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1946년)에 이어 해방 후 두 번째 3·1절 행사도 남산공원(좌익)과 서울운동장(우익)으로 갈라져 열렸다. 이 날 여러 곳에서 좌우익 군중과 경찰 사이에 충돌이 있었다.
1일 오후 4시 3분전 시위 행렬을 지어 남대문에 이른 전국학생연맹과 남산에서 식을 마치고 내려오던 3·1측과의 돌팔매가 시작되자 경관 측에서는 이에 발포하여 다수의 사상자를 내었는데 현재까지 판명된 사상자는 다음과 같다.
조선중학 1년생 정인수(16) 두부관통 즉사 서울중학 4년생 장영환(18) 두부경상 여학생 1명 중상 여학생 1명 경상 (<조선일보>, <서울신문> 3월 2일, 3일자)
지난 1일 서울에서는 운동장에서 남산에서 각각 성대한 행사가 거행되어 29년 전의 자주 독립을 전취하자던 피의 전통을 계승하는 자유민의 고함은 천지를 뒤흔들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일부 흥분된 군중은 경향 각지에서 지나친 행동이 있어 그 이유 여하는 어쨌든 남조선 각지에서 사망자 16명 부상자 22명 도합 38명의 존귀한 희생자를 내고 말았다. 이 흥분된 사태는 곧 진정되어 2일 이후는 평온한데 1일 서울시내와 다른 지방의 충돌 상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제6관구(전북) 지난 11월경부터 경찰서를 습격하려던 일부 혐의자를 취조중인데 1일 하오 2시경 당지 북면 채종규는 군중 200여 명을 동원하여 정읍 군하의 경찰서를 습격하려다 사망 1명 부상 1명을 내었다.
제7관구 부산에서는 민전 주최 3·1 기념식상에서 당지 해원동맹원이 축사를 하는데 이 박사에 대한 욕설을 한 데서 광청단원 3명과 충돌되었는데 제지하는 경관에게 투석하므로 발포한 바 사망 5명과 부상자 6명을 내었다.
제8관구 영암, 순천군에서 신북 금정의 주민 5000여 명이 1일 상오 11시경 경찰을 습격하려다 사망 2명 부상자 5명을 내었다.
제주도 1일 하오 2시반경 3만여 군중은 남산국민학교에 모여 감찰청과 경찰서를 포위 습격하려고 하였으며 하오 4시경에는 청장 사택을 습격하려고 하여 사망 6명 부상자 8명을 내었다. (<동아일보> 1947년 3월 4일자)
3월 3일 경무부장 조병옥의 담화문 가운데 제주 사태에 관해 이런 언급이 있었다.
2월 28일 집회만 허가하고 행렬은 허가치 않았던 바 행렬까지 허가하라고 함에 부득이 집회까지 허가 취소하였는데 1일 시민이 남산국민학교에 모였으므로 집회만 허가하였다. 그리고 이내 오후 2시 50분경 경찰서 감찰서 등을 습격하였으므로 발포하였는데 사망 6명 부상 8명을 내었다. 이 제주도에는 사전에 충북, 충남서 각각 50명씩을 파견했는데 3일 전남서 50명을 또 파견했다. (<경향신문>, <조선일보> 1947년 3월 4일자)
이 사태는 1년 후 4·3 사건의 발발에도 중요한 배경이 된다. 몇 달 전 입법의원 선거에서도 좌익으로 분류될 만한 대의원을 유일하게 뽑은 곳이 제주도였다. 인민위원회 소속을 표방한 두 후보는 입법의원 참여를 거부했다. 이남 지역에 미군정을 배경으로 우익이 득세하는 분위기가 제주도에는 자리 잡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병옥의 담화에서 제주도에 외지 경찰 150명이 파견된 사실이 주의를 끈다. 조병옥은 경찰과 지역 주민 사이의 유대를 부정하는 '국립경찰'을 주장하며 경찰관들에게 임명권자에게의 충성만을 요구한 사람이다. 그러나 경찰도 사람인 이상 자기 고향 지역에서 근무하면서는 주민들과의 유대감을 어떤 식으로든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제주도에는 '치안 유지'를 위해 외지 경찰이 투입되었다. 4·3 봉기 진압에 서북청년회 등 외지 세력 투입이 어떤 문제를 일으켰는지는 많이 알려져 있거니와, 제주민들이 외지인의 폭압에 시달리는 상황은 벌써 시작되어 있었던 것이다.
