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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필요한 건 '빨간 약', 그리고 공산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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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필요한 건 '빨간 약', 그리고 공산주의!"

[어쿠스틱 인문학]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이현우와의 만남

"지젝 참 대단해! 어디서 그런 구라발이 나오는지 말이야. 갖다 붙이기도 잘 갖다 붙이고, 얼마나 많이 써제끼는지! (…) 돈도 꽤나 벌겠어. 좌파 상업주의지 뭐."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7쪽)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이란 이름뿐 아니라 위와 같은 그에 대한 술자리 촌평을 한 마디쯤 접해본 사람이 적지 않을 거다. 하도 자주 회자되어 '지젝거리다'라는 유행어가 만들어질 정도다. 그는 2000년대 한국 사회에 소개·출간된 사상가들 중 가장 앞자리를 차지하며 환호를 받았다. 그리고 지난해 10월 뉴욕 맨해튼 주코티 공원에서 '점령하라' 시위에 가담해 펼친 연설이, 유튜브를 통해 그를 '슈퍼스타'로 만들었다.

그만큼 비판과 악평도 적지 않다. 그의 저서를 탐독하는 이들도 '한 때의 지나가는 유행'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누가 그랬던가? 한국에서 학자의 대중적 인기는 장기적으로 불운이라고.

'로쟈'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예나 지금이나 지젝 읽기는 "자기 자신의 타성과 기득권과 편의주의와 무사안일주의에 대한 저항"이라고 본다. 따라서 '대한민국 1퍼센트'나 세상을 너무도 잘 아는 도인들, 현상 유지가 생활 신념인 위인들은 지젝을 읽지 않아도 되지만 '이대로는 곤란하다'는 절박함을 가진 이라면 한번쯤 그의 책을 따라가 봐야 한다. 흔한 비유지만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내민 '빨간 알약'이라는 것이다.

ⓒ상상마당

로쟈, '로자 룩셈부르크' 아닙니다!

지난 9일 저녁, <프레시안>과 KT&G 상상마당이 함께 하는 인문학 저자 대담 행사 '어쿠스틱 인문학' 다섯 번째 시간은 지젝, 그리고 로쟈와의 만남으로 이뤄졌다. 출판사 자음과모음 신사옥(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소재)에서 열린 이날 행사엔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자음과모음 펴냄)을 쓴 이현우 한림대학교 연구교수가 초대되어, 사회자인 도서평론가 이권우와 함께 두 시간 동안 지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앞서 말한 '로쟈'는 이현우의 인터넷 블로그 필명, 그를 본명보다 더 유명하게 만든 '서평꾼'으로서의 이름이다. 그가 운영하는 '로쟈의 저공비행'(☞바로 가기)은 하루 1000명 정도의 사람이 꾸준히 방문하는 인기 블로그로, 많은 이들의 책 선택 길잡이가 되어 주고 있다. 로쟈라는 필명은 그가 2000년 번역 중이던 <죄와 벌>의 등장인물 '로지온 로마노비치 라스콜리니코프'에서 따왔다. 많은 이들의 생각관 달리 '로자 룩셈부르크'의 '로자'가 아니라고.

▲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이현우 지음, 자음과모음 펴냄). ⓒ자음과모음
10년 이상 지켜 온 필명에서도 드러나듯 그의 전공도, 학문적 관심도 러시아 문학을 향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비인기학과이지만, 그에겐 역사 속 대문호들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전공 공부를 하다가 박사학위 논문을 내는 예상된 루트를 밟을 생각이었으나, "5만 원을 상금으로 주는 우수 리뷰"에 도전하며 시작한 '부업'이 지금의 그를 있게 했다고. <로쟈의 인문학 서재>(산책자 펴냄), <책을 읽을 자유>(현암사 펴냄) 등 그의 서평을 묶어낸 책들은 서점에서도 큰 사랑을 받는다.

그의 저술 활동의 한 축은, 푸슈킨과 레르몬토프의 서정시를 분석하는 <애도와 우울증>(그린비 펴냄)처럼 전공과 관련돼 있다. 그리고 그 나머지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지젝 알리기'다. 그는 <폭력이란 무엇인가>(난장이 펴냄), <레닌 재장전>(마티 펴냄),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자음과모음 펴냄) 등 지젝의 (공)저서들을 공동 번역했으며, 이번엔 본격적인 지젝 입문서를 직접 써냈다. 그것이 이날 행사의 주인공인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이다.

