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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를 군대라 부르지 못하고…

[해방일기] 1947년 3월 7일

1947년 3월 7일

1947년 2월 이북에서 정권 기관인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출범했다. '정권 기관'이란 인민을 대표하는 정치적 주권을 가진 기관이다. 가장 대표적인 정권 기관은 물론 국가 정부지만, 그보다 제한된 범위의 주권을 가진 정권 기관도 있다. 지방자치단체도 정권 기관이다.

이 시점 정권 기관 수립의 역사적 평가에는 두 개의 엇갈리는 기준이 있다. 주민 자치라는 정치적 발전을 기준으로 보면 정권 기관 강화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통일 국가 수립이라는 더 큰 목적에는 남북 별개의 정권 기관 수립이 장애 요인이 될 수 있다. 하나의 변화에도 바람직한 면과 그렇지 못한 면이 엇갈려 있었던 것이다.

이북의 정권 기관 수립은 이남보다 앞서 있었다. 이남에서는 미군 진주 이래 인민위원회를 통한 자치 노력이 억압되고 식민 통치 체제가 유지되다가 1946년 10월 하순에야 입법의원 선거가 있었지만 선거의 기본 원칙도 지켜지지 못한 엉터리 선거였다. 직접 선거, 비밀 선거의 원칙은 물론, 보통 선거의 근거인 선거인 명부도 제대로 작성되지 못했다.

반면 이북에서는 소련군 진주 이후에도 인민위원회체제가 계속 발전해서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출범 때는 전 지역 주민의 실질적 대표성을 어느 정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바로 다음 달 토지 개혁 같은 거대한 사업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주민 대표성을 완전히 하기 위한 총선거가 1946년 11월 실시되어 '임시'를 뗀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수립되기에 이르렀다.

이북에서 정치 발전은 민생에도, 독립 여건의 향상에도 상당한 도움이 된 것으로 보인다. 점령군과 인민 사이의 의심과 반목이 이남처럼 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치안의 비용도 적게 들었고, 경제 발전을 위해 인적-물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동원할 수 있었다. 식량 등 소련의 지원이 이남의 미국 지원보다 적었지만 민생고가 이남처럼 심하지 않았다. 따라서 체제 구축에 대한 저항도 이남의 소요 사태에 비해 피상적인 수준에 그쳤다.

이북 내부만 들여다보면 정치 발전의 좋은 효과가 많이 보이지만, 조선 전체를 놓고 보면 구조적 문제를 악화시킨 면이 있다. 무엇보다, 1946년 3월의 토지 개혁을 계기로 격화된 인구 이동이 이남의 사회 경제적 문제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해방 후 해외로부터의 귀국 동포 200만 명의 대부분이 이남 지역에 집중된 위에 이북 주민 수십만 명이 월남하여 이남 지역의 경제와 질서에 큰 부담을 주었다. 해방 후 1년 반 동안 이북 인구는 별로 늘어나지 않은 반면 이남 인구는 10퍼센트 이상 증가했다. 일본 제국 체제의 붕괴로 산업이 파괴된 상황에서 엄청난 부담이었다.

이남의 정치 구조에도 이북의 변화가 여러 방향에서 영향을 끼쳤다. 남하한 이북 지역 반공 세력이 이남 극우 세력의 중요한 인적 자원이 되었다. 그 중에는 민족 국가 건설에서 어차피 배제될 친일파 출신도 얼마간 있었겠지만, 건국 대열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양심적 민족주의자나 기독교인들이 급격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고향을 잃음으로써 이남 극우 세력의 포섭 대상이 되는 상황이었다.

이북의 변화는 특히 이남 좌익의 발전 방향에 심각한 제약을 가했다. 해방된 조선에 안정된 국가 체제가 자리 잡기 위해서는 농지 소유의 평준화와 기간 산업의 국유화 등 상당 수준의 좌익 정책 노선이 필요했고, 민심도 그 필요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북 좌익 세력이 체제를 장악하면서 유리한 위치를 구축함에 따라 이남의 공산주의자-사회주의자들은 의존적인 위치에 빠지고 말았다. 그에 따라 이남 좌익은 민심의 지지보다 이북 지도자들의 지지에 더 매달리게 되었고, 그에 따라 교조주의 경향의 박헌영 일파가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이북의 변화가 이남 정세를 악화시킨 문제가 여러 가지 있지만, 그것을 악의적인 것으로 꼭 해석할 일은 아니다. 대개의 문제는 변화 수준의 격차에 기인한 것이고, 그것은 이북이 너무 앞서간 것보다 이남이 너무 뒤처진 데 더 큰 책임이 있다고 볼 일이다.