외지인에 대한 제주민의 반감은 3월 9일의 공무원 총파업 단행에서 알아볼 수 있다. 도청, 재판소, 학교 등 모든 관공서와 공공 기관이 참여한 이 파업은 발포 경관의 처벌과 경찰 책임자의 인책을 요구한 것이었다. 이 파업 소식을 전한 3월 13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제주에 투입된 외지 경찰은 300명이었고, 조병옥이 사태 수습을 위해 12일에 제주로 건너갔다. 19일에 서울로 돌아온 조병옥은 제주도 사태의 '진상'을 이렇게 발표했다.
금반 제주도 불상 사건에 대한 나의 관찰을 피력하여 동포 제위의 참고에 공(供)하려 한다. 이 사건은 남조선에 있는 몇 개의 정치·사회단체들의 정치 이념을 공통히하는 북조선의 세력과 통모 휴수하여 미군정을 전복하여 사회적 혼란을 유치하여 자기 세력을 부식하려는 전체적 운동의 부분적 현상으로 당도에 노출한 것이다. 3·1절을 기하여 이런 폭동을 일으킬 우려는 2월 초순 이래의 정보에 의하여 확인되었었다. 그러므로 경무당국은 2월 하순 기선을 제하여 응원대를 파견한 일도 있다.
(…) 경찰 당국의 충고 명령에 복종하는 태세를 가장하고 동 관내 제1구(북제주) 경찰서로 그 여세를 집중하여 노도와 같이 근거리에 쇄도하였었다. 동서의 경찰 당국은 인내와 엄중을 아울러 충고와 경고를 하였으나 군중은 그 해산을 불긍하므로 작년 10월 폭동의 쓰라린 경험을 참고로 하여 부득이 발포하였던 것이다. 선동자 지도자들은 후열에 서고 순진한 양민 동포들은 전열에 배치된 까닭으로 6명의 순진한 동포들의 귀중한 생명의 희생을 본 것이다.
그리고 도립병원 전의 발포 사건에 대해서는 세론이 구구하므로 그 진상을 규명키 위하여 조사위원회를 구성했던 바 당시의 발포는 무사려의 행동으로 판정하였으므로 경찰 당국은 동 책임자의 파면을 명령하였다.
3·1절의 비극적 불상사를 야기한 책임에 대하여 둔감인 악도배들은 경찰의 발포를 중심으로 하여 온갖 모략적 선전을 배가하여 관공서를 위시 교육 산업 교통 각 기관의 총파업을 단행 일상생활을 마비시킴으로써 30만 제주도민의 생활을 위협케 하였다. (<동아일보> 1947년 3월 21일자)
그 밑에 붙은 기사에는 이문규라는 이름의 순경 하나가 도립병원 앞 발포 책임으로 '행정 처분'을 받는다고 보도되었다. '폭도'는 약 150명이 검거되었다고 한다.
3·1절 충돌 중 여파가 가장 큰 것이 제주 사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관심을 더 끈 것은 서울 시내의 발포 사태였다. 서울운동장에서 행사를 마친 우익 군중이 남산 턱밑에 있는 남대문까지 행진해 와서 남산 행사를 마치고 내려오는 좌익 군중과 충돌했으니 도발 책임이 우익 쪽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경찰은 이틀 후 우익 행사 책임자 5명을 무허가 시위 죄로 연행했다가 위원장 엄항섭 한 사람을 구금했다. 그 시점에서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경사스러운 3·1절 기념식 끝에 혼란이 일어나 극소수나마 사망자가 났다는 것은 크게 유감이다. 시가 시위 행진은 일체 않겠다고 서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강행한 데 대하여는 그 주최자 측의 책임자가 당연히 처벌될 것이며 경찰로서 시위 행진을 강압적으로 제지하려면 얼마든지 될 수 있는 일이지마는 강압적 수단을 취하지 말라는 상부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에 단호 중지를 못 시킨 것이다. 그리고 시위 행진이 서대문에 이르렀을 때 거기에서 기어이 해산을 못시키고 경성역 편으로 가게 한 것은 일이 나고 보니 서대문서의 실수라고도 볼 수 있다." (<서울신문> 1947년 3월 3일자)
같은 날 장택상과 기자단 사이의 문답은 이렇게 보도되었다.
