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3월 14일
오랫동안 한국에서 시행되어 온 반공 교육의 요점 하나는 제2차 세계 대전 후의 세계에서 전 세계 공산 혁명을 지향하는 소련의 팽창 야욕이 평화에 대한 최대의 위협으로 제기되었다는 것이다. 냉전 논리의 출발점으로 지목되는 조지 케넌의 '긴 전보'(1946년 2월 22일자 일기)도 소련의 위협을 지적한 것이었고, 미국의 냉전 체제 돌입은 이에 대한 대응으로 이해되어 왔다.
냉전이 끝난 후 이 위협이 과장된 것으로 밝혀져 왔고, 이것은 해방 공간 조선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도 큰 의미가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소련의 '세계 적화 야욕'이 워낙 오랫동안 당연한 사실처럼 인식되어 왔기 때문에 이를 부정하는 새로운 관점을 바로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이 있다. 오늘은 틈을 내어 이 점을 좀 차분히 살펴보겠다.
에릭 홉스봄의 <극단의 시대>는 냉전 해소 직후인 1994년에 나온 책인데, 이 책에서 홉스봄은 이미 '소련의 야욕'을 반공 이데올로기의 통념보다 축소해서 보고 있었다. <극단의 시대> 출간 이후 공표된 공산권 자료는 그의 관점을 더욱 뒷받침해주어 왔다. 이 점에 대한 홉스봄의 관점을 옮겨놓는다. 나는 이 관점에 동의하는데, 독자 중 동의하지 않는 분들도 비판을 위한 표준으로 삼기 바란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 소련에게 팽창의 의지도 없었고 1943~45년간의 정상 회담에서 합의된 범위를 넘어서는 공산주의의 확대를 기대하지도 않고 있었다는 사실이 오늘날에는 분명히 밝혀져 있고, 1945~47년의 시기 중에도 대충 이해되고 있었을 것이다. 사실에 있어서 소련의 통제력이 미치는 정권과 공산주의 운동에서는 소련을 모델로 한 국가 건설을 지향하지 않는 데 특별히 역점을 두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그리고 일당 독재와 거리가 먼 다당제 의회 민주주의와 혼합형 경제 체제의 국가를 지향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도 일당 독재도 "유용하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다"고 당내 문서에 기록되어 있다. (공산 정권 중 이 노선을 따르지 않은 것은 자기네 혁명 노선에 대한 스탈린의 간섭을 거부하고 모스크바의 통제에서 벗어난 나라들뿐이다. 유고슬라비아가 그런 예다.)
그뿐이 아니다. 많이 주목받지 못해 온 사실인데, 소련의 군대 감축은 미국 못지않게 빨랐다. 1945년에 1200만 명에 육박했던 적군 병력은 1948년 말까지 300만 명 수준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어떤 합리적인 기준으로 보더라도 소련은 적군 점령 지역 밖의 누구에게도 아무런 위협을 제기하지 못하고 있었다. 국토는 전쟁으로 황폐해져 있었고 평화시의 경제는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그리고 국민이 정권에 깊은 애정을 갖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은 외부에서도 알아볼 만큼 뚜렷하고도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서부 지역에서는 여러 해째 이어져 온 우크라이나인을 비롯한 민족주의 게릴라 문제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게다가 이 나라를 다스리는 독재자는 자기 울타리 안에서는 한량없이 사나우면서도 울타리 밖에서는 형편없이 소심한 모습을 보여 온 인물이었다. 스탈린 얘기다.
소련은 경제 원조를 절박하게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러니 원조를 제공할 능력을 가진 유일한 나라 미국과의 관계 악화는 단기적 이해관계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공산주의에게 자리를 넘겨줄 것이며, 따라서 두 체제의 공존이 영원한 것일 수 없음을 공산주의자인 스탈린은 믿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소련 지도자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상황에서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해 있다고 보지 않았다. 경제력과 군사력이 엄청나게 커진 미국의 영도 아래 자본주의가 오랫동안 계속될 것으로 그들은 내다보았다. 이 전망은 그들을 두려움으로 묶어놓았다. 전쟁 후 소련의 기본자세는 공격적이 아니라 방어적이었다. (<The Age of Extremes>, 232~233쪽)
제2차 세계 대전 승리의 주역이 미국이라고 하는 것도 반공 교육의 일환으로 볼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공산권에서는 소련을 주역으로 봐 왔다. 인적 동원과 희생은 소련이 더 컸고 물적 동원과 역할은 미국이 더 컸으니 어느 쪽 공로가 더 큰 것이었다고 나는 단정할 생각이 없다. 양쪽 역할이 모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는 정도로 이해해 둔다.
