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보건복지부가 가습기 살균제의 PHMG(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과 PGH(염화에톡시에틸구아니딘) 성분이 심각한 폐 손상을 일으킨다고 발표한 데 이어 지난 4월에는 CMIT/MIT 성분의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한 사람도 사망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로써 시중에서 판매된 모든 가습기 살균제의 유독성이 밝혀졌으나 그간 관련 부처는 소관 부처 타령만 하며 허송세월했다.
그 사이 확인된 사망자는 영·유아(1~3세) 56명을 포함해 127명(2013년 5월 13일 기준, 질병관리본부 피해 접수 현황)으로 늘었다.
▲ 홍영표 민주당 의원(왼쪽)이 19일 오전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전체 회의에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구제법 안건 상정을 놓고 설전을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
약값 200만 원에 수술비 1억 원
겨우 목숨을 건진 피해자들도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전체 회의에 앞서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민주당 의원과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이 만난 자리에서, 장동만(48) 씨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아내가 먹는 약 중 면역 억제제에 더는 보험을 적용할 수 없다고 통보해서 이제 약값이 110만 원 더 늘었다"고 토로했다.
가습기 살균제로 폐가 손상된 피해자는 통상적으로 매달 200만 원에서 300만 원을 약값으로 지출하고 있다. 폐 이식 수술을 받은 경우 약 1억 원의 수술비까지 부담해야 한다. 이런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심적인 고통 외에도 2중, 3중의 고통을 겪는 피해자를 정부가 나서 구제하자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정부 부처와 일부 여당 의원의 반대에 부딪혀 피해자 구제는 번번이 좌절돼 왔다.
환경부 장관이 나서서 피해자 구제에 어깃장
피해자들은 지난 4월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구제를 위한 결의안'(심상정 진보정의당 의원 대표 발의)이 국회 본회의에서 93퍼센트의 높은 찬성률(재석 214명 중 198명 찬성)로 통과하자 조금의 희망이나마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난 5월, 환경노동위원회가 추가경정예산안으로 의결했던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대책 예산' 50억 원이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전액 삭감됐다. 당시 근거 법이 없고 정부 내에 소관 부처가 정리되지 않았다는 기획재정부의 반대 논리를 그대로 수용한 일부 여당 의원들이 반대의 뜻을 분명히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게다가 18일 윤성규 환경부 장관은 가습기 살균제와 관련해 "현대 과학기술로 알 수 없는데 그걸 어떻게 막느냐"며 "정부가 아니라 법원이 판단할 문제"라고 일축했다. 유독 물질을 관리할 책임이 있는 환경부의 수장이 나서서 정부의 책임이 아니라고 적극 표명한 것이다. 그는 "제조업체의 기금 출연 등 정부 재정이 아닌 방법으로 돕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며 정부가 피해자를 구제하는 방안에 대해서도 반기를 들고 나섰다.
"장관으로서 할 말 아니다"
전체 회의에서는 윤성규 장관의 이런 발언에 비판이 쏟아졌다.
심상정 의원은 "달나라도 가는 시대에 현대 과학으로 가습기 살균제의 피해를 밝힐 수 없다는 것은 환경부 장관으로서 할 말이 아니"라며 사망 원인으로 '가습기 살균 소독제에 의한 폐 섬유화'가 명시된 백인서 양(2006년 4월 사망)의 사망 진단서를 제시했다.
윤성규 장관은 "피해자를 국가나 기업이 지원해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현재의 법안대로 일반 국민의 세금을 가지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며 기존의 입장을 되풀이했다.
이에 심상정 의원은 "국민의 대표로서 예산심의권을 가진 국회의원의 93퍼센트가, 정부가 피해자를 구제하는 데 동의했는데 장관이 미리 앞서서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고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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