"집회 시위 행렬의 권한 전부 서울시청 측에 있다."
(문) 무허가 시위를 제지 못한 이유가 뭔가?
(답) 허가 권한이 시청에 있는 한 무허가 행렬도 시청의 요구 없이는 경찰에서 제지 못한다.
(문) 완장 차고 몽둥이를 들고 시위한 청년이 많은데?
(답) 몽둥이 가진 것은 불법이나 그것이 '데모'니 나의 권한 밖이다.
(문) 충돌 동기를 아는가?
(답) '데모' 측에서 먼저 가해를 하였고 남산 측은 평화한 태도였다.
(문) 도전한 편에서는 검거하지 않고 남산 측에서만 검거한 이유는?
(답) 도전 측이고 남산 측이고 할 것 없이 발포했다는 빌딩 속에서 나온 사람을 체포한 것이다.
(문) 앞서 전평 51인 검거는 윌슨 시 고문이 위촉한 일이 없다고 하는데?
(답) 나는 절대 거짓말 않는다.
(문) 경성운동장 집회 책임자는 체포하였나?
(답) 윌슨 중좌로부터 책임자 5명을 체포하라는 요구가 있었으나 체포 여부는 말할 수 없다. (<자유신문> 1947년 3월 4일자)
장택상이 얼마나 책임감 없고 뻔뻔한 사람인지 여실히 알아볼 수 있다. 우익 시위 행진이 충돌 현장으로 향하는 것을 막지 않은 것을 부하의 '실수'로 돌린다. 몽둥이를 든 시위 군중을 단속하지 않은 것은 서울시의 책임으로 돌린다. 그러면서 자기는 절대 거짓말 않는단다. '도둑적으로 완벽'한 인물은 그 시절에도 있었던 것이다.
3월 7일자 <자유신문>에는 이와 관련한 윌슨 서울시 고문과의 문답이 보도되었다.
"집회 행렬의 취체 권한 어디 있는지는 상식 문제-윌슨 미국인 시장 경찰 야유"
(문) 3·1 기념절에 발생된 불상사에 대하여 장 경찰청장은 취체 권한을 가진 귀하의 명령이 없었으므로 불법 행렬을 제지하지 못하였고 그 책임은 시청 측에 있다고 말하였는데?
(답) 지시가 없어도 경찰은 불법인 이상 취체하는 것이 상식이 아니냐.
(문) 지난 번 전평 간부 검속 사건을 비롯하여 귀하와 장 청장은 책임 전가만 하므로 일반 시민은 의아하게 생각하는데?
(답) 폭행의 취체는 반드시 나의 지시가 있어야 한다고 장 청장이 말하더라도 그 진위는 현명한 시민 여러분의 판단에 맡긴다.
답변 중 "발포했다는 빌딩"이란 남로당이 들어 있던 제2일화빌딩을 말하는 것이다. 경찰은 이 건물에서의 발포로 사상자가 나왔다고 주장하며 남로당에 책임을 뒤집어씌우려 했다. 이 주장이 너무나 허무맹랑한 것이어서 기자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3월 10일 장택상이 '진상 발표'를 내놓자 3월 13일자 <경향신문>은 이를 보도하면서 이런 글을 붙였다.
가장 성스럽게 맞이해야 할 국경일 3·1절에 피비린내 나는 민족 상쟁의 불상사를 연출한 것은 참으로 통탄하여 마지않을 유감사이므로 일반은 머지않아 밝혀질 사건 진상에 대하여 막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책임자를 규명하여 엄중 처단하여 주기를 당국에 간절히 요망하고 있었다.
이에 사건을 실지에 목격한 각 신문·통신 사기자 14명은 사건 조사에 참고가 될까 하여 사건 진상에 대한 조사서를 작성하여 지난 7일 수도관구경찰청장 장택상에게 제출하였던 바 10일 장 청장은 뜻밖에도 이 조사서에 대한 반증을 발표하는 동시에 다음과 같은 사건진상 개요를 때늦게 발표하였다.
