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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의 선거와 북쪽의 선거, 어떻게 달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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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의 선거와 북쪽의 선거, 어떻게 달랐나?

[해방일기] 1947년 3월 2일

1947년 3월 2일

조선 최초의 근대적 총선거는 이북 지역에서 1946년 11월 3일, 1947년 2월 24~25일, 3월 5일의 세 차례 투표로 이뤄졌다. 11월 투표는 대지역인 도와 중지역인 시·군 인민위원을 뽑는 것이었고, 2월과 3월 투표는 소지역인 리·동·면 인민위원을 뽑는 것이었다. 소지역 투표에는 많은 준비와 동원이 필요했기 때문에 늦어진 것이고, 도시 지역과 농촌 지역을 갈라서 투표를 시행한 것이었다.

"권력이 인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제1원리다. 이 권력 창출의 과정이 선거다. 민주주의 권력의 정당성을 보장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 하자 없는 선거에 있는 것이다.

11월 3일 선출된 이북 지역의 도·시·군 인민위원 3459명 중 1171명이 대의원으로 뽑혀 이듬해 2월 17~20일 평양에서 열린 인민위원회 대회에 참석했다(13명 불출석, 1158명 출석). 이 대회 마지막 날 인민회의 대의원 237명을 선출했고, 이튿날 열린 북조선인민회의에서는 인민회의 상임위원회를 구성하는 한편 북조선인민위원회 규정을 채택하고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그래서 1947년 2월 22일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출범했다. 1년간 달고 있던 '임시'를 벗어던진 것은 선거가 보장해준 정당성 덕분이었다.

1947년 2월 탄생한 북조선인민위원회는 조선 최초의 근대적 민주 정권을 자임했다. 이남에서는 이북보다 조금 앞서 첫 총선거를 시행하고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을 구성했지만, 선거도 선거다운 선거가 못되었고 입법의원도 '정권'의 위상과 거리가 멀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이미 얘기한 것도 있고 앞으로 얘기할 것도 있는데, 여기서는 길게 얘기하지 않겠다.

북한에서 북조선인민위원회 수립이 역사적인 쾌거로 찬양받아 온 반면 남한의 교육에서는 아주 나쁜 짓으로 비난받아 왔다. 비난의 중요한 논점은 둘이다. 하나는 선거가 엉터리였다는 점. 또 하나는 통일 국가 수립을 외면한 분단 국가 건설의 길이었다는 점.

선거가 엉터리였다는 주장부터 살펴본다. '흑백함 투표'가 대표적인 비난이다. 마치 비밀 투표의 원칙이 보장되지 않은 것처럼 우리는 초등학교 때부터 배워왔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우리 투표에서는 기표소가 밀폐되어 있고 투표함은 공개된 장소에 있다. 이북의 흑백함 투표에서는 투표함이 밀폐된 곳에 있다. 흑백함 자체는 비밀 투표의 원칙에 저촉되는 것이 아니다.

문제가 있다면 투표 이전의 과정에 있다. 흑백함 투표에는 후보자 수가 많을 때 운용이 힘들어지는 문제가 있다. (투표자는 후보 한 명 한 명에 대해 따로따로 찬반을 표해야 했다.) 그래서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북민전)에서 단일 후보를 추천했는데, 3459명의 인민의원 자리 중 몇 십 개는 조정이 안 되어 복수 후보를 놓고 투표했다.

그래서 북민전의 조정 작업에 민의의 선택을 제한하는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권력 측에서 입맛에 맞는 후보를 정해놓고 그에 대한 지지를 강요함으로써 투표를 요식 행위로 만든 게 아니냐 하는 문제다.

1948년 이후 노동당 독재가 확립된 이후의 상황에서는 그런 문제가 나타났을 여지가 있다. 그러나 1946년 11월에는 그런 문제가 없었다. 그 시점에서 김일성 중심의 북로당에게는 정파 간의 경쟁보다 민심의 수렴이 더 크고 절박한 과제였다.

<해방 전후사의 인식 5>에 실린 김용복의 "해방 직후 북한 인민위원회의 조직과 활동" 231쪽의 표13 "당선된 도-시-군 인민위원회 위원들의 정당별 분포"에는 무소속이 50.1퍼센트, 노동당이 31.8퍼센트, 그리고 (조선)민주당과 청우당이 그 나머지를 점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다음 쪽에서 김용복은 이렇게 설명했다.