라캉 세미나에서 대선 후보까지, 지젝의 발자취

서평꾼 로쟈의 탄생만큼, 지젝과의 만남도 우연했다고 이현우는 말한다. 1949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슬로베니아에서 태어난 그가 한국에 소개된 것은 앞서 말한 대로 1995년, 영화 비평서인 <삐딱하게 보기>(김소연 옮김, 시각과언어 펴냄)를 통해서다. 이현우에 따르면 당시는 "주변의 영화 하던 사람들이 모두 이 책을 권해주던" 시기였고, 지젝은 '문화 이론의 엘비스', 'MTV 철학자'란 별명으로 유행을 타기 시작했다. 하지만 로쟈와 지젝의 만남은 2000년이 되어서야 이루어졌다. 그는 국내 번역본들의 "성치 않은 번역" 덕분에 원서를 대조하며 꼼꼼히 읽으면서 그의 애독자가 됐다고 회고한다.

"깊이 영향을 받은 저자들에겐 일종의 부채 의식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이현우는 이날의 행사도,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출간도 바로 그 빚 갚기의 일환이라고 표현한다. 지젝은 그에게 어떤 영향을 준 걸까? 먼저 이현우는 그의 약력을 소개한다.

▲ 슬라보예 지젝. ⓒwww.amazon.com
지젝의 발자취는 철학적으론 헤겔에서 라캉, 다루는 분야로는 정치, 종교에서 오페라나 대중문화, 지리적으로는 동구권에서 영미권, 경력으론 여러 대학에서 '대선 후보'에까지 걸쳐져 있다. 1949년생인 그는 1975년 류블라냐 대학에서 하이데거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1981년에 프랑스로 건너간다. 거기서 라캉의 사위이자 프랑스 정신분석학의 좌장인 자크알랭 밀레르를 만났고, 30명 한정의 인텐시브 코스(전문가 세미나)를 통해 라캉 이론을 통해 정신분석을 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다. 1985년, 그는 파리에서 그의 두 번째 박사 학위를 받는다.

슬로베니아로 돌아온 그는 활발한 저술 활동을 전개한다. 특히 헤겔, 라캉 철학을 통해 본 대중문화 분석으로 명성을 얻는다. 잘 알려진 대선 출마는 1990년의 일이었다. 4명의 대통령이 집단 지도하는 체제인 슬로베니아의 대선에서 그는 5위로 낙선했고, 그랬기에 이후 학문과 저술의 세계로 더 깊이, 넓게 들어올 수 있게 된다. 1989년에는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으로 영어권에 '데뷔'한다.

지젝을 바꾼 사건?

지젝을 영어권에 소개한 사람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서문을 쓰기도 한 에르네스토 라클라우(Ernesto Laclau)다. 하지만 몇 년 후 그 사이가 틀어져 현재로선 논적 관계에 놓여 있는데, 그 이유는 지젝의 달라진 정치적 입장에서 찾을 수 있다고 이현우는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급진 민주주의 계열에 속하는 라클라우와 마찬가지로, 지젝 역시 과거엔 "민주주의는 모든 가능한 체제들 중에서 최악이지만, 문제는 그 어떤 것도 그보다 낫진 않다는 것"이라는 처칠의 주장을 반복했다. 그러나 '어떤 사건' 이후 그는 코뮤니스트(공산주의자)로 선회, "민주주의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순수 정치에서 정치경제학으로"라는 이행의 궤적을 그린다. 라클라우가 소개한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은 지젝이 자유 민주주의 체제에 대해 긍정적인 비전을 갖고 있었던 때 쓰인 책인데, 이후 그 내용은 지젝의 자아비판 대상이 된다.

