 저자는 입장을 바꿨거나 적당히 얼버무리고 있는 다른 노무현 정부 인사들과는 다르게 예전의 입장을 고수한다. 한미 FTA는 신중히 접근해야 할 문제지만, 기본적으론 미래를 향한 도전이며 근거 없는 기대에 근거한 낙관도, 근거 없는 지나친 두려움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보수는 아니나 다를까 이 점을 포착했다.

전반적으로, 저자의 입장은 복지, 증세, 양극화 해소, 상생 발전, 이런 문제들에서 진보적 주장만 앞세우지 말고 현실의 난관을 잘 살피면서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대다수 사람들이 왼쪽으로 급격히 이동해 신자유주의 극복과 복지 국가를 말하고 있는 지금, '그거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는 일 아니다'라며 딴죽을 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더불어 지금의 진보 진영이(대개 민주당 계열을 지칭할 것이다) 시대적 흐름에 휩쓸려 별 준비와 고민도 없이 복지나 신자유주의 극복, 양극화 해소 등을 안이하게 주장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솔직히 개인적으로도 '이거 너무 보수적인 거 아냐? 이렇게 다 따지다 보면 세상을 어떻게 바꿔?'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으니까. 아마 이런 부분이 생각보다도 진보 성향의 독자들에게 거부감을(그리고 보수에는 호감을) 많이 준 것 같다.

하지만 그래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현실의 문제가 그리 만만하지 않다는 엄연한 사실이었다. 저자의 생생한 경험에서 나온 지적들은 분명 맞는 이야기였으니까. 해법과 지향은 다를 수 있어도 현실에 근거한 문제의식만큼은 완전히 동의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이 책은 현실 정치와 정책의 핵심 사항을 아주 대중적으로, 탁월하게 전달하는 장점이 있다.

신자유주의를 비롯해 한국 사회의 현황을 이렇게 쉽고 간명하게 정리한 내용도 드물다. 입장에 따라서는 거슬리고 불편한 이야기가 있더라도, 현 사회를 바라보는 눈을 틔어주는 값진 미덕이 있다고 생각한다. 정치 성향을 떠나서 경청하고 되새길 만한 부분이라고 여겼고. 편집자로서 바란 것은 독자들이 그런 문제들을 함께 인식하면서 더 깊고 알찬 고민을 하는 것이었다. 보수 진영이 편한 대로 가져다 쓰는 것이 아니라. 거듭 아쉬운 일이다.

생각은 다른 생각들과 부딪치며, 다듬어지고 단단해진다. 나는 이 책에 담긴 고민과 문제의식들이 진보 성향 독자의 생각을 더 깊고 단단히 해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의 담론 수준도 더욱 높아질 것이며, 저자가 소망하는 것처럼 국민들 하나하나가 좀 더 '깨어날' 것이다. 처음 생각했던 대로 이 책이 그런 독자를 만났길, 앞으로 더 많이 만나길 고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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