독일 항복 때까지 소련의 역할이 필요한 만큼 미국 등 연합국은 소련의 요구를 존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43년 12월의 테헤란 회담과 1945년 2월의 얄타 회담에서 전후 소련의 여러 가지 권리가 인정되었다. 전쟁이 일단 끝나고 보면 자본주의국가들에 비해 불리한 입장에 설 것이 분명했으므로 스탈린은 권리를 확보해 두는 데 열심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독일 항복 몇 달 후 새로운 변수가 나타났다. 원자폭탄이다. 소련은 미국보다 경제력에서는 뒤져도 군사력에서는 대등한 위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군사력에서마저 확연한 열세에 빠지게 되었다. 전쟁 중에 약속받은 권리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연합국 협력 관계를 잘 지켜야만 했다. 방어적 자세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련의 권리 확보 노력은 동유럽 지역에 집중되었다. 안보상의 이유 때문에 모든 방면의 접경 지역에 적대 세력이 자리 잡을 위험을 없애려고 노력하기는 했지만, 절대적 노력을 쏟은 것은 동유럽 지역이었다. 중국의 국공 내전에 거의 아무런 개입을 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중국 공산당의 승리 과정에 도움을 줬더라면 중국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이 더 확고하게 자리 잡았을 것이다. 그러나 소련에게는 연합국 협력 체제를 지키는 것이 지상과제였다.
소련이 유럽만을 중시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군사적 안보의 압도적인 중요성이 서쪽에 있었다. 러시아가 역사적으로 겪어 온 중요한 공격이 모두 서쪽에서 온 것이었고, 위협이 되는 열강이 모두 서쪽에 있었다. 그리고 공격으로부터 지켜야 할 러시아의 자산도 서쪽에 치우쳐 있었다.
또 하나의 이유는 공산주의 발전의 잠재력이 서유럽의 산업 사회에 있다는 믿음이었다. 산업화가 안 된 러시아에서 공산 정권이 먼저 성립한 이유가 그때까지도 석연하게 해명되지 못하고 있었다. 산업화가 공산 혁명의 전제조건이라는 마르크스 이래의 이론에 따라 장래 공산주의 발전의 주축은 소련으로부터 서쪽으로 향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리스가 스탈린에게 버림받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리스는 소련과 국경을 접한 곳도 아니고 서유럽으로 향하는 길목도 아니었다. 당시 소련이 자국 안보를 대외 정책의 최고 기준으로 삼은 것은 '1국 사회주의' 원칙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공산주의 이론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기가 조심스럽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을 전후한 공산주의 운동에 스탈린의 '1국 사회주의'가 끼친 영향은 피상적으로라도 살펴볼 필요를 여러 대목에서 느낀다.
소련 혁명 이후 독일 헝가리 등지의 공산 혁명이 계속 실패로 돌아가는 상황에서 스탈린이 1924년 말 처음 제기한 '1국 사회주의(socialism in one country)' 원칙은 1925년부터 코민테른 정책에 반영되기 시작했고, 1926년 1월 소련 국가 노선으로 채택되었다. 종래의 레닌주의는 소련에만 공산 정권이 성립되어 있는 것은 비정상적 상황이며 세계 혁명의 성공을 통해서만 공산 체제의 지속이 가능하다고 보았는데, 스탈린은 한 국가 안에서도 공산 체제의 지속이 가능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1국 사회주의 원칙에 따르면 각국 공산당이 자국의 복리나 심지어 자국의 혁명보다도 소련의 국익을 앞세우게 되어 있었다. 공산주의가 원래 민족보다 계급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는 이념이기도 하거니와, 1국 사회주의 원칙으로 인해 각국 공산당이 민족주의와 완전히 등지는 일이 일상화되었다. 나중에 공산주의자들이 민족 통일 전선을 제창하는 단계에 와서도 민족주의자들의 신뢰를 얻기 힘들었던 데는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초반까지 코민테른이 1국 사회주의를 강력히 추진한 까닭이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전까지는 어차피 소련 외의 나라에서 공산당이 정권을 쥐거나 참여할 형편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문제가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 그런데 대전 중 여러 나라 공산당이 항쟁 과정을 통해 정권 획득을 바라볼 만큼 실력을 키우자 일체의 공산주의 운동을 소련의 이해 관계에 맞추는 1국 사회주의 원칙의 문제점이 부각되었다.