그 전기가 된 사건은 우리가 '9.11'이라 부르는, 미국의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이 공격을 받은 사건이다. 9.11 사건과 그 이후의 세계는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의 주제인 동시에, 이 책이 분석 대상으로 삼는 지젝의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의 주제이기도 하다. 실제 현실임과 동시에 '영화 속 한 장면'이었던 압도적 광경 이후, 누구나 '우린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일까' 자문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진짜 현실'에서 눈을 뜬 그(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 네오)의 눈에 들어오는 건 불에 타 잔해만이 남아 있는 황량한 풍경, 다름 아닌 세계 전쟁 이후 폐허가 된 시카고의 모습이다. 저항군 지도자 모피어스는 그에게 아이러니한 인사를 건넨다.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9월 11일 뉴욕에서 일어난 사건도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29쪽)

사건은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한 1989년으로부터 약 10년 후인 2001년 발생했다. 지젝은 이 사건을 통해 "10년 간 세계를 지배한 서구식 자유주의 유토피아의 종말을 봤다." '자본주의 제국' 미국의 심장을 공격한 이 사건이야말로 자본주의가 더는 지속할 수 없음을 웅변적으로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몰락한 이후 자본주의 사회 내부로부터 정의된 사건의 틀은 '문명의 충돌' 혹은 '근본주의 대 자유주의'였다. 멀리 사는 우리들도 9.11 이후 이어진 미국의 대(對)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전쟁을 '테러와의 전쟁'으로 부르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러나 지젝의 표현에 따르면 이 요란법석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거짓말"이다. 그에 따르면 최강국의 전투기들이 총동원되어 폭격하는 곳이 "이미 아무것도 파괴할 만한 것이 없는 폐허인 아프가니스탄"이라는 사실은, 이 '테러와의 전쟁'의 요점이 "9.11이라는 외상적 사건 이후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행동화'"임을 말해준다.

지젝은 9.11의 충격에 대해 "오늘날 디지털화된 제1세계와 '실재의 사막'인 제3세계 사이를 분리하는 경계를 배경으로 삼아야만 설명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우리가 격리된 '인공적 세계'에 살고 있다는 자각인데, 이것은 누군가가 우리를 항상 위협하고 있다는 관념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전망에서 '테러리스트'들은 구체적인 사회적 네트워크로부터 튀어 나와 '추상화'되고 "그들은 진정한 '이슬람 정신'을 배반한 것"이라는 방식으로 환기된다는 게 지젝의 설명이다.

그 자리에 등장하는 것은? "이슬람을 이해하고자 코란의 영역본을 불티나게 사 대는" '미국식 자유 민주주의적 관용의 태도'다. 이현우는 "얼핏 긍정적인 변화로도 간주될 수 있는 이러한 태도·추세의 함정은 여전히 이데올로기적 신비화에 머물고 있다는 점"이라면서 "바로 그렇기 때문에 9.11 공격을 낳은 정치적 정세와 역학을 포착하는 데 실패한다"고 지적한다.

MB 때문? 시스템 때문!

▲ 이현우 한림대학교 연구교수. ⓒ상상마당
자본주의가 그 근본부터 생명을 다 했다는 경고는 '9.11'로부터 10년도 지나지 않은 2008년 미국 발 금융 위기를 통해 한층 가시화됐다. 지젝은 9.11과 세계 금융위기 두 사건을, 유명한 경구를 차용해 <처음에는 비극으로 나중에는 희극으로>(창비 펴냄)라 각각 비유하며 진단한 바 있다. 그의 진단과 전망은 지난해 그가 월가에서 외친 유명한 연설 문구에 집약돼 있다. "기억하라! 문제는 부패나 탐욕이 아니다. 문제는 시스템이다." 이현우는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자본주의적 폭력은 객관적 폭력, 구조적 폭력입니다. (폭력의 주체로) 누구를 특정할 수 없다는 것이 특징이지요. 가령 기업 이윤을 극대화하는 과정에서 대규모 구조조정이 발생해 직장을 잃는다든지, 20대가 아무리 노력해도 살 곳을 마련하기 힘들다든지 하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수난을 생각해 봅시다. 자본주의적 시스템이 작동할 때 불가피하게 나오는 폭력들이죠. 이것들은 어떤 나쁜 최고경영자(CEO) 한 명의 잘못이 아니며, 흔히 규탄하는 대로 'MB 때문'도 아닙니다. 지젝은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지젝은 과거에 갖고 있던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우호적 입장을 버리는데, 그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개념을 통해서 보면 좀 더 명확히 알 수 있다. 직역하면 '성스러운 인간', '신의 보호로부터 배제된 인간'을 말하지만 '난민'에 더욱 가깝다. 지젝의 표현에 따르면 "인간으로서는 살아있으나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는 간주되지 않는 자"를 말한다.

