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4일 워싱턴을 향해 떠나면서 하지 사령관이 발표한 성명서에 그 시점 그의 입장이 최대한 표명되어 있었다. 긴 성명서인데, 요점만 발췌해 놓는다.
"조선 독립은 필연코 오리라는 것을 믿는다. 조선인과 연합국이 충분히 협력하면 그날이 속히 도래할 것이다. 조선 독립은 연합군이 여러 차례 공약한 것이다. 이 공약의 이행 방법은 모스크바 협정에서 규정되었고 그 공약의 구체적 실현에 대하여는 3대국이 동의하였다. 이 협정의 조문은 카이로 선언에 있는 '적당한 시기' 운운의 문구에 비하여 단연 확정적이다. 모스크바 협정에는 2개 목적이 있다.
1) 조선 민주주의 임시 정부 수립
2) 4대국의 조력과 원조를 통하여 재생 조선 정부와 국가를 확립시키려는 것이다.
3대 협정국의 결의를 이행할 대행 기관으로 서명한 국가는 이 2대 목적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한 것이다.
(…) 조선 문제에 국제성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여러분이나 본관은 모스크바 결정에 대하여 일언반구도 변경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조선 사람은 반탁 운동을 전국적으로 하면 모스크바 협정 체결국에 인상을 주어 그 협정을 수정이나 하지 않을까 하고 믿는 듯하다. 그러나 그것은 예기했던 것보다 전연 다른 효과가 안 나겠다고 보장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연합국에서 장래 귀국의 애국자들을 참가시키려는 방침을 결정하는 데 대하여 미리부터 사회적 혼란을 계획하는 것보다는 이미 결정된 국제 협정을 이용함으로써 귀국의 독립을 완성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내가 충심으로 여러분께 권고하는 바는 오도된 애국 운동으로서 비애국적 결과를 초래하지 말라는 것과 오직 통일 조선의 임시정부 수립을 천연시키게 되는 소동을 정지하여 달라는 것이다." (여러 신문 1947년 2월 15일자)
하지의 워싱턴행에 대해 재미 활동가인 김용중과 미국 체류 중인 이승만의 견해가 보도되었다.
이승만 담 : "하지 중장의 화부 방문은 조선 문제 해결에 있어서 진전을 보이고 있다는 점을 의미함이 명백하다. 나는 자세한 말은 하고 싶지는 않으나 하여튼 하지 중장은 조선의 좌익에 대하여 새로운 태도를 취할는지 모르며 또 만약 하지 중장이 조선의 소수 공산주의자에 대한 정책을 변환하지 않는 한 하 중장이 조선에서 성공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하 중장은 남조선의 좌익 측에 대하여 과대한 중요성을 주고 있는데 금번 안재홍이 민정장관으로 임명된 사실은 저간의 사정을 입증하는 것이다. 나는 안재홍이 조선 인민의 의사에 추종하는 경우에 此를 지지할 터이다."
김용중 담 : "금번 하지 중장의 화부 방문은 來 3월 10일부터 개최되는 모스크바 4상 회의에 대처하려는 먀샬 국무장관의 준비 대책이라고 생각된다. 하여간 나는 미소 양방이 모스크바회의 종료 전에 조선 문제를 토의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여러 신문 1947년 2월 15일자)
김용중이 하지 소환의 목적이 4상회의 준비를 위한 기술적 조치로 보는 반면 이승만은 하지의 '용공 노선' 시정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안재홍의 민정장관 임명을 하지의 용공적 태도에 대한 증거로 보는 점이 흥미롭다.
그런데 2월 17일 전송된 AP통신의 "주간 시사 전망"을 보면 김용중과 같은 시각이 미국 언론에서는 일반적이었다. 3월에 열릴 모스크바 회담 준비가 하지의 소환을 위한 충분조건으로 인정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소환에 하지의 정책에 대한 비판의 의미가 있었다고 본 것은 이승만의 희망사항일 뿐이었던 것 같다.
[뉴욕 17일발 AP합동] 2월 제3주 'AP 주간 시사 전망'은 다음과 같다.