그러나 장 청장 발표의 사건 진상 내용에는 모호한 점이 많을 뿐 아니라 사건 직후 장 청장이 언명한 바와도 모순되는 것이 있어 수도경찰청출입기자단에서는 장 씨 발표의 사건 진상을 발표하지 않고 일방 사건 진상에 대한 과학적 조사를 개시하였던 바 중대한 단서를 잡게 되어 2~3일 내로 사건 전모를 발표하기로 하는 동시에 한발 앞서 그동안 보류하여 두었던 장 씨 발표를 지상에 발표하기로 하였다.
수도경찰청장이 발표한 '사건 진상'을 믿을 수 없어서 기자단이 따로 조사를 행한 다음 사흘이 지나서야 "이 발표를 우리는 못 믿겠소!" 하는 설명을 붙여서 내놓다니, 경찰의 공신력이 문자 그대로 땅바닥에 뒹굴고 있다. 장택상이 말한 '진상'이란 일화빌딩에서 사격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며, 그 증거로 몇 사람의 증인과 "당시의 상황과 탄적을 조사한 결과 1인의 예외도 없이 전부 高所(고소)에서 下向(하향) 사격한 것으로 인정되는 점"을 들었다. 그래서 결론은 "좌익 측에서 무장대를 미리 요소요소에 배치하였다가 우익 측 행렬에서 도전한 것을 기화로 발사 살상한 것으로 인정되므로 혐의자 십수 명을 검거 면밀조사 중"이란 것이었다.
기자단의 조사 결과는 14일자와 15일자 <경향신문> <조선일보> 등에 게재되었다. 주요 내용은 경찰의 '고소(高所) 사격'설을 반박하는 것인데 "일보를 양보하여 고소 사격이라고 본다면 정 군은 구태여 피탄 각도 40여도를 그 사격 각도에 맞추려고 피탄 순간 그 사격 방향으로 땅재주를 한 번 넘었어야 할 것이라는 경우도 예상되니 매우 놀라운 일" 같은 대목에서 경찰에 대한 경멸감을 짙게 느낄 수 있다. 보고서는 이렇게 맺어져 있다.
이상 4조건은 본 사건 진상을 판단하는 데 있어 중요한 증거 자료로 인정되며 이에 관한 검토가 있은 후에 이번 진상 발표를 하였는지 혹은 방금 검토 중인지 아직 검토 이전인지 발표 내용만으로는 판단 곤란이다. 만약 검토 후라면 발표 내용에 이 4조건 중 어느 한 조건에도 언급한 바가 없었다는 것은 민주 경찰로서의 마땅치 못한 태도이니 모름지기 추후 발표가 있어야 할 것이요 방금 검토 중이라면 이번 진상 발표는 미완성품임을 면치 못할 것이다. 검토 이전이라면 수사태만은 이에 더할 바 없을 것이다. 아무튼 수도청 수사진의 권위를 위하여 모처럼 제공된 이상 4조건 자료에 대하여 신중히 대처할 여지가 있을 것이다.
끝으로 부언컨대 우리가 조사한 바 인적 증거와 물적 증거 일체는 수시로 수도청 측 제시 협력 요구에 응할 용의가 있다.
장택상은 그 날로 기자단에 위협적인 '통고'를 보냈다.
"남대문 3·1 사건에 대하여 경찰 측 발표에 이견을 가지고 안 가지는 것은 수모(誰某)를 물론하고 독자의 입장에서 의견 발표를 할 수 있지만 경찰청기자단이라는 명목 하에서 단체적으로 또는 횡적 종적으로 경찰 측 발표를 반박하는 의미로 성명서를 발표함은 용허할 수 없다. 이것은 마치 경찰청 내에 별개로 경찰이 존재하여 대립적 행동을 취하는 듯한 감을 줄 염려가 있다.
경찰청출입기자는 경찰이 발표한 자료의 채불채(採不採)는 경찰이 관심을 갖지 않지만 단체적으로 대립하자는 기세는 용인할 수 없다. 이러므로 본청출입기자 제위에게 희망하오니 이상 지적한 조건과 범위를 음미하시와 행동을 취하심을 기대하나이다." (<경향신문>, <조선일보> 1947년 3월 14일자)
이것으로 분이 안 풀렸는지, 이튿날에는 기자단의 청사 출입 금지 조치를 통고했다.
