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길지 않은 인용문은 보편적인 인류가 동물에게 갖는 태도를 극단적으로 압축해 보여준다. 이미 다양한 무생물로 입증된 중력과 낙하의 이론을 다시 증명해 보이려는 시도로 보이는 이 행위는, 첫째로 동물을 물건과 동일하게 사용하는 것이 허용될 수 있으며, 둘째로는 그 사용이 쥐의 고통과 비교 불가능한 다른 이익을 가져오지 않아도 정당하다는 생각을 담고 있다.
이 상황에서 쥐에게 척추의 고통이 있는 상황과 없는 상황 중 하나를 택하라면 쥐는 어떤 선택을 내릴까? 실제로 많은 심리학 실험에서 쥐를 동원하여 두 가지의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르게 하고, 이를 추인하여 마치 '답변'처럼 사용하고 있으니 무리한 질문은 아니다. 쥐는 아마, 고통이 없는 쪽을 택할 것이다. 우리 대부분이 그러하듯 말이다.
앞의 두 가지 원칙을 고수하거나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윤리적인 존재로 살아가는 데에 심각한 결함을 불러올 수 있다.
첫째, 척추동물을 비롯한 많은 동물종이 고통을 느끼는 생물학적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실제로 그 고통을 표현하기 때문에 이를 묵과하는 행위는 평등의 원칙을 위배하는 자기모순이다. 여기서 흔히 제기되는 이의는 인간과 동물이 평등하게 취급되어야 하냐는 것이다. 쥐에게 신혼여행을 가거나 식사에 식용 수레국화를 곁들이고 싶은 욕망이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지금 언급하고 있는 게 '모든 생물종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고통에서 자유로울 권리' 면에서의 평등이란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 제기되는 심각한 문제는, 인간 아닌 존재를 사용하는 것은 기대되는 확실한 이익이 없는 상황에서조차 비난 받을 만한 일이 아니라는 관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이 인간을 인간이게 하고 인간 아닌 동물들을 동물에 머물게 하는 것일까를 질문해야 한다. 지능이나 인격의 문제라면, 일부 동물들은 네다섯 살 아동과 비슷한 지능을 지니고 있으며 장례 문화를 가지고 이를 다음 세대에게 전달하기도 한다. 또 생물학적으로 인간인 어떤 사람들은 이런 동물들에 미치지 못하는 지능이나 인격을 가졌을 수 있다. 이 경우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인간의 우월함은 기각된다.
여기서 더 나아가, 우월함을 가리는 기준이 성립될 수 있다 친다손 우월한 쪽이 열등한 쪽의 자유를 속박할 권리가 있느냐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인간이 흑인 노예를 해방시키고 여성에게 가해지는 억압에 저항하며 이러한 이분법적인 사고에 계속 도전해 왔다면, 단지 종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손쉽게 동물을 권리를 가질 주체에서 밀어내는 일 역시 종 차별주의의 산물이라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 다음으로 사람들이 동물에게 그리고 동물을 둘러싼 복잡한 환경과의 상호 작용에 대해 취하는 태도는 스웨덴에서 사유지인 공장형 양계장에 침입해 닭을 구해오려는 아들에게 어머니가 한 말이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지 말아라! 닭장에 갇힌 닭을 구해주는 건 좋은 일이지만 남의 재산을 못 쓰게 만들면 안 된다."
비록 동물이 명백히 고통을 느끼는 존재이며 그 고통에 비해 현저한 이익을 가져오는 행위가 아니면 정당화될 수 없다고 동의하는 사람들일지라도 위에서 보여주는 애매한 입장을 취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동물에게 제한적이고 시혜적인 온정을 베푸는 것은 미덕이지만 인간의 이득을 저버리면서까지 실행해야 할 정도로 강력한 규범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식육으로 키워지고 있기 때문에 결국은 도살당해야 하는 동물의 복지를 고려하는 것부터 개나 고양이를 잘 돌보면서 번식시켜 팔고 거기서 금전적 이득을 취하는 소위 브리더의 사례에서까지 널리 관찰될 수 있다. 육지 생물의 고기를 먹기는 중단한 대신 해양 생물과 유제품을 먹으며, 정상적인 사회 활동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강변하는 나 자신도 여기에 포함된다.