이현우에 따르면 이들은 "신의 보호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살해해도 범죄가 성립되지 않"으며, "시민권을 보장받지 못하므로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불법 체류자'나 '중국 경찰에 붙잡힌 탈북자들'처럼 특정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아감벤은 근대 사회에서 '국민', '시민'이라 불리는 인민 전체가 실은 난민이나 다름없으며, '난민 수용소'처럼 누군가를 특정해 난민이라 여기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모두 난민이라는 사실을 감추는 미끼'라고 강조한다.

지젝은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에서 관타나모 수용소에 수감된 아프가니스탄 포로들과 탈레반의 테러리스트들은 물론, 르완다나 보스니아의 "인도주의적 원조를 받는 쪽에 해당하는 사람들"도 오늘날의 '호모 사케르'라고 지적했다. '인간의 얼굴을 한 인도적 지원'이 '비인간적 포로 대응'과 동일함을 강조한 것이다. 즉, "호모 사케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현우는 아감벤의 입장이 염세적이란 이유로 영어권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고 덧붙였지만, 이내 되묻는다. "우리를 '주인'이라며 총선 시즌마다 큰절을 올리는 정치인들 눈에, 그 외의 시간에 비친 우리는 어떠한가?" 그는 "표를 행사하기 직전에만 주권자 대접을 받고, 그 외의 시간에 하는 요구들은 묵살되는 지금, 여기의 경우를 떠올려보라"며, 우리에게도 '호모 사케르'라는 자각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나치가 공산당원을, 유대인을, 노동조합원을, 가톨릭교도를 숙청하는 동안 침묵했고, 차례가 내게로 왔을 때 나서줄 이가 아무도 남지 않았다는 시(마르틴 니묄러의 '다음은 우리다')의 내용과 마찬가집니다. '나는 저렇게 안 될 거다'라고 생각하는 그 범주 안에 결국 우리 자신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자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리 해고도 "사장 잘 만나면 괜찮아"로 넘길 문제가 아니라, 지금 잘리는 사람이 언젠가의 '나'란 생각, 이것이 시스템 자체의 문제라는 생각을 하자는 겁니다."

ⓒ상상마당

공산주의, 새로이 발명하라

이현우는 "지젝은 계몽주의자"라 말한다. 그 계몽주의자가 타파하려고 하는 현존 질서는 앞서 암시한대로 자본주의 그리고 자유 민주주의다. 그것이 무너지면, 그 자리에 무엇이 와야 하는가? 지젝이 대안으로 염두에 둔 체제는 공산주의다. 지젝은 '레닌을 반복하라'는 코뮤니즘의 주문을 외친다. 그러나 여기서의 반복이 '레닌이 한 대로의 반복'이 아니라 '레닌이 실패한 자리에서 다시 시도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이현우는 강조한다.

"지젝의 대안 속에 있는 공산주의란 새롭게 발명되어야 할 공산주의입니다. 정해진 공산주의란 없지요. 소련의 공산주의도 인류 사회에서 처음 시도되어 본 실험이었습니다. 마르크스는 사회주의 혁명이 도래할 것이라고 예언했지만, 그 다음에 어떻게 될 거라고는 적어놓지 않았어요. 러시아도 혁명 이후 4년 동안 내전을 치렀습니다. 구소련의 공산주의 체제는 70년 동안 이어져 오다 '실패'했지만, 거기에서 다 버릴 게 아니라 그 실패에서 다시 시도하라는 게 지젝의 주문입니다."

▲ 도서평론가 이권우. ⓒ상상마당
이권우가 "지젝의 공산주의에 대한 전망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달라"고 묻자, 이현우는 "공산주의는 새로 발명되어야 할 어떤 것"이라며 "자본주의와 완벽히 대치될지 아닐지는 미지수라고 본다"고 답했다. 다만 "코뮤니즘의 어원대로 '공동적인 것'을 확장시켜 삶의 중심으로 가져오자는 것이 기본적인 생각"이라며, 낮은 차원에서 특혜 교육 반대론자, 의료나 철도 민영화 반대론자 등 각각의 사안에서 재산과 가치의 '공유'를 옹호하는 이들도 이 비전에 포함된다고 말했다.