(…) 한편 하지 중장은 돌연 미 육군 국무 양성과 조선 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화부로 소환되어 서울을 출발하였는데 이에 대한 국내외 관측은 다음과 같다. 즉 하지 중장의 화부 방문은 조선 문제 해결의 진전을 의미하는 것이며 來 3월 10일부터 개최되는 모스크바 4상 회의에 대처하려는 마샬 국무장관의 준비 대책이라는 것이다. 또 현재 서울에서 전개되고 있는 학생맹휴에 관련한 서울로부터의 정보에 의하면 이것은 맹휴 단행으로 남조선에 혁명을 야기시키려는 남조선 노동 운동자에 보낸 소 측 사주라 하는데 이에 관련하여 미 국무장관 마샬은 서울로부터 정식 확보가 입수 되는대로 미 태도를 결정할 것이라고 언명한 바 있었다. (<동아일보> 1947년 2월 18일자)
기사 중 "남조선 노동 운동자에 보낸 소 측 사주"란 것을 짚고 넘어가야겠다. 북조선 주둔 소련군의 소령(소좌) 하나가 남노당 위원장 허헌에게 혼란 책동 지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재 서울 AP특파원 로버트 제공 15일 합동] 남조선 주둔 미군 소식통 언명에 의하면 조선 경찰은 최근 소련군 당국으로부터 남조선에 있는 조선인 노동 운동 지도자에게 보낸 서한의 복사를 몰수하였다 하는데, 그 내용은 미군 점령하의 남조선에서 혁명의 예비 단계로서 학생들의 동맹 휴학을 단행시키라는 내용의 것이었다 한다. 그리고 이 서한의 복사는 서울시에 있는 학생협회본부에서 12일 접수된 것이라 하며 동 서한의 원문도 발견되었다 한다. 즉 동 서한은 북조선소련군 교육 문제 주임 장교인 니콜라이 쿠즈노프 소좌로부터 남조선노동당위원장 허헌에게 보내온 것이라 하나 허 씨는 이를 부정하고 있다. 그리고 동 서한의 내용을 보면 남조선노동조합연맹은 남조선 전체에 긍하여 혁명을 야기시키라는 것인데 그 목적은 남조선미군정이 수립한 전 행정 기구를 일소시키는 데 있으며 그 제일보로서 학생들의 맹휴를 단행시키려는 것이었다 한다. (<동아일보> 1947년 2월 16일자)
남쪽의 혼란을 북쪽에서 조직적으로 부추긴 것이 사실인지 여부는 모르겠다. 이승만과 한민당 등 극우파에서는 그렇게 주장해 왔다. 그런데 그것이 설령 사실이라 하더라도 소련군의 소령이 남노당 위원장이자 민전 공동의장인 허헌에게 직접 편지를 보냈다는 얘기는 아무래도 좀 웃긴다. 민전에서 이 보도를 부인한 성명은 간단하다. "남조선 미군 당국이 북조선의 어떠한 단체에 지령을 발할 수 없는 것과 같이 북조선 소련군 당국이 남조선 단체에 지령을 발할 수 없다." (<경향신문> 1947년 2월 18일자)
누군가의 공작인데, 허헌의 해명은 이승만을 겨냥한다.