그러나 정말로, 인간이 다른 생물의 고통이나 사멸에 앞세울 수 있는 이득이란 무엇인가? 유명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이창신 옮김, 김영사 펴냄)에서 든 예와 같이 사람과 유인원의 목숨을 똑같이 저울 위에 올려놓고 계량할 수 있는 경우가 많지는 않을 것이다. 완전 채식을 택하는 인구가 절대 다수를 차지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동물 학대를 유발하는 산업을 닫아버리면 결국 경제적 유인도 사라질 것이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주말에 삼겹살을 구우며 반주를 곁들이는 즐거움이 빼앗을 수 없는 인간의 권리라면, 목숨을 보전하고 그로 인해 제 살점을 내주고 싶지 않은 돼지의 권리 역시 우리가 생물에게 강제와 폭력을 행사하기에 앞서 숙고해야 하는 부분인 것이다.
우리는 타인이 될 수 없다. 버러스 프레더릭 스키너가 상술하였듯이 우리는 피부라는 감옥에 갇혀 있으며 남을 그 자신처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언어를 비롯한 소통의 도구들을 발명해냈다. 동물은 이 도구를 인간과 동등한 선상에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대단히 불리한 입장에 처해 있다. 동물권에 대해 논할 때 항상 가장 큰 장벽이 되는 것은, 동물과 인간이 같은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인간과 동일한 언어는 아닐지라도 일부 동물은 분명한 언어를 가지고 있다. 프레리독은 단순한 신호 체계가 아닌, 여러 가지 색의 이름과 각기 다른 포식자를 구분할 수 있는 명사를 지닌 언어를 송수신하며 이 언어에는 사투리도 존재한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다. 돌고래 역시 음향 언어를 지니고 있으며, 서로 처음 만난 경우 소통을 시도한다) 당사자성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실질적으로 동물에게 '물어보는' 방법이 제시되었다. 밀집 비육장과 운동장 중 머물고 싶은 쪽을 선택하게 하는 식이다. 앞서 설명했던 것처럼 우리가 이미 인간의 이익을 위해 이것을 동물의 대답으로 간주하고 있으니 동물에게 인간과 소통할 여지가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자가당착일 것이다.
한국에서도 동물에 대한 온정이나 공감에 대한 요구의 목소리들이 커져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까지는 다양한 동물들의 고통을 수집하여 폭로하는, 이른바 '호소하는' 전략을 주로 구사하고 있으며, 동물에게 이로운 세상은 곧 인간에게도 이로운 세상일 것이라는 결과론적이며 인본주의적인 개념에 기대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워낙 현실이 잔혹하고 가학적이므로 계속되는 고발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 <동물과 인간이 공존해야 하는 합당한 이유들>(피터 싱어 엮음, 노승영 옮김, 시대의창 펴냄). ⓒ시대의창 |
"동물 운동에 몸담은 사람들이 운동 방법을 정할 때는 무엇이 근사하거나 위안을 주느냐가 아니라 동물 권리를 획득하는 데 무엇이 가장 효과적인가를 기준으로 삼기 바란다. 업종 전체를 금지하는 법률은 그 밖의 어떠한 동물 운동보다도 막대한 경제적 타격을 동물 학대 산업에 가할 수 있다"며 비좁은 공장형 닭장의 산란계 사육을 철폐시킨 성공 사례를 보여주기도 하며, "사람들이 채식주의자가 되지 못하는 첫 번째 이유는 '불편하기 때문'이다. 육식을 중단하되 치즈나 아이스크림은 먹어도 된다고 융통성을 발휘하기보단 젖소가 어떤 고통에 시달리는지 아냐며 설교를 늘어놓는다. 이것은 사람들이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하게 하는 확실한 방법이다. (…) 육식하는 사람들이 가득 모인 자리에서 여러분이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있으면 사람들이 이유를 물을 것이다. 이때야말로 사람들에게 채식주의를 전파할 좋은 기회다. 쾌활하게 이야기하되 상황을 잘 판단하여 다른 사람들을 몰아붙이지 않도록 하라. 하지만 기본적인 논증은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틀림없이 질문이 나올 것이다. 각자 음식을 가져오는 자리라면 근사한 채식 음식을 가져가라"고 실용적이며 방법론적인 대안을 제시해주기도 한다.
동물권에 관심이 있거나 단 한 번이라도 채식을 시도해 본, 혹은 그만큼의 호기심이 있는 독자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반대로 동물권을 말하는 것이 어리석고 모순적인 일이라 생각하며, 때문에 이를 논박하려는 독자에게도 이 책을 강력히 권한다. 어느 입장에 서 있든 이미 의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동물-자연과 분리되어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인지했다는 뜻이며, 따라서 이 책에서 유의미한 정보와 새로운 질문을 얻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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