'공산주의'하면 곧바로 부정적 이미지를 상기시키는 남한 사회에서 더 깊이 들어봐야 할 이야기다. 이현우는 "치료도 교육도, 돈을 더 낼수록 더 좋은 곳에서 받을 수 있는 사회에 동의하는가?"라며 "이견이 떠오른다면 그게 코뮤니스트적 입장이라 본다"고 말했다. 물론 이 질문에 많은 이들은 자동 입력된 것처럼 '돈을 쓰는 건 번 사람의 자유'라는 답을 내놓는다. 그러나 이현우는 "가진 자가 더 많이 가지게끔 되어 있는 것이 자본주의의 본성"임을 지적, 그 전제 자체를 문제시하면서 "그때 말하는 '자유'가 무엇인지 주류 이데올로기 바깥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지젝, '조금만' 읽으세요

이상에서 살펴본 지젝의 분석틀과 주장에 대해 이현우는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말한다. 학계를 넘어 선풍적 인기를 끈 학자이니만큼 지식인들 사이에선 '맹목적으로 따라가기보다 비판적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지만, 이현우는 그런 입장에 동의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는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려면 그가 생각해 내지 못한 것을 생각해야 하는데, 내가 그럴 만큼 똑똑하지 않다"면서, "아직 완전히 밀착해서 더욱 잘 이해하고자 하는 단계에 있다"고 말했다.

그야말로 '지젝 전도사'를 자처하지만 그의 모든 책을 추천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철학자로서의 지젝' 책은, 철학도가 아닌 이상 무리해 관심 가지지 않아도 좋다고 강조했다. 그는 국내에 소개된 지젝의 저서를 다소 무거운 철학서와 영화 비평서, 그리고 시사·정치 관련서 등 세 계열로 구분할 수 있다며 그 가운데 시사 책들을 추천한다고 말했다. 이 책들이 바로 '이대로는 안 된다!'란 절박함을 가진 이들의 필독서다. 이현우는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있게 하는 책, 그리고 누구나 감동 받진 않겠지만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은 책들"이라며 "뽀빠이에게 시금치 같은 존재"라 비유했다.

이어서 이권우는 그것이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프롤로그에서 제기한 지젝과의 '피상적인 만남'이 아니냐며, 왜 그러한 만남을 권유하는지 물었다. 그는 "사람들에겐 알면 알수록 서로를 경멸하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살짝' 알수록 더 낫다"며 전문가 담론에 회의적 입장이라 밝혔다.

여기서 그가 꺼낸 개념은 '적정 기술(Appropriate Technology)'에 빗댄 표현인 '적정 인문학'이다. 그는 어느 정도까지 공유되는 교양으로서의 앎을 중요하게 본다. 바다에 비유하면 연안에서 심해까지 물 깊이는 다르지만, 그 울퉁불퉁한 높낮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바다'가 공유하는 부분이 있고 바로 그 공유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더 알고 싶다면 그 순간 더 깊은 바다로 들어가면 된다. 여기서 연안과 심해의 관계는 '대중 대 고급(학문)'이 아니라, 상호 배타적이지 않은 '적정 대 첨단' 관계라면서 그는 덧붙인다.

"소련은 인류 최초로 우주선을 쏘아 올렸지만, 교실에서 쓸 칠판지우개는 못 만들었습니다. 첨단 기술과 그렇지 않은 기술에 갭이 있는 것이죠. 이런 점이 현실 사회주의의 한계를 보여주는 한편, 마찬가지의 일이 자본주의 체제의 학문 면에서도 벌어집니다. (대학이) 교수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아무도 읽지 않는다는 사실'을 본인들마저 아는 최고 수준의 논문입니다. '적정 대 첨단' 관계 속 '첨단' 학문에서 성과가 있다면, 그걸 필요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만큼 바꿔서 전해주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피상적 만남'은 그런 식의 인문학을 말합니다."