1946년 초 여운형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일성에게 토지 개혁을 좀 늦춰서 남북에서 함께 시행되기 바란다는 뜻을 밝힌 데는 변화의 격차를 피하고 싶은 뜻이 있었을 것이다. 이북 측이 이 부탁을 들어주지 않은 것을 탓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후 이남에서 토지 개혁 논의의 전개를 보면 진도를 굳이 맞추려고 했을 경우 얼마나 지체되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일 아닌가.

변화의 격차 문제에는 '민주 기지 노선' 개념에 따라 판단 기준이 크게 좌우될 수 있다. 이북의 민주 기지화를 토대로 이남까지 혁명을 확산시킨다는 노선이 채택되어 있었다면 혁명 확산의 여건을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이남의 발전을 가로막고 혼란을 부추기는 방향으로 정책을 선택하고 결정할 여지가 있다. 그렇다면 한반도의 전반적 정세 악화에 이북 지도자들의 책임을 크게 봐야 할 것이다.

민주 기지 노선에 대한 확고한 입장은 1948년 3월 북로당 제2차 대회에서 김일성의 보고 중에 처음 나타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8·15 해방 직후 우리 당은 소련 군대가 진주하고 있는 유리한 조건을 이용하여 오직 북조선에서 민주주의적 근거지를 튼튼히 하여 전 조선 민족을 완전히 해방하여 조선을 부강한 민주주의 국가로 만들 기지를 닦아 놓아야 되리라는 것을 명백히 인식하였습니다. 북조선에 민주주의적 근거지를 튼튼히 닦으려면 오직 우리 당이 더욱 튼튼하고 강력한 대중적 정당으로 발전하여 광대한 인민대중을 우리 당 주위에 결속-단결하여야만 될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당은 북조선 각지에 산만하고 조직 체계가 서지 않은 각도 지방당들을 결속하여 북조선의 모든 유리한 조건과 환경들을 이용하여 적당한 정치적 임무들을 수행할 수 있는 유력한 중앙 조직 기관이 북조선에 필요함을 인정하고 1945년 10월 중순에 조선공산당 북조선 중앙국을 결성하게 되었습니다. (김남식, "해방 전후 북한 현대사의 재인식", <해방 전후사의 인식 5>, 15~16쪽에서 재인용)

김남식은 이 대목을 근거로 민주 기지 노선의 범위를 넓게 파악한다.

따라서 해방 후 민주 기지 노선이라는 용어가 정식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조선공산당 분국이 설립되면서 민주 개혁들을 착수해나간 것 자체가 이미 북한 지역을 혁명화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이다. 민주 기지 노선이 해방 직후가 아니라 그 후 정세발전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채택되었다는 설은 잘못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김남식, "해방 전후 북한 현대사의 재인식", <해방 전후사의 인식 5>, 16쪽)

나는 이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다. 민주 기지 노선이 공식적으로 채택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그와 비슷한 정책 요소가 개별적 부분적으로 선택될 여지는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예컨대 토지 개혁을 늦추느냐 마냐 하는 문제를 놓고, 민주 기지 노선과 관계없이 인민의 복리만을 위해서도 서두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당 중앙이 38선 너머에 있는 상황에서 공산당의 이북 도당을 통합하는 조직이 꼭 민주 기지 노선에 의해서만 필요한 것도 아니다.

시간이 갈수록 이남의 동반 개혁 가능성이 흐려짐에 따라 이남과의 격차에 대한 의식이 점점 옅어지다가 어느 단계에서 격차를 기정사실화해 버린 것이 민주 기지 노선의 채택이란 결과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남식이 잘못된 것으로 보는, "해방 직후가 아니라 그 후 정세발전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채택되었다는 설"이 내게는 타당해 보인다.

김일성이나 이북 지도자 중 누군가가 일찍부터 민주 기지 노선을 마음에 품고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1947년 말까지 이 노선에 철저하기 위해 다른 기준으로는 불리한 정책을 굳이 선택해야 된다는 주장은 없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이 노선이 채택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분단 건국 의지의 가장 명확한 지표는 군대다. 인민위원회건 입법의원이건 분단건국의 의지 없이도 현실의 필요에 따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군대라는 것은 국가 주권 행사의 의지 없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미국도 소련도 점령 지역에서 군대를 만드는 일에 대해서는 극히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다.

워싱턴에 소환된 하지 사령관이 기자들에게 이북에 군대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2월 24일에 기자들에게 했다는 보도가 [워싱턴 25일 UP발 조선]의 바이라인으로 들어와 여러 신문에 실렸는데, 인용된 하지의 발언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소련 측에서는 17세부터 25세간의 조선인을 징모하여 상당한 세력의 군대를 편성하고 있다. 조선 내 소련 점령 지대 내에는 여차한 연령의 조선인이 약 50만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余로서는 조선 내에서 어떠한 세력의 군대라도 징모할 이유가 나변에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군대는 아마도 일본인에게서 취득한 장비로 무장되고 있을 것이다. 소련 지대 내의 조선인 부대 편성에 있어서 중국공산당 팔로군 병원이 중핵체로 사용되고 있다." (<동아일보> 1947년 2월 26~7일자)

[워싱턴 25일발 AP합동]의 바이라인으로 들어온 기사에는 이승만의 발언이 인용되었다.