정당별 분포를 보면 무소속이 과반수인 것이 특징이다. 이는 1946년 9월 13일 민전 제5차 중앙위원회에서 노동당 부위원장 주영하가 제시한 "후보자 수를 자기 당원 수와 사회적 활동의 중량에 비례하여 결정"하고 "반수 이상은 정당 이외에서 선출한다"는 원칙이 관철된 것이다.

민전의 후보 조정 과정에서 주도권을 가진 북로당이 자기 당 몫에 집착하지 않은 것이다. 북로당뿐 아니라 어느 정당으로도 충분히 수렴되지 않은 민심의 존재를 인식하고 정치권 밖의 인물을 인민위원회에 대거 끌어들이도록 노력한 것이다.

어느 정치 조직이든 자리와 감투의 수요는 공급보다 크기 마련인데 당시의 북로당원 중에도 인민위원 자리를 바란 사람은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북로당 지도부가 북로당의 몫을 최대한 키우려 하지 않은 것은 인민위원회의 건강한 성격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고 이해된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국회의 건강한 성격을 확보하려면 정당들이 이 시점 북로당의 선거 전략을 배울 필요가 있다.

안나 루이스 스트롱의 기행문 "북한, 1947년 여름" 중 선거에 관한 부분(<해방 전후사의 인식 5> 510~513쪽)에는 후보 조정 과정과 투표 방법에 북한 주민들이 만족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1946년 11월 16일자 일기). 스트롱의 이북 지역 방문이 선거 여러 달 후였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자랑스럽게 내놓을 만한 모습이 어떤 방식으로든 편집되어 나타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선거를 기획하고 설계한 목적이 바로 그런 만족을 이끌어내는 데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인민위원회 선거는 1946년 8월 말 북로당이 결성된 직후부터 계획과 준비가 시작된 것이었다.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2>(중앙일보사 펴냄) 256~257쪽에는 이 과정에 관한 서용규(가명)의 증언이 소개되어 있다.

"북로당이 창립된 직후인 9월 초 당 정치위원회와 조직위원회에서는 1차적으로 인민위원회 선거를 계획하게 됩니다. 정치위원회와 조직위원회가 구성된 뒤 첫 회의의 의제가 당 창립대회의 총화(결산) 및 인민위원회 선거 실시 문제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곧이어 9월 5일에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제2차 확대위원회가 열렸어요. 이 자리에서도 역시 북조선 도-시-군-면-리 인민위원회의 구성과 선거 실시에 관한 토론이 벌어졌고 결정서가 채택됐습니다. 9월 10일 쯤에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에서 행정 기관적 성격을 갖는 선거지도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한편 이 무렵 별도로 선거선전위원회가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선거선전위원회는 선거와 관련된 토론회-강연 등 선전 활동만 전담했어요."


선거선전위원회에 관해서는 이 책에도 더 직접적인 설명이 없고 다른 자료에서도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서술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이 선거를 둘러싼 '선전 활동'이 활발했던 사실은 스트롱의 기행문을 비롯해서 많은 자료에서 알아볼 수 있다. 이 선전 활동에 우리 통념으로 받아들이는 것보다 큰 의미가 있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고, 따라서 선거 계획과 준비의 첫 단계에서 선거선전위원회가 만들어진 사실이 중요한 것으로 생각된다.

'선전 활동'이라 하면 특정한 정치 노선이나 정책 노선을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 우리는 보통 생각한다. 그런데 공산주의 운동에서 '선전'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계몽'의 의미를 많이 띠는 것이다. '민주주의'라 할 때 우리는 형식적 의미에 익숙해져 있는데, 해방 당시 좌익이 내세운 민주주의는 실질적 평등에 더 중점을 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선거'에 대해서도 이남의 미군정이 요식적 조건에 얽매인 반면 좌익에서는 현실적 조건을 더 중시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흑백함 투표' 같은 것도 당시의 문맹률이나 민도를 생각하면 상당한 현실적 장점을 가진 것이었다.