앞으로의 저술 계획을 묻자 그는 여전히 지젝을 더 알리는 데 힘쓰고 싶다고 답했다. 그는 "읽으면 즐거워지지만 반드시 읽지 않아도 되는 철학자들도 있지만, 지젝은 안 읽으면 불편해지는 쪽에 해당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서양 철학에 대한 자양분이 없어도 즉각적으로 큰 인상을 줄 수 있는 학자라며 "지젝이야말로 '적정 인문학'이라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이현우는 마지막으로 "한발 뒤로 물러나서 이 상황을 주시하면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생각하기 시작해야 한다"는 지젝의 최신 메시지를 전했다. 그가 '어쿠스틱 인문학'이 있기 며칠 전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 독자들에게 한 말이다. 이현우는 "지금이야말로 '실재의 사막'을 직시할 때이며 그것을 직시하기 위해 용기를 갖출 필요가 있다. 즉 생각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상상마당
대담 뒤, 미리 받아 놓은 질문과 현장에서 즉석으로 받은 질문에 답하는 질의응답 시간이 이어졌다. 또 참여자들에게 '내가 살고 싶은 사회'란 주제로 각자의 생각을 적게 한 뒤, 받은 내용을 놓고 이야기하는 시간도 가졌다. 다음은 주요 질문과 답변, 앙케트와 코멘트를 '1문 1답' 형태로 요약한 것이다.

질문 ① 책 앞쪽에 나오는 '실재'라는 개념이 잘 와 닿지 않습니다.

이현우 : 잘 잡히지 않는 것, 잘 포착되지 않는 것이 바로 '실재'입니다. 말로 다 건져낼 수 없는 것, 상징계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부분입니다. 제가 '책상'을 말했을 때, 이 말 자체가 여기 앞에 놓인 이것의 어떤 실재감을 다 전달하지는 못합니다. 그때 남는 잔여적인 것이 바로 '실재'입니다.

그런데 이 '실재' 개념을 완벽히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책 앞부분에 개념을 배치해서 독자들의 진입을 어렵게 한 점, 사과드립니다. 레닌의 말대로 다음엔 더 낫게 실패해야지요. (웃음) 지젝이 헤겔과 라캉을 이야기하니까 그 둘을 먼저 알고 지젝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도 많은데, 전 '거꾸로 올라가라'라고 조언하고 싶습니다. 헤겔과 라캉은 인류사에서 가장 난해한 저자 둘입니다. '먼저' 읽을 만한 무엇이 아니지요. 지젝에 빠지다 보면 한 단계 넘어설 계기가 올 텐데, 그 단계로 진입하기 전에 어려운 개념들을 알면 된다고 봅니다.

② <폭력이란 무엇인가>를 보며 지젝이 폭력을 정당화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현우 : 보이는 폭력보다 보이지 않는 폭력, 즉 구조적 폭력을 더 문제 삼아야 한다는 게 그 책의 핵심 주장입니다. 폭력에 대한 흔한 통념 때문에 오해가 생기지 않나 싶은데, 그는 폭력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서로 치고받는, 눈에 보이는 폭력에 대해서는 굉장히 호들갑을 떠는데, 구조적 폭력엔 둔해서 그걸 저지르는 시스템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거죠. 거기서 우리의 관심의 방향이 보이지 않는 폭력으로 향해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합니다.

지젝이 옹호하는 폭력은 신성한 폭력, 저항의 폭력입니다. 물론 그 자체가 옳다고 하긴 어렵습니다. 다만 그것은 더 큰 폭력에 주목하라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대응 폭력이란 관점에서 보면, '테러 사건을 유발시킨 이유'를 상기하는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지젝이 말하는 신성한 폭력이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터져 나오는' 폭력입니다. 그때 '그것을 어떻게 식별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달려오는데요, 전 그것이 지식인들이 갖는 전형적인 관점, 관조적 입장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건 주관적인 것이고, 그 폭력은 주체적 결단이라 봅니다. '참을 수 있지 않느냐'란 말은 월권 아닐까요?

③ '적정 인문학'도 중요하지만 제대로 된 학계를 만드는 일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어떤 학자는 '한국엔 학계가 없다'고까지 말했습니다. 그렇기에 지젝 같은 철학자도 나올 수 없는 것 아닐까요?

이현우 : 지젝은 그 의견에 동의하지 못할 것 같은데요. 지젝 역시 정상적인 과정 속에서 나온 게 아니라 갑자기 튀어나온 존재거든요. 우리가 제대로 된 학계를 만든다고 해서 지젝 같은 철학자가 '배양'되는 것은 아닙니다. 대학이란 제도 안의 인문학은 사실 인문학을 위한 인문학, 기득권 인문학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제도 안에 있으면 바깥 생각을 할 필요가 없어지거든요.

