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의 인용문은 잉글랜드-웨일스 녹색당 대표 캐롤라인 루카스가 <가디언>과의 대담에서 말한 것이다(2011년 9월 9일). 녹색당과 녹색 운동이 왜 반자본주의적일 수밖에 없는가를 간명하게 표현해 준다.
이제 우리는 '환경'과 '녹색' 담론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국제회의, 정상 회담, 정부 발표, 심지어는 아파트와 화장품 광고에까지 '환경'과 '녹색'이 등장한다. 참 이상한 일은 그러면 그럴수록 애초에 '환경'과 '녹색'이 담고 있었던 문명 위기와 생존의 문제는 점점 희석되어 간다는 것이다.
한편에서 과학자들이 내놓는 시나리오는 재앙을 넘어 이번 세기 안에 인류의 생존 자체가 위협받을 수 있을 정도의 공포다. 비판적 사회과학자들은 제3세계 인민들에게 이러한 재앙은 이미 현재형임을 보여준다. 원인은 분명하다. 소위 선진국의 낭비적이고 과도한 생산과 소비이며, 그것을 지탱하고 있는 자본주의라는 경제 체제가 그것이다.
나는 분명 이제 많은 사람들이 환경 위기에 대해 인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기후 변화에 대한 전문적 지식과 수많은 종의 멸종에 대한 정보가 없다고 하더라도 예측할 수 없는 기후 패턴, 폭염과 한파, 거기다가 핵 위협까지, 환경 위기는 이제 일상생활의 경험을 통해 인지되고 있는 것이다.
▲ <기후 정의>(이안 앵거스 엮음, 김현우·이정필·이진우 옮김, 이매진 펴냄). ⓒ이매진 |
하지만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기후 변화와 환경 위기라면 이러한 대응은 합리적이지 않다. 왜? 대답은 아주 간단하다. 그리고 그것은 소위 주류 학자와 정치인이 선호하는 아주 간단한 경험적 증거들에 의해 뒷받침된다. 기후 변화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는 온실 기체 배출 감축이라는 일차적 목표를 달성하기는커녕 오히려 증가하는 것을 방치하고 있다는 사실.
기후 변화의 양상이 이미 걷잡을 없는 단계에 이르고 있고 지금 당장 특단의 조치가 취해지지 않는다면 다음 세대의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이미 오래전에 대안적인 조치들이 논의되고 추진되었어야 한다. 도대체 왜 지극히 상식적이고 지극히 간단한 이러한 생각이 현실에서는 부정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기후 변화의 환경 위기를 나약한 인간으로서 경험한다. 홍수, 가뭄, 기아, 폭염, 한파 등. 하지만 이에 대한 대응은 특수한 사회 체제 아래에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모두 소비자이며 투자자이며 자본가들인 것이다. 누군가의 통찰처럼 구조적 효과로서의 자본가와 인간 그 자체는 전혀 다른 범주이다. 자본가의 존재 이유는 이윤 추구와 축적에 있다. 자본주의 아래서 보통 사람들이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임노동을 파는 것이다. 그리고 시장을 통해 욕구와 필요를 충족할 수 있는 상품을 구매해야 한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자본의 끝없는 확대 재생산에 의해 유지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소비 또한 '욕망'을 통해 지속적으로 확대 재생산되어야 한다.
