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때면 딜레탕트, 곧 '예술이나 학문을 직업으로 하지 않고 취미 삼아 하는 사람'을 자처하며 자위한다. 학문하기를 취미 삼을 정도도 못 되지만 괜찮다. 세상을 보는 눈을 키우고, 어디쯤 서서 어디로 가려는지 아는 재미도 쏠쏠하니까.
한데 이런 생각이 고질이었던 모양이다. 40년 전 고등학교 3학년 때 성호 이익의 저술을 만났다. '실학'이니 '성호사설', '전론(田論)' 등 국사 시간의 단편적 지식으로 족할 것을 책을 구해 읽었으니 말이다.
당시 삼성문화재단에서 권당 70원짜리 삼성문화문고를 선보였다. 상속세 탈세를 위한 장치라느니, "염가 출판으로 드디어 출판계마저 접수하려 한다"느니 해서 논란이 벌어졌던 기억이 선명하다. 결국 회원 한정 판매라는 절충이 이뤄졌는데 대학 입시를 앞두고 당시 서울 서소문 중앙일보 본사까지 가서 신청을 하는 바지런을 떨어 손에 넣은 책 중 하나가 <성호잡저(星湖雜著)>(이익성 옮김, 삼성문화재단 펴냄)다.
책은 지금 봐도 좋다.
"과거란 선비들이 각자의 재능을 뽐내어 요행히 유사(有司)에게 뽑히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공부는 글을 외우고 짓는 따위의 말단의 일에 불과하다. 세상에 태어나 머리털이 미처 마르기도 전에 과거에 대한 공부만을 하므로 요행히 과거에 급제하여도 그들이 배운 것은 여전히 서투르고 거칠어 그 배운 것이 소용이 없고, 소용되는 것은 그들이 배운 것이 아니다."
이런 구절이 첫 페이지에 나온다. 요즘 시론에 실어도 무방할 정도로 생명력이 여전한 글이다. 문제는 늦어도 대학 1학년 때는 읽었을 이런 내용이 가물가물한 정도가 아니라 영 낯선 것이 딴 나라 글 같다는 점이다.
▲ <성호, 세상을 논하다>(강명관 지음, 자음과모음 펴냄). ⓒ자음과모음 |
과연 성호 이익이 희필(戱筆)이라 눙친 <성호사설>의 글 3000여 편 중에서 골라낸 그의 글은 곰곰 생각해 볼 거리가 여럿이었다. '지식인의 가난' '조선시대 홈리스' '쓸데없는 관료들의 세상' 등의 소제목을 보면 그의 전작 <옛 글에 빗대어 세상을 말하다>(길 펴냄)와 같은 맥락임을 짐작할 수 있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다양한 전거를 든 <옛 글에 빗대어 세상을 말하다>와 달리 성호 이익이란 하나의 프레임으로 현대 한국 사회를 봤다는 점이다. 이는 이익이 정치, 경제, 외교, 교육 등 다방면에 걸쳐 궁구한 백과전서파의 선비였기에 가능했지만 여기에 지은이의 밝은 눈이 더해져 원문 해제를 읽는 것에 비해 얻는 바가 많다. 또한 그때그때 연재했던 글을 묶은 것이 아니라 안식년을 이용해 한 주제를 천착한 독서의 결실이란 점도 <옛 글에 빗대어 세상을 말하다>와 다른 점이다.
"옛날에는 높은 벼슬아치일지라도 거개 가난하고 천한 처지에서 나왔고, 임금도 임금이 되기 전에는 평민의 신분으로 험한 일을 두루 겪어 그 간난함을 알았다."
'사치, 불의의 실행'에는 성호 이익의 이 같은 말에 이어 지은이는 "그때 사회와 나라는 그나마 건강했다. 하지만 조선에 벌열, 곧 영구 집권층이 생기면서 사치가 번졌고 조선은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고 덧붙인다.
"겹이불을 덮고 수탄을 땔 때면 천하에 몸이 얼어붙는 사람이 있는 줄을 알아야 하고, 화려한 집에서 푸짐한 음식을 차릴 때에는 천하에 굶주림을 참는 자가 있는 줄을 알아야 하고 (…) 만사가 내 뜻대로 되어 기분이 좋을 때면 천하에 원한을 품고 억울해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며 통치자가 백성의 사정을 모르는 것이 그들이 펼치는 정치의 가장 큰 오류라는 성호의 지적은 오늘날 이른바 지도층이 새겨야 할 말 아닐까.
성호의 '닭을 길러보고 당쟁의 이치를 알다'는 더하다. 첫 부분에 모이를 찾느라 다투고, 지팡이를 휘둘러 쫓아도 맞을 때 잠깐이고는 다시 모이로 달려들어 신발을 더럽히는 행태로 시작하는 글이다.
'닭보다도 못한 정당'은 "당파가 싸우는 것은 벼슬과 녹봉 때문이다"는 성호의 말은 "권력을 잡는 데는 더할 수 없이 기민하고 교활하지만 정작 정치에는 무능하여 정치 혐오증을 불러일으킨다. 정치 혐오증은 국민들로 하여금 정치를 외면하게 하려는 거대 정당들이 침묵으로 합의한 카르텔의 산물이다" "한국의 거대 정당은 붕당이 했던 일을 반복한다. 이성적 판단은 팽개치고 오직 권력을 쥔 자기 정당 혹은 정파의 구호만을 존중한다. 논리적 모순, 사실 왜곡은 다반사이며 자기 정당 구성원이 저지른 범죄는 변명과 침묵으로 일관한다"는 지은이의 질타로 이어진다. 여기에서 자유로운 정치인은 얼마나 될까.
사실 고전은 원문을 그대로 옮겨 보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전문적 지식이 부족한 보통 독자들로선 그 함의를 제대로 읽어내기 힘들다. 그러니 이를 풀어주는 학자들의 글이 대접을 받는 것인데 그렇다 해도 기성복을 입는 듯한 기분을 떨치기 힘들다. 이 책의 경우 갖가지 책을 바탕으로 한 성호의 시론집을, 다시 강명관의 눈을 통해 보는 격이어서 더욱 그렇긴 하다.
강명관도 인정하듯 유학자란 한계를 지닌 성호의 생각이나 때로는 격정적인 지은이의 글이 다소 불편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과거의 폐단을 보완하기 위해 천거제를 추천한 성호의 생각은 그렇지 않아도 인사와 사업 등 각 분야에서 학연, 혈연, 지연이 알게 모르게 힘을 발휘하는 오늘날엔 공정성 확보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영·정조 시대를 '조선의 르네상스'로 보는 견해는 "자신이 보고 싶은 면만 본 것"이고 실은 혼란한 세상, 붕괴 직전의 사회였다는 지은이의 지적도 "국사 교육에 세뇌된" 사람으로선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그런 이들을 위해 오항녕의 <조선의 힘>(역사비평사 펴냄)을 권한다. '있는 그대로' 조선 역사 보기를 내세워 문치주의, 실록, 강상(綱常) 등 500년을 버틴 시스템을 재평가한 책인데 특히 성리학과 당쟁을 보는 새로운 눈을 제공한다. 제대로 된 온고지신(溫故知新)을 위해 우선은 다양한 시각을 접해야 하기 때문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