정부에서 학계에 지원금을 주면, 구미에 맞는 결과를 납품하는 현상이 과학 쪽에서 종종 벌어지죠. 자연과학이 그렇다면 인문사회과학도 마찬가지입니다. 20세기의 대학사(史)를 보면, 대부분 지역학에 치중되어서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 같은 책이 많이 나오고 유행했는데요. 객관적 지식을 생산하는 것 같지만 실은 국가주의적·제국주의적 관심과 연관되어 있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청중들이 말하는 '내가 살고 싶은 사회' ① 사람들이 불안 없이 다 다르게 살 수 있는 사회.

이현우 : 지젝 생각과는 다릅니다. 그는 불안 없는 삶은 카페인 없는 커피 같은 거라고 말합니다. 가짜라는 것이죠. 진정한 삶은 리스크를 무릅쓰지 않으면 안 되는 삶입니다. 연애만 해도 마찬가지죠.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것 역시 상당한 위험을 수반하는 일입니다. 위험과 불안은 삶에 반드시 필요한 무엇입니다.

② 종교가 없는 사회.

이현우 : 이것도 지젝 생각과는 다릅니다. 지젝은 기독교를 옹호합니다. 물론 기독교적 형식에 대한 옹호이지 신앙에 대한 옹호는 아니고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존재 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 지젝은 그게 기독교의 신비라고 생각합니다. 그 '신'의 자리에 '이념'을 갖다 놓아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예를 들어 공산주의란 이념에도 그 밑에 근본적 환상이란 게 있는데, 그것을 알고는 있지만 이념에 대한 믿음을 견지하면서 자기를 던질 수 있는 것. 그게 그가 옹호한다는 '형식'이고, 다른 표현으론 '참된 위선'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③ '꿈은 이루어진다!'에 물음표를 던질 수 있는 사회.

이현우 : 이건 '자수성가의 꿈'이나 '이명박 주의'를 의문시할 수 있는 사회를 말하는 건가요? 우린 그런 사회에는 이미 와 있는 것 같습니다. 전 좀 더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명박 같은 사람도 무상급식 받을 수 있는 사회'로까지요. 그게 제가 바라는 사회입니다. (웃음)

④ 먹고살 문제가 배울 기술을 결정하지 않고, 취업 때문에 과를 선택하지 않는 사회.

이현우 : 동의하는데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면, 예전에 사회디자인연구소의 김대호 소장이 어딘가에서 '비정규직이 철폐된 사회보다 비정규직도 먹고사는 데 지장 없는 사회가 낫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저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정규직이라고 해서 더 행복한 건 아니죠. 저도 비정규직인데 (웃음), 비정규직으로 살며 일하다 쉬다 해도 먹고사는 데 지장 없는 사회, 그게 더 이상적이지 않나요?

⑤ <도가니>를 보고 느꼈던 것처럼, 사회를 좋은 방향으로 끌고 나가는 문화 환경이 발전할 수 있는 사회.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사회 참여하는 사회.

이현우 : <도가니>, <부러진 화살> 같은 사회성 짙은 영화들이 대중적으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는 것, 좋게 생각합니다. 그동안 한국에서 영화는 대개가 꿈과 환상의 소비에만 머물러 있었는데 관객들의 취향이 달라지고 있단 느낌을 받았어요. 사람들이 현실 문제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중요한 변화라고 봅니다.

저는 '나는 꼼수다' 현상도, 표현 방식에서 문제제기는 있어야겠지만 좋게 생각합니다. 김어준이 '대중의 의식은 상당히 느리게 변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사회를 궁극적으로 변화시키는 게 있다면 바로 그런 느린 변화입니다. 소수의 '선지자'들이 바꾼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지젝이 세상을 바꾸는 게 아니라, 지젝의 생각이 널리 알려지면 세상이 바뀔 수 있는 것이지요. 당대건 앞으로건, 혁명적 사상 그 자체가 세상을 움직이진 못하지만, 그걸 공유하고 그 대의에 합류하는 사람이 많아질 때엔 '바꿔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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