동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소련군의 '해방' 덕분에 공산주의자들이 집권했다. 그런데 유고슬라비아는 예외였다. 티토의 빨치산 부대는 그 항전 능력 때문에 1943년 말 이래 영국 등 서방 연합국의 지원을 받았다. 1944년 6월부터는 망명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까지 받았고 자력으로 독일군을 격퇴했다. 소련군이 진격할 때는 일부 지역에 일시적으로만 들어오도록 협약을 맺었고, 독일 항복 후에는 소련군을 포함한 외국군 모두를 내보냈다. 그리고 1945년 11월 총선거를 통해 국가를 세우고 왕정을 폐지했다.
전쟁 후 티토는 유고슬라비아의 지도자에 그치지 않고 스탈린에 버금가는 공산권 지도자였으며 스탈린의 가장 충실한 협력자로 알려졌다. 그러나 두 지도자 사이에는 사실 긴장이 가득했다.
긴장의 근본 원인이 스탈린에게 티토가 고분고분하지 않은 데 있었으니 1국 사회주의 원칙의 문제점이라고 할 수 있다. 트리에스테 귀속 분쟁에서 스탈린은 티토의 양보를 요구했다. 그리고 그리스 공산주의자들의 항쟁에 개입하지 말 것도 요구했다.
소련에게 절실하지 않은 문제에서는 서방 연합국에 양보함으로써 갈등을 피하려는 것이 스탈린의 방침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티토에게는 극복해야 할 짐으로 민족주의 문제가 있었다. 유고슬라비아를 6개 민족의 연방체로 만든 것과 같은 원리로 발칸 지역 전체의 연방체를 만드는 것이 티토의 꿈이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트리에스테도 빼앗아와야 했고 그리스 항쟁도 지원해야 했다.
결정적인 단층은 티토가 독자적 경제 개발 정책을 세우는 데서 일어났다. 1948년 4월에 티토가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고 한다.
"우리는 소련 체제를 연구하고 모델로 삼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조금 다른 형태의 사회주의를 구상하고 있습니다. (…) 우리 모두가 사회주의의 고향 소련을 지극히 사랑하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우리 조국을 그보다 덜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두 달 후 유고슬라비아는 코민포름에서 축출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티토가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대목이 있었다고 한다. (두 편지 모두 <Wikipedia> "Josip Broz Tito" 조에서 재인용)
"나를 죽이라고 사람을 자꾸 보내지 마시오. 벌써 다섯 명이나 붙잡았는데, 폭탄 가져온 사람이 하나, 장총 가져온 사람이 하나, (…) 그만 보내지 않으면 나도 모스크바에 한 사람 보낼 거요. 나는 딱 한 사람만 보낼 거요. 더 필요가 없을 테니까."
소련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공산 정권을 세운 나라로 유고슬라비아 외에 중국이 있다. 일본 항복 후 국공내전 과정에서 소련은 놀라울 정도로 중국 공산당을 외면했다. 다롄(大連) 점유와 만주 지역의 이권 등을 놓고 소련에 유리한 조약을 장개석 정부와 맺어놓고 있기 때문이었다. 스탈린의 소련이 자기네 이익을 위해 타국 공산주의자 운동을 희생시킨 사례는 수없이 많다. '티토이즘'을 흔히 '민족공산주의'라 하는 것은 스탈린주의와 대비되는 뜻이다.
스탈린이 방어적 입장을 취한 큰 이유가 원자폭탄의 존재에 있었다는 사실은 <프레시안>에 연재 중인 정욱식의 '핵과 인간'에 잘 설명되어 있다. 2012년 1월 25일자 "트루먼의 원폭 투하는 스탈린을 겨냥한 '무력 시위'였다"를 비롯해 핵무기의 존재가 한국 현대사에 빚어낸 여러 가지 굴곡이 연재의 여러 대목에 그려져 있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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