"(…) 나는 이 허구의 지시가 기사로 발표되기 전 외에 일어난 사실을 동포들 앞에 밝히려 한다. 도미한 이승만으로부터 금월 13일 금번 맹휴는 북조선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발표가 있은 후 그 익일 합위 박건웅으로부터 금번 내조한 미국기자단 이경 전에 UP 대표 스탠리 리취와 꼭 면담하여 조선사정을 잘 전달하여 달라는 알선서한을 받아 리취를 면접케 되었다. 그러나 리취가 미기자단 일행이 아니요 조선특파원이라는 것을 그 석상에서 알게 되었으며 그가 첫 번 제출한 문제가 이 서한의 내용과 그 진부에 대한 질문이었다. 12일 압수된 서한 내용이 어떻게 13일 신문에 게재되도록 미국에 있는 이 박사의 입을 통하여 발표되었으며 이것이 학생의 수색에서 나왔다는 것이 16일 UP통신에 노동당 본부에서 나왔다는 갈팡질팡과 이것을 발표하기에 초조한 반동분자들은 서울특파원을 미국기자단의 일행처럼 속이며(…)" (<서울신문> 1947년 2월 18일자)
인과관계가 명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관계된 발표의 시간과 방법 등으로 보아 정황은 뚜렷하다. 2월 12일에 경찰에서 압수했다는 '지령'이 즉각 미국에 있는 이승만에게는 알려졌고, 국내 언론에는 공표되지 않은 사건의 '미군 소식통 언명'이 AP 기자에게 주어졌다는 것이다. 이 공작은 국내용이 아니라 미국 수출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국내 언론 기자라면 <동아일보>나 <대동일보> 기자라도 도저히 그대로 받아쓸 수 없는 유치한 내용이다.
허헌의 해명 중 "미국 기자단" 얘기가 나오는데, 2월 11일에서 14일까지 방문한 기자단은 조선 조야의 이목을 끌었다. 9인의 중진-중견 기자로 구성된 이 기자단의 방문은 미국 언론과의 모처럼의 큰 접촉이었다. 미국 언론을 중시하던 이승만은 기자단 방문과 관련해 민주의원과 민통에 진보로 지침을 보냈고, 민전은 2월 13일 기자단을 위한 만찬을 베풀었다. 그 자리에서 김구의 환영사에 눈여겨 볼 대목이 있다.
"하지 중장 이하 미군 장병이 성심성의로 조선 재건에 노력은 하고 있으나 조선인의 심리와 사정에 어두운 관계로 소기의 효과를 거두기도 용이치 않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하지 중장이 최소한 기간 내에 행정권을 조선인에게 이양하기로 결정한 것은 적의(適宜)의 조치인가 합니다.
(…) 이러한 의미에서 조선 민족 전부가 다 신탁 통치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이 난점으로 인하여 미소공동위원회는 그 임무를 수행치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러한 실정에 있으므로 우리는 오는 모스크바 4상 회의에서 1945년의 모스크바 협정을 충분히 재검토하고 원만한 실효를 얻도록 교정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즉 신탁 통치 조항은 전부 삭제하고 조선의 안전 독립을 즉시 실시하기로 하되 그 방법으로 하는 미소공동위원회의 구성을 확대하여 영, 중의 대표와 아울러 조선인 대표도 참가케 하였으면 좋을까 합니다. 그렇게 되면 재래에 다만 미소 양국 대표로만 구성하여 사실상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은 폐를 덜고 위원회 임무 수행에 큰 진전을 보게 될 것입니다." (<동아일보> 1947년 2월 16일자)
모스크바 협정 내용 중 신탁 통치 조항 삭제는 반탁 세력에서 주장해 온 것인데, 김구는 이에 더해 미소공위의 역할을 중국과 영국, 그리고 조선 대표까지 참여하는 다자 회의로 대치하자는 것이었다. 당시 중국은 물론 국민당 정권이었으므로 중-영의 참여는 소련의 입장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임정의 입장을 강화하는 방책이었다.
1945년 12월의 3상 회담에 이어 1947년 3월의 4상 회담을 앞두고 '외상 회담'의 성격을 확인해 둔다. 연합국 외상 회담(Council of Foreign Ministers)은 1945년 7~8월의 포츠담 회담에서 후속 조치를 맡도록 설치를 결정한 기구다. 1945년 9월의 런던 회담은 일본 점령 문제를 둘러싼 미-소 간의 논쟁으로 인해 성과 없이 끝났고, 3개월 후의 모스크바 회담에서 가장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1946년 파리 회담에서부터 프랑스가 참여했고, 1947년에는 봄의 모스크바 회담과 가을의 런던 회담이 열렸는데, 냉전의 심화에 따라 그 기능이 차츰 마비되어 가고 있었다.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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