"현재 북조선의 소련군은 50만 명의 조선인 군대를 훈련하여 소련군에 편입시키고자 하고 있는데 여사한 결과로 말미암아 미군 점령 하에 있는 남조선의 국가주의자들은 취약한 입장에 있다. 또 북조선인들은 강제 군사 훈련을 거부하기 위하여 남조선으로 도피하고 있는 중이다. 한편 모스크바 협정에 의하여 남조선의 미군은 여사한 훈련을 남조선에서 실시치 않고 있으므로 남조선은 북조선의 공산주의자에게 좌우될 상태에 있다. 그리고 여사한 북조선 소련군의 행동은 이미 남조선에서 모두 알려지고 있는 사실인데 하여간 맥아더사령관도 이에 대하여 약간의 관심을 가지리라고 믿는다." (<자유신문> 1947년 2월 26일자)

하지 발언이 참 이상하다. "50만"이란 숫자가 그 발언 속에서 무슨 의미를 가진 것인가? 17~25세, 즉 징모될 수 있는 연령대의 조선인이 이북에 50만 있다는 거다. 징모된 숫자는 밝히지 않았다.

그런데 더 이상한 건 이승만이다. 하지의 위 발언 외에는 아무 근거가 보이지 않는데, 50만 군대가 그냥 생겨나버렸다. 마타도어의 달인이란 이런 것인가?

위의 두 발언은 이북에서 군대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만 구체적 사실은 아무것도 내놓은 것이 없다. 이북에서 소련군이 나쁜 짓을 할 수 있으니 이남의 미군정만이 아니라 맥아더 사령부와 미국 정부가 강경한 군사 정책을 펴기 바란다는 두 사람의 희망을 보여줄 뿐이다.

실제로 이북에서 인민군의 정식 출범은 1948년 2월에 이뤄진다. 물론 그 전에 어느 정도 준비가 있기는 했다.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중앙일보사 펴냄) 68~78쪽에는 이 준비가 일찍부터 치밀하게 이뤄진 것처럼 몇 사람의 증언을 묶여서 나온다. 그런데 1946년 2월 임시인민위원회 직속으로 만들어진 '보안대대 본부'를 인민군의 모태처럼 설명한 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

인민군 작전국장을 지낸 유성철의 회고로 "미군정이 남조선에 아직 군대를 조직하기 전이어서 국제적인 여론을 의식해 보안대 대본부를 경찰본부로 위장"했다는 말이 나온다. 그것이 "위장"이었다면 보안대 대본부가 경찰의 성격이 아니었다는 말인가?

이남에서는 식민지 경찰을 발판으로 국가 경찰을 만들었다. 1946년 말 시점에서 경찰 외의 군정청 관리는 중앙과 지방을 합해 1만 명이 안 되었는데 경찰관 수는 2만5000명에 달했다. 미군정에서 가장 비용이 많이 드는 분야였다.

그런데 이북에는 이런 국가 경찰이 없었다. 식민지 경찰이 쫓겨난 후 지방의 치안은 자율적으로 이뤄졌다. 경찰 비용이 거의 들지 않은 것이다. 자율 치안 조직은 자위대, 치안대, 적위대 등 여러 가지 이름을 달고 있었는데 소련군 진주 후 '보안대'로 이름을 통일했다. 자율 행정 조직의 이름을 '인민위원회'로 통일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인민위원회가 1946년 2월 이북 전 지역을 포괄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로 조직되면서 각지의 보안대를 총괄하는 부서로 보안대 대본부를 만든 것이었다. 보안대 대본부가 군대였다면 이남의 경찰도 군대였다.

경찰 성격으로 위장한 군대 조직은 이남에서 행한 일이었다. 1946년 1월에서 2월 사이에 국방경비대와 해안경비대가 조직되었는데, 경찰력으로 치안 유지에 한계가 있어서 그를 보완한다는 것이었다. 6월에 군정청 법령 86호로 법제화되었는데, 명칭은 '조선경비대'와 '조선해안경비대'로 정해졌다. 그 주축을 이룬 것이 일본군, 만주군, 광복군 장교 출신이었으니 군대로서의 그 성격은 명확한 것이었다. 조선경비대 사령부에서 근무한 하우스만의 회고를 담은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짐 하우스만, 정일화 공저, 한국문원 펴냄)에 그 성격이 여실히 나타나 있다.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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