"작추(昨秋) 이래로 경찰청 출입 기자 중 기개인(幾個人)의 경찰에 대한 태도를 다소 찰지하였으나 경찰은 보도 기관에 대한 경의와 호의를 가졌으므로 이를 불문에 부치고 있었다. 이번 남대문사건 경찰청 발표에 대립적 발표가 경찰청기자단이라는 명의로 발표된다는 말을 듣고 본직은 3월 13일부로 출입 기자단에게 통고하였다. 개인 혹 신문사 자체 명의로 반대적 입장에서 조사 발표함은 당연 무방하나 본청 출입 기자단 명의로 경찰의 발표에 대하여 대립적 발표를 일청 사내에서 동시 발표함은 이는 너무도 경찰을 무시하고 마치 경찰청 내에 또한 경찰기구가 엄연히 존재한 느낌을 준다.
이와 같은 사건이 과거에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하나 경찰은 은인자중하고 금일까지 기다렸다. 이 기자단 중 기개 기자는 철두철미로 정치적 색안으로 경찰을 검토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단호히 경찰 운영상 용인할 수 없는 현상이므로 玆에 전 기자단에 대하여 본청 출입금족(出入禁足)함을 통고함. 지공무사(至公無私)하고 보도 정신만 가진 기자에게는 언제든지 본청 문호를 개방할 것을 약속한다." (<경향신문> 1947년 3월 15일자)
이 통고를 받은 기자단은 장택상이 개전할 때까지 수도경찰청 출입을 스스로 거부한다는 결의를 즉각 내리고 이튿날 장택상에게 자기네 통고문을 보냈다.
"경애하는 장 청장!
무릇 신문 기자의 본령은 민중의 뜻을 붓대에 탁(託)하여 그 운영 상황을 날카롭게 감시 비판하고 항상 건설적 견제를 게을리하지 않음으로써 그 출입처의 사회적 향상을 자극 편달함에 있습니다. 이 본령 발휘의 기력이 진했을 때 그 기자는 벌써 그 출입처의 허수아비요 민중의 배신자입니다. 우리가 남대문사건에 대해서 경찰 발표와는 별개로 독자적 입장에서 조사 발표한 것은 오로지 이 본령을 유감없이 발휘하려는 지공무사의 열정에서 우러나온 소치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직책과 진의에 대하여 장 청장은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바가 있었던들 이번 출입금족 통고문에 적은 바 출입 기자단 명의로 같은 청사 내에 대립적으로 발표함은 경찰을 무시하는 것이라는 둥 청 내에 또 한 경찰기구가 존재한 느낌을 준다는 둥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으나 은인자중 금일까지 기다렸다는 둥 마치 우리 조사 발표에 대하여 진지하게 한번 검토해보려는 공정보다 오히려 귀관의 체면 문제에만 사로잡힌 듯한 인상을 이렇게까지 여실하게 주었을 리는 만무할 것입니다.
그나마 출입 기자 중 몇몇 기자의 경찰에 대한 태도를 다소 찰지하였다는 둥 동 기자는 경찰을 정치적 색안으로 보는 경향이 있어 경찰 운영상 용인할 수 없다는 둥 지공무사의 보도 정신을 가진 기자에게는 문호를 개방한다는 둥 마치 고분고분하게 비위나 맞추는 기자만을 추리려 드는 듯한 옹졸한 포용과 위압을 탐하는 듯한 느낌을 줌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장 청장의 지공무사하다고 자처하는 경찰정신을 의심치 않을 수 없습니다.
이야말로 단지 우리의 지닌 바 본령을 아직 몰이해한 데서 나온 소아적 전천이요 우리 전원에 대한 모욕인 동시에 정당한 언론 자유에 대한 구속입니다. 이렇듯 머리가 낡은 장 청장과는 구태어 신성한 공석을 같이하고 싶지 않았던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었으나 우리는 오직 보도 책임상 은인자중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이번 처사에 이르러서는 우리는 보도의 중책과 자존심에 비추어서 청장의 대오달관(大悟達觀)밑에 통고를 취소 사과할 때까지 우리 스스로 수도청 기자실 문을 닫고 믿는 바 언론의 본도를 민중과 더불어 유유히 걸어 나갈 따름입니다." (<경향신문>, <조선일보> 1947년 3월 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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