1946년 10월 하순 이남의 입법의원 선거에 비해 그 며칠 후의 이북 인민위원회 선거는 많은 준비와 노력을 들인 것이었다.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2> 258쪽에는 "각급 단위의 인민위원들을 선출하기에 앞서 후보자를 내세운 뒤 군중 토론을 붙여 정치 학습장을 방불케 했다"는 서용규의 증언이 인용되어 있다. 선거 과정이 곧 인민에 대한 정치 교양 사업이었던 것이다. 문맹 퇴치 노력도 포함된 것을 생각하면 문화 교양 사업도 겸하는 것이었다.

이런 선거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이북의 인민위원회 체제는 어떤 성격을 가진 것이었는가. 김주환의 "해방 후 북한의 인민 민주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에 이렇게 요약되어 있다. (<해방 전후사의 인식> 311쪽)

이와 같이 구성된 인민위원회의 체계와 기능을 살펴보면, 도-시-군 인민위원회는 해당 지역의 주권 및 행정 기관으로서 주권적 기능과 행정적 기능이 통합된 정권 기관이었다. (이 점은 자유 민주주의 체제에서 3권 분립에 의해 해당 지역의 주권을 대표하는 입법 기관과 집행 기능을 수행하는 행정 기관이 분리되는 것과 대조적이다.) 한편 도 인민위원회는 중앙 정권기관인 최고인민회의에, 시-군 인민위원회는 도 인민위원회에 복종하며 도-시-군 인민위원회는 최고인민회의의 통일적 지도 밑에 움직이는 정권 기관이었다.

북조선인민위원회는 소련과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볼 때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와는 달랐다. 앞에서 지적한 바와 마찬가지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데 있어서 소련군 사령부의 지도를 받거나 승인을 얻어야 했다. 그러나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성립을 계기로 소련군 사령부에 의한 인민 정권에 대한 지도와 감독은 사라졌고 행정권은 북한 사람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이러한 변화는 "북조선인민위원회에 관한 규정"에도 반영되어 나타났다. 이 규정의 제1조는 (…) 사실상 소련군 사령부의 인민 정권에 대한 간섭을 소멸시켰다.

반공 교육에 너무 찌든 탓인지 몰라도 소련군의 간섭이 완전히 사라졌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직접적 간섭이 간접적인 것으로 바뀌고 간섭이 전체적으로 줄어든 것은 분명하다. 당시 이남 입법의원의 위상과는 천양지차가 있었다. 미군정은 스스로를 남조선의 유일한 정부로 자임하고 있었고, 입법의원에게는 '보좌'의 역할만을 인정하고 있었다. 입법의원 의장 김규식이 표현이라도 '보좌' 대신 '협조'로 쓰자고 간청했지만 그나마 받아들이지 않았다. (1946년 1월 4일자 일기)

진주 지역에서 최종적 결정권을 가진 것은 이남의 미군이나 이북의 소련군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 권한을 행사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계속 커져 왔다. 소련군은 권한의 직접 행사를 최대한 줄이면서 조선인의 자율적 활동 범위를 넓혀준 반면 미군의 '조선인화'는 피상적 수준을 넘지 못한 결과다. 1947년 2월에 출범한 북조선인민위원회는 실질적으로 '과도 임시 정부'의 조건을 갖춘 정권 기관이었다.

그렇다면 북조선인민위원회 추진은 분단 정부 수립의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을까? 이남에서 한민당과 이승만 세력은 분단 건국의 의도 때문에 당시에도 비판의 표적이 되었고 지금은 당시보다도 더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그 이래 한국인이 겪어온 불행과 고통에 대해 가장 책임이 큰 집단이라고 나도 생각한다. 이북의 단독 정권 수립에도 이남의 분단 건국 추진과 같은 죄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 문제를 놓고는 긴 얘기가 필요하다. 따로 날 잡아서 한 번 들여다보겠다. 여기서는 실마리만 남겨둔다. '국가'와 '정권'을 구분해서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정권 수립은 어떤 상황에서나 필요한 것이었다. 다만 정권 수립이 민족 국가 건설에 장애 요인이 될 가능성이 문제다. 정권 수립 자체를 놓고 분단 건국의 의도를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고, 그 정권 수립의 내용이 민족 국가를 바라보는 것이냐 분단 건국을 바라보는 것이냐를 따져야 할 것이다.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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