한 사람을 가정해 보자. 그는 녹색당원이다. 환경 위기에 대해 걱정하고 기후 변화를 위해 지금 당장 실질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캐롤라인 루카스처럼 자본주의는 이러한 조치들을 어렵게 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에 비판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는 아주 평범한 회사원이다. 삶이 팍팍하다. 두서너 개의 카드로 소위 돌려막기를 하면서 살고 있다. 집값 때문에 직장과는 멀리 떨어져 있어 승용차를 운전해야 한다. 수입 수준과 주변 환경 때문에 대부분의 먹을거리는 대형 할인점에서 구매할 수밖에 없다. 아이들이 뒤처지는 것이 두려워 무리를 해가면서 사교육을 시킨다. 2년마다 이사를 하거나 집값을 올려주어야 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 대출을 받아 자그마한 아파트를 마련했다. 그리고 은퇴 후가 너무 불안해 보험을 들고 약간의 주식 투자를 한다.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아주 평범한 모습이다. 나 자신일 수도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환경 위기에 대한 높은 인식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일상적인 삶 자체가 환경에 위협적이라는 지극히 간단한 결론에 도달하기에는 자본주의가 지탱하고 있는 삶의 구조가 너무 단단하다는 것이다. 대중 매체를 통해 유지되는 자본주의의 대안은 없는 '이데올로기', 그것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국가권력은 이 단단한 구조에 때로는 더 단단한 외피가 되고 때로는 부드러운 보호막이 되기도 한다.
<기후 정의>에 실려 있는 글들은 분명 이러한 단단한 구조에 도전해야만 하는 당위, 도전할 수 있는 근거, 그리고 도전하고 있는 구체적 실천들에 대한 기록이다. 한 글자 한 글자, 한 문단 한 문단이 모두 절박한 인민들의 투쟁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읽는 이의 마음을 움직인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비판의 타깃은 선진국의 소비주의적 자본주의 체제이지만 투쟁의 근거는 제3세계로부터 나온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소비주의적 자본주의 체제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다르게 살고'자 하는 열망을 읽어내지 못하는 반자본주의적 전략이 얼마나 실현 가능성이 있을까에 대해서는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제3세계로부터의 도전이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삶의 방식 자체의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소비주의적 삶의 방식 안에 존재하는, 소비주의에 의해서는 도저히 충족될 수 없는 욕구와 필요에 근거하는 사회적 투쟁에 주목해야 한다. 작지만 흩여져 있는, 그래서 종종 실패할 수밖에 없는 반자본주의적, 또는 탈자본주의적 삶의 실험들 말이다.
반자본주의적 녹색 사회로 전환하기 위해서 경제와 사회에 대한 공적 개입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공적 개입의 주체는 국가 또는 정부이다. 녹색 사회주의자들은 공히 국가의 공적 개입을 요청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그 국가권력은 자본주의 체제의 옹호자라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국가 권력의 성격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정치적 투쟁의 경로가 밝혀져야 할 필요가 생겨난다. 앞에서 언급한 반자본주의적/탈자본주의적 삶의 실험들에 근거한 밑으로부터의 사회적 투쟁과 이에 근거한 국가권력의 말단으로부터 잠식이 없다면, 국가를 반자본주의적인 공적 개입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이러한 구체적 분석과 전략이 없다면 국가는 '자본주의적'이거나 '사회주의적'인 이념형만이 존재하게 된다. <기후 정의>의 필자들과 녹색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이 넘어서야할 현실적이지만 대단히 이론적인 문제이다.
우리가 흔히 빠지게 되는 유혹은 '명확한 해답'이다. 하지만 '명확한' 답은 현실의 복잡함과 모순을 놓치게 하기도 한다. 우리는 반자본주의와 녹색 사회주의라는 너무도 명확한 답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분명 그 길만이 현재 인류가 처해 있는 위기를 넘어설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고통받는 가난한 나라들의 인민들과 선진국의 빈곤층의 현실에 대한 분노와 그들의 투쟁과 공감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머나먼 치아파스 정글의 사파티스타 농민 반군의 투쟁에 공감하고 지지하면서 우리는 여전히 지극히 소비주의적이고 지극히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을 고수하면서 그들의 삶의 터전을 위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 여기에서 어떤 방식으로 반자본주의적이고 생태주의적 삶을 꾸려 나갈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그것이 아주 작고 사소할 것일지라도. 녹색 사회주의자들의 임무는 이렇듯 작고 사소한 '몸부림'이 가지고 있는 반자본주의적 잠재력을 일깨울 수 있는 사회적 운동을 연결하고 그 힘을 통해 국가의 공적 개입을 방향을 전변시켜내는 것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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